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라이프저니|고요비 기자] 벨기에의 고음악 전문 레이블 리체르카르(Ricercar)가 야심차게 선보인 'Music at the Time of Louis XIV(루이 14세 시대의 음악)' 8CD 박스 세트는 프랑스 바로크 음악사에서 가장 화려했던 시기를 조명하는 기념비적 음반이다. 총 10시간 23분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루이 14세의 치세 72년 동안 꽃피운 프랑스 음악의 정수를 담아냈다.
르네상스에서 계몽시대로, 프랑스 음악의 독자적 정체성 확립
그랑 시에클(Grand Siècle, 위대한 세기)의 프랑스 음악은 르네상스 시대의 다성음악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당시 유럽 전역을 빠르게 장악하던 이탈리아 양식에 대한 중요한 대안으로 프랑스 음악이 자리매김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궁정 음악은 수도 파리는 물론 지방 도시들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왕립 예배당(La Chapelle), 왕실 실내악단(La Chambre du Roi), 24명의 바이올린 연주단(Les XXIV Violons) 또는 왕립 아카데미(l'Académie royale) 같은 궁정 기관들을 통해 루이 14세의 세기를 계몽시대까지 연장시킨 모델들을 창조해냈다.
이 음반은 모음곡(suite), 음악비극(tragédie en musique), 그랑 모테(grand motet, 대규모 모테트), 솔로 모테트(solo motets) 등 프랑스 음악의 강력한 정체성을 형성한 장르들을 망라한다.
세계적 고음악 앙상블들의 화려한 향연, 최고의 해석자들이 빚어낸 시대의 재현
이 박스 세트의 가장 큰 강점은 프랑스 바로크 음악 해석에 있어 최고 권위를 인정받는 연주자들과 앙상블들이 총출동했다는 점이다. 케빈 말론(Kevin Mallon)이 이끄는 아라디아 바로크 앙상블(Aradia Baroque Ensemble), 세바스티앙 도세(Sébastien Daucé)의 앙상블 코레스퐁당스(Ensemble Correspondances), 장 튀베리(Jean Tubéry)의 라 페니스(La Fenice), 위고 레인(Hugo Reyne)의 라 상포니 뤼 마레(La Symphonie du Marais) 등 당대 최고의 연주단체들이 참여했다.
특히 마르셀 페레(Marcel Pérès)가 이끄는 앙상블 오르가눔(Ensemble Organum)과 파블로 발레티(Pablo Valetti)의 카페 침머만(Café Zimmermann), 프랑수아 페루(François Fernandez)의 리체르카르 콘소트(Ricercar Consort) 등은 역사적 연주 기법과 시대 악기를 통해 17세기 프랑스 궁정의 음향을 생생하게 되살려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성악 부문에서는 플로랑스 말구아르(Florence Malgoire)가 이끄는 레 도미노(Les Dominos), 윌리엄 크리스티(William Christie)의 레 자르 플로리상(Les Arts Florissants), 마르크 민코프스키(Marc Minkowski)의 레 뮈지시앵 뒤 루브르(Les Musiciens du Louvre) 등 프랑스 바로크 음악 부흥을 이끈 핵심 단체들이 대거 참여해 음반의 권위를 높였다.
륄리부터 쿠프랭까지, 프랑스 바로크의 거장들, 궁정 작곡가들이 창조한 프랑스 음악의 정전
이 음반에는 장 밥티스트 륄리(Jean-Baptiste Lully), 마랭 마레(Marin Marais), 프랑수아 쿠프랭(François Couperin), 장 필리프 라모(Jean-Philippe Rameau) 등 프랑스 바로크 음악을 대표하는 거장들의 작품이 총망라되어 있다.
이탈리아 출신이지만 루이 14세의 총애를 받으며 프랑스 음악 양식을 확립한 륄리는 음악비극(tragédie en musique)이라는 독특한 장르를 창조했다. 그의 작품들은 프랑스어의 운율과 억양을 음악에 완벽하게 결합시켜, 이탈리아 오페라와는 구별되는 프랑스만의 오페라 전통을 세웠다.
비올 다 감바의 거장 마랭 마레는 루이 14세 궁정에서 활약하며 500곡이 넘는 비올 작품을 남겼다. 그의 음악은 섬세한 장식음과 풍부한 화성으로 프랑스 기악 음악의 우아함을 극대화했다. 특히 그의 모음곡들은 "인간의 목소리를 가장 닮은 악기"로 불린 비올 다 감바의 표현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위대한 쿠프랭"으로 불린 프랑수아 쿠프랭은 하프시코드 음악의 정점을 이뤘다. 그의 작품들은 프랑스적 우아함(galanterie)과 이탈리아적 열정을 절묘하게 결합시켰으며, 바흐가 그를 연구했을 정도로 유럽 음악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궁정 기관이 낳은 다양한 작곡가들
음반에는 앙드레 캉프라(André Campra), 미셸 리샤르 들라랑드(Michel Richard Delalande), 앙투안 포르크레(Antoine Forqueray), 장 페리 르벨(Jean-Féry Rebel) 등 궁정의 각 기관에서 활약한 작곡가들의 작품도 수록되어 있다.
