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라이프저니|고요비 기자] 영국 Hyperion 레이블이 '고전 피아노 협주곡(The Classical Piano Concerto)' 시리즈의 일환으로 요한 밥티스트 크라머(Johann Baptist Cramer, 1771-1858)의 피아노 협주곡 4번과 5번을 담은 음반을 발매했다.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하워드 셸리(Howard Shelley)가 런던 모차르트 플레이어스(London Mozart Players)와 함께 연주한 이 음반은, 베토벤 시대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지만 현재는 거의 잊혀진 크라머의 협주곡 예술을 재발견하는 귀중한 기회를 제공한다.
베토벤과 동시대, 또 다른 피아노 거장의 재발견
이 음반의 가장 큰 의의는 19세기 초 피아노 음악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지만 현재는 교육용 에튀드로만 기억되는 크라머의 협주곡 레퍼토리를 재조명한다는 점이다. 크라머는 베토벤과 동시대를 살았으며(베토벤 1770-1827, 크라머 1771-1858), 생전에는 베토벤만큼이나, 어쩌면 더 높은 명성을 누린 피아니스트였다.
피아노 협주곡 4번 C장조 Op.38(약 29분)과 5번 C단조 Op.48(약 31분)은 크라머가 1810년대에 작곡한 작품들로, 모차르트와 베토벤 사이의 과도기적 양식을 보여주는 동시에, 크라머 특유의 우아하고 화려한 피아노 기교가 돋보이는 걸작들이다.
두 협주곡은 같은 조성(C장조/C단조)을 사용하면서도 대조적인 성격을 지닌다. 4번은 밝고 우아하며 고전적 균형미가 돋보이는 반면, 5번은 보다 극적이고 낭만적인 정서를 담고 있다. 이러한 대비는 크라머가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두 양식을 모두 능숙하게 다룰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워드 셸리, 고전 협주곡 해석의 권위자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하워드 셸리는 이 음반에서 피아노 독주와 지휘를 동시에 맡는 일인이역을 수행한다. 이는 모차르트 시대부터 19세기 초까지 일반적이었던 관행으로, 작곡가-피아니스트가 건반 앞에 앉아 직접 오케스트라를 이끌던 전통을 재현한 것이다.
셸리는 Hyperion의 '낭만 피아노 협주곡(Romantic Piano Concerto)' 시리즈에서 훔멜, 모셰레스, 리스 등 잊혀진 고전-낭만 시대 작곡가들의 협주곡을 녹음해 온 이 분야의 권위자다. 그는 이번 크라머 음반에서도 작품의 고전적 우아함과 낭만적 서정성을 절묘하게 균형 잡아 표현한다.
4번 협주곡에서 셸리는 모차르트적인 투명함과 베토벤적인 힘을 동시에 구현한다. 1악장의 화려한 카덴차에서는 크라머가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였음을 증명하는 고도의 기교를 구사하면서도, 과시적이지 않은 우아함을 유지한다. 2악장 안단테에서는 벨칸토 오페라를 연상시키는 서정적 선율을 노래하듯 연주하며,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대화를 섬세하게 조율한다.
5번 협주곡에서 셸리는 보다 극적이고 낭만적인 접근을 선보인다. C단조라는 조성은 모차르트의 24번 협주곡, 베토벤의 3번 협주곡과 같은 조성으로, 비극적이고 격정적인 정서를 표현하는 데 적합하다. 셸리는 1악장에서 어두운 정열과 극적 긴장감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며, 3악장 론도에서는 어둠을 뚫고 나오는 희망의 빛을 그려낸다.
셸리의 테크닉은 완벽하게 통제되어 있으면서도 자연스럽다. 빠른 패시지에서도 각 음이 명료하게 들리며, 느린 악장에서는 깊은 음색의 변화를 통해 감정의 미묘한 뉘앙스를 전달한다. 지휘자로서도 그는 오케스트라와 피아노의 균형을 완벽하게 유지하며, 고전 시대 협주곡의 우아한 대화 양식을 재현한다.
런던 모차르트 플레이어스의 고전적 앙상블
런던 모차르트 플레이어스는 고전 시대 음악 연주에 특화된 실내 오케스트라로, 이 음반에서 크라머 시대의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충실히 재현한다. 약 40명 규모의 이 앙상블은 19세기 초 빈이나 런던의 오케스트라 편성을 반영하며, 과도하지 않은 규모로 피아노와의 균형을 이룬다.
