초현실주의를 살아낸 미국 여성, 케이 세이지
[K라이프저니|고요비 기자] 케이 세이지(Kay Sage, 1898~1963)는 20세기 초현실주의 미술 운동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는 미국 화가다. 뉴욕 올버니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난 그녀는 이탈리아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며 미술을 공부했고, 1937년 파리에서 살바도르 달리, 이브 탕기(Yves Tanguy) 등 초현실주의 핵심 그룹과 조우하며 자신의 예술적 방향을 확립했다.
1940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미국으로 귀국한 그녀는 함께 망명한 초현실주의 화가 이브 탕기와 결혼하며 미국 초현실주의 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그러나 세이지는 남편의 그늘에 가려 오랫동안 과소평가된 비운의 작가이기도 하다. 탕기 사후인 1955년부터 극심한 우울증과 시력 저하로 고통받던 그녀는 1963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오늘날 미술사가들은 세이지를 단순한 '초현실주의자의 아내'가 아닌, 독자적인 조형 언어와 철학적 깊이를 갖춘 초현실주의의 핵심 작가로 재평가하고 있다. 미국 현대미술사에서 여성 초현실주의자의 목소리를 대표하는 존재로서, 그녀의 위상은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기하학의 절벽 위에 선 인간 — 섬세하고 냉철한 화법
‘르 파사주(Le Passage, 길/통로/이행)’는 세이지가 남편 탕기를 잃고 1년이 지난 1956년에 완성한 작품으로, 캔버스에 유채, 91×71cm의 크기다. 화면은 단순하지만 강렬하다. 금발의 여성이 등을 보인 채 기하학적 석조 구조물의 모서리에 앉아 광활한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금빛 천이 허리를 감싸고 있을 뿐 상반신은 드러나 있으며, 여성의 뒷모습은 세밀하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배경은 세이지 특유의 초현실주의적 공간 처리로 가득하다. 세상은 지평선을 기준으로 하늘과 대지로 나뉘고, 대지는 장식적이고 규칙적인 선으로 양식화되어, 살아있다기 보다는 꿈속에 가깝다. 여성이 앉은 구조물은 불규칙하게 쪼개진 석판들의 집합체로, 자연도 아니고 완전한 건축물도 아닌 불안정한 경계 위에 놓여 있다. 명암은 고전적인 테네브리즘 기법처럼 정교하되, 광원은 초현실적으로 모호하다. 전체적으로 화면은 차갑고 건조하며, 극도로 절제된 팔레트가 사용되었다.
상실과 이행 — '통로'라는 제목이 품은 깊은 뜻
작품의 제목 'Le Passage'는 프랑스어로 '통로', '이행', '지나감'을 의미한다. 1955년 남편 이브 탕기의 갑작스러운 사망 직후 그려진 이 작품에서, 이 단어는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닌 삶과 죽음의 경계, 이쪽과 저쪽 세계 사이의 문턱을 암시한다.
등을 보이는 여성은 관람자에게 얼굴을 열지 않는다. 그녀는 우리의 세계가 아닌 저 너머의 바다를 향해 있다. 이것이 세이지 자신의 내면적 초상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발 아래의 쪼개진 석판들은 무너지는 일상과 심리적 균열을 상징하고, 광활한 대지는 탕기가 건너간 죽음의 세계이자 그녀가 언젠가 따라가려는 곳을 암시한다.
미술사가들은 이 작품을 세이지의 후기를 대표하는 결정적 자화상이자, 초현실주의가 추상적 유희를 넘어 실존적 비극을 담아낼 수 있음을 증명한 수작으로 평가한다.
말 없는 뒷모습이 쏟아내는 무한한 감정
이 그림 앞에 서면 관람자는 묘한 이중의 감정에 사로잡힌다. 여성의 뒷모습은 보는 이를 철저히 배제하면서도, 동시에 그 자리에 함께 앉아 같은 세상을 바라보게 만드는 흡인력이 있다. 얼굴이 없기에 오히려 누구든 그 자리에 자신을 투영할 수 있다.
차갑고 정적인 색조, 완벽하게 고요한 지평선, 금발과 피부의 따뜻한 온기가 차가운 공간 속에서 홀로 발산하는 생명의 열기 — 이 모든 요소가 '마지막 온기'와 '임박한 소멸' 사이의 긴장을 만들어낸다. 바람소리도, 파도소리도 들리지 않는 완전한 침묵의 그림. 그러나 그 침묵은 공허하지 않고 슬픔으로 꽉 차 있다. 세이지가 이 그림을 그리고 7년 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이 뒷모습이 품은 의미가 더욱 묵직하게 가슴을 누른다.
재평가 열풍 속 치솟는 경매 가격
케이 세이지는 생전에 남편 탕기의 명성에 가려 충분한 평가를 받지 못했으나, 21세기 들어 여성 초현실주의자들에 대한 미술사적 재조명이 활발해지면서 그녀의 시장 가치 역시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크리스티와 소더비 등 주요 경매사에서 세이지의 작품은 과거 수만 달러 수준에서 거래되었으나, 최근에는 주요작의 경우 수십만 달러에서 수백만 달러 이상의 낙찰가를 기록하고 있다. 특히 그녀의 대표적 초현실주의 풍경 연작과 인물 작품들이 높은 관심을 받는다.
‘르 파사주’는 탕기 사후의 심리적 절정기에 제작된 후기 대표작으로, 세이지 연구에서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이다. 이 같은 작품이 경매에 출품될 경우, 작품의 미술사적 중요도와 개인 소장 이력, 전시 이력 등을 감안할 때 상당히 높은 낙찰가가 형성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전망한다.
뒤늦게 조명받기 시작한 케이 세이지의 예술 세계는 이제 초현실주의 미술 시장에서 더 이상 조연이 아니다. 바다를 향한 그 고독한 뒷모습은, 오늘도 미술관과 경매장에서 조용하지만 강렬한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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