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라이프저니|고요비 기자] 벨기에의 고음악 전문 레이블 리체르카르(Ricercar)가 독일 바로크 음악사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대작을 내놓았다. '쉬츠에서 바흐까지의 독일 음악(Music in Germany from Schütz to Bach)'이라는 제목의 이 8CD 박스세트는 총 10시간 16분 30초의 방대한 분량으로 17세기 독일 음악의 전개 과정을 집대성했다. 하인리히 쉬츠(1585-1672)에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1685-1750)로 이어지는 약 100여 년간의 음악적 진화를 한 세트에 담은 이 음반은 단순한 컴필레이션을 넘어 음악사의 중요한 자료집으로 평가받고 있다.
17세기 독일, 음악사의 전환점을 기록하다
이 음반의 가치는 무엇보다 17세기 독일 음악이 지닌 역사적 중요성에 있다. 음악학자 제롬 르젠(Jérôme Lejeune)이 기획한 이 프로젝트는 '독일 초기 음악의 역사(History of Early Music to Germany)'라는 시리즈의 새로운 볼륨으로, 이탈리아와 프랑스 음악의 발전을 탐구한 이전 작업들의 연장선에 있다.
17세기는 루터교 음악 전통이 더욱 발전한 시기였으며, 독일은 특별히 열정적인 시기를 경험했다. 독일 음악이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동시에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양식을 재능과 상상력으로 흡수했고, 이 모든 것이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로 이어지는 길을 준비했다는 것이 음반 해설의 핵심 메시지다.
음반에는 하인리히 쉬츠, 요한 파헬벨, 디트리히 북스테후데, 게오르크 뵘, 요한 크리거, 요한 미하엘 바흐 등 50여 명의 작곡가들이 포함되어 있다. J.S. 바흐 이전 세대의 독일 작곡가들을 망라한 이 컬렉션은 바흐라는 거인이 어떤 토양에서 자라났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유럽 최고 고음악 앙상블들의 총집결
이 음반의 또 다른 강점은 참여 연주자들의 면면이다. 유럽 고음악계를 대표하는 50여 명의 솔로이스트와 20여 개의 앙상블이 참여했다. 카펠라 리체르카르(Capella Ricercar), 콩세르 보칼(Concert Vocal), 라 샤펠 레날(La Chapelle Rhénane), 스콜라 칸토룸 바실리엔시스(Schola Cantorum Basiliensis) 등 유럽 각지의 정상급 바로크 앙상블들이 총출동했다.
지휘자로는 필립 피에를로(Philippe Pierlot), 필립 헤레베헤(Philippe Herreweghe), 르네 야콥스(René Jacobs), 에릭 판 네벨(Erik Van Nevel) 등 고음악계의 거장들이 참여했다. 특히 감비스트이자 지휘자인 필립 피에를로가 이끄는 리체르카르 콘소트(Ricercar Consort)의 해석은 정교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솔로이스트 중에는 소프라노 도로테아 미엘스(Dorothee Mields), 카운터테너 카를로스 메나(Carlos Mena), 테너 얀 판 엘자커(Jan Van Elsacker), 베이스 스테판 판 다이크(Stephan Van Dijck) 등이 참여해 17세기 독일 성악 작품의 깊이를 드러냈다.
기악 부문에서는 바이올리니스트 아마두에 발디(Amandine Beyer), 오르가니스트 베르나르 포크룰(Bernard Foccroulle), 류트 연주자 콘라트 융헤넬(Konrad Junghänel) 등이 각 악기의 전문성을 발휘했다.
쉬츠에서 북스테후데까지 - 작곡가들의 계보
음반에 수록된 작곡가들은 크게 세 세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세대는 하인리히 쉬츠(1585-1672)로 대표된다. 이탈리아에서 조반니 가브리엘리에게 배운 쉬츠는 베네치아 복합창 양식을 독일 루터교 전통과 결합시켰다. 그의 음악은 30년전쟁(1618-1648)의 비극을 관통하면서도 신앙의 깊이를 잃지 않았다.