오케스트라는 서주와 tutti 부분에서 명료하고 힘찬 연주를 들려주며, 피아노 독주 부분에서는 절제된 반주로 솔리스트를 돋보이게 한다. 현악 섹션의 투명한 음색과 목관 악기들의 색채감 있는 솔로는 고전 시대 오케스트라의 특징을 잘 구현한다.
특히 5번 협주곡 2악장에서 오보에와 클라리넷이 피아노와 주고받는 서정적 대화는 이 음반의 백미 중 하나다. 셸리의 지휘 하에 오케스트라와 피아노는 진정한 의미의 '협주(concerto)'를 실현하며, 경쟁이 아닌 조화로운 대화를 만들어낸다.
크라머, 베토벤이 인정한 피아니스트
요한 밥티스트 크라머(1771-1858)는 독일계 영국인 음악가로, 87세까지 장수하며 고전 시대에서 낭만 시대 전성기까지를 관통한 인물이다. 그는 독일 만하임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런던으로 이주해 평생 영국에서 활동했다.
크라머는 19세기 초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이었다. 베토벤은 크라머의 연주를 듣고 "그의 터치는 내가 들어본 것 중 가장 아름답다"고 극찬했다. 베토벤이 자신의 피아노 소나타를 헌정하고 싶어 했을 정도로 크라머의 예술성을 높이 평가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크라머는 특히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의 해석으로 유명했으며, 그의 연주 스타일은 화려한 기교보다는 노래하는 듯한 레가토와 우아한 표현을 중시했다. 이러한 특징은 그의 협주곡 작곡에도 반영되어, 과시적 기교주의보다는 선율미와 고전적 균형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작곡가로서 크라머는 총 9개의 피아노 협주곡을 비롯해 100개가 넘는 피아노 소나타, 실내악, 연습곡 등을 작곡했다. 하지만 그를 오늘날까지 기억하게 하는 것은 '84 Studies for Piano'로 알려진 에튀드 모음집이다. 이 연습곡들은 쇼팽과 리스트보다 앞서 작곡되었으며, 19세기 내내 모든 피아니스트의 필수 교재로 사용되었다.
크라머는 또한 음악 출판업자로도 성공해 'Cramer & Co.'라는 출판사를 설립했으며, 베토벤, 훔멜 등 동시대 작곡가들의 작품을 출판했다. 그는 영국 왕립음악원(Royal Academy of Music) 설립에도 참여하는 등 19세기 초 영국 음악계의 중심 인물이었다.
음악사적으로 크라머는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고전주의에서 쇼팽과 멘델스존의 낭만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교량 역할을 했다. 그의 음악은 모차르트의 우아함, 클레멘티의 견고한 구조, 그리고 초기 낭만주의의 서정성을 결합한 독특한 양식을 보여준다.
1810년대 런던, 피아노 협주곡의 황금기
크라머의 피아노 협주곡 4번 Op.38과 5번 Op.48은 1810년대 런던에서 작곡되었다. 이 시기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 영국이 유럽의 문화 중심지로 부상하던 때였으며, 런던의 필하모닉 소사이어티와 각종 콘서트 시리즈가 활발히 운영되었다.
당시 런던은 피아노 제작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브로드우드(Broadwood)를 비롯한 영국 피아노 제작자들은 보다 큰 음량과 풍부한 음색을 지닌 악기를 개발하고 있었으며, 이는 작곡가들에게 새로운 표현 가능성을 제공했다. 크라머의 협주곡들은 이러한 악기 발전을 반영하며, 이전 시대보다 더 넓은 음역과 다채로운 음색을 활용한다.
4번 협주곡은 크라머의 성숙기 작품으로, 모차르트 전통의 3악장 형식을 따르면서도 보다 확장된 규모와 화려한 피아노 파트를 특징으로 한다. C장조라는 밝은 조성은 축제적이고 화려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특히 1악장의 긴 카덴차는 작곡가이자 비르투오소였던 크라머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5번 협주곡 C단조는 보다 극적이고 낭만적인 작품이다. C단조는 베토벤이 '운명 교향곡'과 '비창 소나타'에서 사용한 조성으로, 투쟁과 극복이라는 낭만주의적 내러티브와 연결되어 있다. 크라머는 이 협주곡에서 어두운 정열, 서정적 명상, 그리고 승리의 환희를 그려내며, 고전적 형식 안에서 낭만적 감정을 표현한다.