들라랑드는 루이 14세가 가장 사랑한 작곡가 중 한 명으로, 왕립 예배당을 위한 그랑 모테 장르를 완성했다. 그의 모테트들은 대규모 합창과 오케스트라를 동원해 절대왕정의 위엄과 가톨릭 신앙의 장엄함을 동시에 표현했다.
캉프라는 오페라-발레(opéra-ballet)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으며, 교회 음악과 극장 음악을 모두 아우르는 다재다능함을 보였다. 그의 작품 '우아한 유럽(L'Europe galante)'은 프랑스 오페라에 이국적 요소를 도입한 선구적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절대왕정의 영광을 음악으로 기록하다, 베르사유 궁전의 향연과 왕실 의례
이 음반에 수록된 작품들은 대부분 루이 14세의 베르사유 궁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륄리의 음악비극들은 왕의 권위를 찬양하고 프랑스의 문화적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작곡되었다. 특히 그의 서곡(ouverture)들은 왕의 등장을 알리는 음악적 의례로 기능했으며, 후에 "프랑스 서곡"이라는 양식으로 유럽 전역에 확산되었다.
들라랑드의 그랑 모테들은 왕실 예배당에서 연주되었는데, 루이 14세는 특정 모테트들을 자신의 장례식에 연주하도록 지정할 정도로 이 음악들을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작품들은 단순한 종교 음악을 넘어 절대왕정의 신성함을 표현하는 정치적 상징이기도 했다.
마레의 비올 모음곡 중 일부는 베르사유 궁전의 실내악 연주회를 위해 작곡되었으며, 왕과 귀족들의 취향을 반영한 섬세하고 우아한 양식을 보여준다. 특히 그의 작품 '방광 결석 수술(Tableau de l'opération de la taille)'은 루이 14세가 실제로 받은 수술을 묘사한 독특한 프로그램 음악으로, 음악이 궁정 생활의 모든 순간과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는지 보여주는 흥미로운 예다.
음악을 통한 국가 정체성의 구축
루이 14세는 음악을 국가 권력의 도구로 활용했다. 24명의 바이올린 연주단(Les Vingt-Quatre Violons du Roi)은 1626년 루이 13세가 창설했지만, 루이 14세가 이를 더욱 발전시켜 프랑스 관현악 양식의 기준을 세웠다. 륄리는 여기서 더 나아가 "왕의 작은 바이올린들(Les Petits Violons)"이라는 별도의 앙상블을 조직해 더욱 정교한 연주를 추구했다.
이러한 제도적 기반 위에서 프랑스 음악은 이탈리아의 영향력에 맞서는 독자적 양식을 확립했다. 음반 해설이 지적하듯, 프랑스 음악은 이탈리아 양식에 대한 "중요한 대안"으로 기능했으며, 모음곡, 음악비극, 그랑 모테 같은 장르들은 "프랑스 음악의 강력한 정체성"을 형성했다.
프랑스 바로크 음악이 표현한 것들, 절제된 열정과 우아함의 미학
프랑스 바로크 음악의 가장 큰 특징은 이탈리아 음악의 격렬한 감정 표현과 대비되는 절제와 우아함이다. 쿠프랭은 자신의 저서에서 "프랑스 음악은 이탈리아 음악보다 덜 대담하지만 더 섬세하다"고 썼다. 이는 루이 14세 궁정의 엄격한 예절과 세련된 취향을 반영한 것이었다.
하프시코드 음악에서 나타나는 풍부한 장식음(agrément)들은 단순한 꾸밈이 아니라 프랑스 귀족 사회의 정교한 매너와 언어적 뉘앙스를 음악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쿠프랭의 작품 제목들 - '신비로운 여인', '수수께끼 같은 여인', '관능적인 여인' 등 - 은 살롱 문화의 은밀한 대화와 암시를 음악으로 번역한 것으로 해석된다.
무용과 연극, 음악의 융합
륄리의 음악비극은 오페라, 발레, 연극이 결합된 종합예술이었다. 루이 14세 자신이 젊은 시절 뛰어난 무용수였고, 실제로 륄리의 발레 작품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한 음악비극은 음악이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 즉 시각적 장관(spectacle)의 일부였음을 보여준다.