두 번째 세대는 1600-1620년대 출생한 작곡가들이다. 요한 야콥 프로베르거(Johann Jacob Froberger, 1616-1667)는 건반음악의 대가로 프랑스 양식을 독일에 전했고, 안드레아스 함머슈미트(Andreas Hammerschmidt, 1611-1675)는 소규모 교회를 위한 모테트와 칸타타를 발전시켰다.
세 번째 세대는 1640-1660년대 출생 작곡가들로, J.S. 바흐의 직접적인 선배들이다. 디트리히 북스테후데(1637-1707)는 뤼베크의 성 마리아 교회에서 활동하며 오르간과 성악 작품으로 명성을 떨쳤다. 젊은 바흐가 400km를 걸어가 그의 연주를 들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요한 파헬벨(1653-1706)은 뉘른베르크에서 활동하며 코랄 변주곡과 푸가를 발전시켰고, 게오르크 뵘(1661-1733)은 뤼네부르크에서 바흐의 스승으로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작품들의 탄생 배경과 숨겨진 이야기
음반에 수록된 작품들은 대부분 루터교 전례와 깊은 관련이 있다. 17세기 독일에서 음악은 단순한 예술이 아니라 신학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였다. 루터는 "음악은 신학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라고 말했고, 이 전통은 17세기 내내 이어졌다.
쉬츠의 모테트와 성가는 독일어 성서 텍스트를 음악으로 옮긴 것이다. 30년전쟁 동안 그는 드레스덴 궁정악단이 해체되는 비극을 겪었지만, 오히려 소편성 작품을 통해 전쟁의 고통과 신앙의 위로를 표현했다. 그의 '무지카 사크라(Musicalische Exequien)'는 죽은 자를 위한 장례 음악으로,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수많은 이들을 애도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북스테후데의 '아벤트무지크(Abendmusik, 저녁 음악회)'는 뤼베크의 독특한 전통이었다. 매년 대림절 기간 다섯 번의 일요일 오후에 열린 이 음악회는 오르간 독주, 성악곡, 기악 앙상블을 결합한 대규모 행사였다. 부유한 상인들의 후원으로 열린 이 음악회는 종교음악이 시민사회와 만나는 지점이었고, 바흐가 그토록 감명받은 것도 바로 이 전통이었다.
파헬벨의 '카논과 지그(Canon and Gigue)'는 오늘날 가장 유명한 바로크 작품 중 하나지만, 정작 17세기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3대의 바이올린과 통주저음을 위한 이 작품은 단순한 구조 속에 무한히 반복되는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수록곡들이 표현하고자 했던 것
17세기 독일 음악의 핵심은 '텍스트 표현(Textausdruck)'이었다. 음악은 가사의 의미를 명확히 전달하고, 감정을 증폭시켜야 했다. 이는 이탈리아의 '아페토(affetto, 정서)' 이론과 만나 독일만의 독특한 양식을 만들어냈다.
예를 들어 쉬츠의 모테트에서 "고통(Schmerz)"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불협화음과 하강하는 선율로 표현되고, "기쁨(Freude)"이라는 단어는 밝은 화성과 상승하는 멜로디로 그려진다. 이러한 '음형 상징(tone painting)'은 북스테후데와 바흐에게 계승되어 더욱 정교해졌다.
또한 이 시기 음악은 '숫자 상징(numerology)'을 적극 활용했다.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3, 완전함을 의미하는 7, 십자가를 나타내는 4 등이 작품 구조에 숨어 있다. 북스테후데의 오르간 작품에서 주제가 3번 반복되는 것은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신학적 메시지였다.