당시 이 협주곡들은 크라머 자신이 피아노를 연주하며 초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런던의 주요 콘서트홀에서 연주된 이 작품들은 청중과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으며, 크라머의 명성을 더욱 높였다.
우아함과 기교의 균형, 고전과 낭만의 가교
크라머의 피아노 협주곡이 표현하고자 한 것은 기교적 화려함과 음악적 내용의 완벽한 균형이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였지만, 단순한 기교 과시를 넘어서 진정한 음악적 표현을 추구했다.
4번 협주곡은 기쁨, 우아함, 그리고 생명력을 표현한다. 1악장의 주제는 밝고 경쾌하며,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대화는 친근하고 유쾌하다. 2악장의 서정적 선율은 이탈리아 오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인간의 목소리를 모방하는 '벨칸토' 스타일의 피아노 연주를 보여준다. 3악장 론도는 춤곡 리듬을 바탕으로 한 화려한 피날레로, 청중을 즐겁게 하는 동시에 연주자의 기교를 과시한다.
5번 협주곡은 보다 깊은 감정적 내용을 담고 있다. 1악장은 어둡고 격정적인 분위기로 시작하며, 주제와 부주제 사이의 대비가 극적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2악장은 평화롭고 명상적인 분위기로, 고난 속에서 찾은 내면의 평온을 표현한다. 3악장은 어둠을 뚫고 나오는 해방과 승리를 그리며, C단조에서 C장조로의 전환은 베토벤 5번 교향곡을 연상시킨다.
크라머의 피아노 쓰기는 매우 효과적이다. 그는 피아노의 전 음역을 활용하며, 화려한 스케일과 아르페지오, 옥타브 패시지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동시에 그는 레가토 주법과 페달링을 통해 노래하는 듯한 음색을 만들어내며, 이는 쇼팽의 서정적 피아노 스타일을 예고한다.
오케스트레이션도 섬세하다. 크라머는 피아노가 독주할 때 오케스트라를 절제하여 균형을 유지하며, tutti 부분에서는 풍부한 관현악 색채를 활용한다. 목관 악기들은 피아노와 대화하는 독립적 역할을 맡으며, 이는 모차르트 협주곡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재현한 크라머의 세계
이 음반은 2018년 7월 런던 어퍼 노우드의 성 요한 복음사 교회(St John the Evangelist)에서 녹음되었다. 벤 코넬런(Ben Connellan)의 녹음 엔지니어링과 아나벨 코넬런(Annabel Connellan)의 프로듀싱 하에 제작된 이 음반은 Hyperion의 높은 음질 기준을 유지한다.
하워드 셸리는 스타인웨이 앤 선즈(Steinway & Sons) 피아노를 사용했다. 크라머 시대의 피아노와는 다른 현대 악기이지만, 셸리는 과도한 낭만적 해석을 피하고 고전적 명료함을 유지함으로써 작품의 시대성을 존중한다.
잊혀진 레퍼토리의 재발견
Hyperion의 이 음반은 크라머라는 작곡가와 그의 피아노 협주곡을 재평가하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한다. 베토벤의 그늘에 가려 잊혀졌지만, 크라머의 협주곡은 고전에서 낭만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음악사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작품들이다.
특히 피아노 교육자들에게 크라머는 에튀드 작곡가로만 알려져 있지만, 이 음반은 그가 뛰어난 협주곡 작곡가이기도 했음을 증명한다. 그의 협주곡은 기교적으로 도전적이면서도 음악적으로 깊이 있어, 연주자와 청중 모두에게 보람 있는 경험을 제공한다.
하워드 셸리와 런던 모차르트 플레이어스의 이 녹음은 학문적 가치를 넘어서 순수한 음악적 즐거움을 선사한다. 크라머의 협주곡은 모차르트의 우아함, 베토벤의 힘, 그리고 초기 낭만주의의 서정성이 결합된 매력적인 작품들이며, 이 음반을 통해 청중들은 19세기 초 피아노 음악의 잊혀진 보석을 재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음반 표지에 인쇄된 크라머 협주곡의 원곡 악보 단편은 이 음반이 지닌 역사적 가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200년 넘게 잊혀져 있던 악보 속 음표들이 하워드 셸리의 손끝을 통해 다시 살아나, 21세기 청중에게 19세기 초 피아노 예술의 황금기를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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