라모의 오페라들은 륄리 이후 한 세대 뒤에 나왔지만, 더욱 대담한 화성과 관현악 색채를 통해 프랑스 음악비극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그의 작품들은 계몽시대의 이성적 사고와 감성적 표현을 결합시켜, 18세기 프랑스 문화의 복잡성을 음악으로 구현했다.
종교적 엄숙함과 세속적 화려함의 공존
그랑 모테는 프랑스 바로크 음악에서 가장 독특한 장르 중 하나다. 가톨릭 전례 음악이면서도 오페라적 화려함을 갖춘 이 장르는 루이 14세 시대의 모순적 특성을 잘 보여준다. 경건한 가톨릭 신자였던 루이 14세는 동시에 절대적 권력을 가진 군주였고, 그랑 모테는 신에 대한 찬양과 왕에 대한 찬양을 하나로 융합시켰다.
들라랑드, 샤르팡티에(Marc-Antoine Charpentier), 캉프라 등의 모테트들은 대규모 합창과 오케스트라, 독창자들이 어우러져 베르사유 예배당을 음향적 극장으로 변모시켰다. 이는 종교 음악이지만 동시에 왕권의 신성함을 선포하는 정치적 행위이기도 했다.
음악사적 유산과 현대적 의의, 바흐와 헨델에게 영향을 준 프랑스 양식
루이 14세 시대의 프랑스 음악은 유럽 전역에 영향을 미쳤다. 바흐는 쿠프랭의 음악을 깊이 연구했으며, 자신의 '프랑스 모음곡'과 '프랑스 서곡' 같은 작품들을 통해 프랑스 양식을 독일 음악에 접목시켰다. 헨델은 런던에서 프랑스식 오페라를 선보이기도 했다.
프랑스 서곡 양식은 바흐의 관현악 모음곡뿐 아니라 헨델의 오라토리오, 심지어 모차르트의 오페라 서곡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느린-빠른-느린의 3부 구조와 점묘적 리듬은 18세기 내내 유럽 음악의 표준이 되었다.
고음악 연주의 금자탑
리체르카르 레이블은 역사적 연주(historically informed performance) 분야에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레이블이다. 이 박스 세트는 1990년대부터 2016년까지 녹음된 음원들을 집대성한 것으로, 고음악 연주 운동의 성과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시대 악기 사용, 역사적 조율, 당대의 연주 관습 재현 등을 통해 현대 청중들은 300년 전 베르사유 궁전에서 울려 퍼졌을 소리를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다. 바로크 바이올린의 따뜻하고 섬세한 음색, 비올 다 감바의 은은한 울림, 바로크 오보에의 낭랑한 소리, 하프시코드의 영롱한 타건음 등은 현대 악기로는 재현할 수 없는 독특한 음향 세계를 펼쳐 보인다.
10시간이 담아낸 한 시대의 음악적 초상
이 8CD 박스 세트는 단순한 음반 컬렉션을 넘어 루이 14세 시대 프랑스의 음악적, 문화적, 정치적 지형을 총체적으로 조망하는 음향 백과사전이다. 궁정의 화려한 향연부터 왕립 예배당의 엄숙한 의식까지, 살롱의 우아한 대화부터 극장의 감동적인 드라마까지, 이 음반은 절대왕정 시대 프랑스 문화의 모든 면모를 음악으로 기록하고 있다.
작곡가들의 뛰어난 창의성, 연주자들의 탁월한 해석, 그리고 리체르카르 레이블의 학문적 엄밀함이 결합되어 탄생한 이 기념비적 음반은 프랑스 바로크 음악에 관심 있는 모든 이들에게 필수적인 참고 자료가 될 것이다. 동시에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에게는 유럽 음악사에서 가장 화려했던 시대 중 하나를 깊이 있게 탐험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제공한다.
루이 14세가 "짐이 곧 국가다(L'État, c'est moi)"라고 선언했듯이, 이 음반은 "음악이 곧 시대다"라는 진리를 웅변한다. 72년간의 통치 기간 동안 프랑스 음악이 이룩한 찬란한 성취는 이 8장의 CD 속에 영원히 보존되어, 21세기 청중들에게도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예술적 유산으로 전해지고 있다.
klifejourney2025@gmail.com
[저작권자ⓒ K라이프저니.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이 소리] 250년 만에 되살아난 최초의 독일어 오페라](https://klifejourney.com/news/data/2026/02/16/p1065613667946124_931_h2.jpg)
![[이 소리] 리체르카르 레이블의 루이 14세 시대의 찬란한 음악 유산, 8CD로 만나다](https://klifejourney.com/news/data/2026/02/16/p1065589241502506_914_h2.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