17세기 독일 음악가들은 또한 '대위법의 예술'을 추구했다. 여러 성부가 독립적으로 움직이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대위법은 신의 질서를 음악으로 재현하는 방법이었다. 프로베르거의 리체르카르, 파헬벨의 푸가, 북스테후데의 토카타는 모두 이러한 대위법적 사고의 정점을 보여준다.
바흐로 가는 길목에서
이 음반의 진정한 의미는 바흐를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바흐는 진공 상태에서 탄생한 천재가 아니었다. 그는 100년에 걸친 독일 음악 전통의 정점이었고, 수많은 선배 작곡가들의 성취를 종합한 인물이었다.
바흐는 북스테후데에게서 오르간 기법을, 파헬벨에게서 코랄 변주 기법을, 프로베르거에게서 프랑스 양식을, 쉬츠에게서 모테트 전통을 배웠다. 그의 '푸가의 기법', '골드베르크 변주곡', '마태 수난곡'은 모두 이 선배들의 업적 위에 세워진 대성당이었다.
리체르카르 레이블이 8장의 CD에 담아낸 것은 단순한 음악 모음집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음악적 계보도다. 쉬츠에서 시작해 바흐로 향하는 이 여정은 독일 바로크 음악이 어떻게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영향을 흡수하면서도 고유한 정체성을 만들어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고음악 애호가들의 필수 소장품
10시간이 넘는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이 음반은 지루하지 않다. 각 작곡가의 개성이 뚜렷하고, 연주자들의 해석이 생동감 있기 때문이다. 리체르카르 레이블의 녹음 철학은 "역사적 고증과 예술적 자유의 균형"이며, 이 음반은 그 철학의 완벽한 구현이다.
특히 리투아니아의 BOD 스튜디오에서 제작된 녹음은 바로크 악기들의 미묘한 음색을 섬세하게 포착했다. 챔버 오르간의 부드러운 울림, 비올라 다 감바의 따뜻한 음색, 코르넷과 트롬본의 밝은 앙상블이 생생하게 재현된다.
음반 뒷면에 나열된 50여 명의 작곡가 이름은 그 자체로 17세기 독일 음악사의 인명록이다. 요한 루돌프 알레(Johann Rudolph Ahle), 미하엘 알텐부르크(Michael Altenburg), 필립 프리드리히 부흐너(Philipp Friedrich Buchner), 디트리히 북스테후데(Dietrich Buxtehude), 마티아스 베크만(Matthias Weckmann), 프리드리히 빌헬름 차호(Friedrich Wilhelm Zachow) 등 바로크 음악 애호가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이름들이 망라되어 있다.
음악사 연구의 새로운 이정표
제롬 르젠의 기획 의도는 명확하다. 이탈리아와 프랑스 음악의 발전을 먼저 탐구한 뒤, 독일이 어떻게 이를 흡수하고 변형했는지를 보여주는 것. 이는 단순한 영향 관계를 넘어 문화적 교류와 창조적 변형의 과정을 드러낸다.
17세기 독일은 30년전쟁의 폐허 위에서도 음악적으로는 황금기를 맞이했다. 이탈리아의 화려한 기교, 프랑스의 우아한 춤곡, 독일의 견고한 대위법이 만나 전례 없는 풍요로움을 만들어냈다. 이 음반은 그 풍요로움의 파노라마다.
총 10시간 16분 30초라는 긴 시간 동안, 듣는 이는 쉬츠의 경건함에서 시작해 북스테후데의 화려함을 거쳐 바흐의 문턱까지 도달하게 된다. 이는 단순히 음악을 듣는 경험이 아니라 한 시대의 정신을 관통하는 여행이다.
벨기에 레이블이 독일 음악의 역사를 이토록 치밀하게 정리했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심장하다. 음악에는 국경이 없으며, 진정한 예술은 시대와 국가를 초월한다는 것을 이 음반은 증명한다. 바로크 음악 애호가라면, 특히 바흐를 사랑하는 이라면 이 박스세트는 필수 소장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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