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라이프저니|고요비 기자] 알폰스 무하(Alfons Mucha, 1860-1939)는 체코가 낳은 20세기 초 가장 영향력 있는 장식미술가다. 파리 벨 에포크 시대를 대표하는 아르누보 운동의 선두주자로, 그의 작품은 곡선미와 자연주의적 장식성으로 당대 시각예술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무하는 1894년 프랑스 배우 사라 베르나르의 연극 포스터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으며, 이후 상업미술과 순수미술의 경계를 허문 독보적 화풍을 확립했다.
미술사에서 무하의 위치는 독특하다. 그는 아르누보의 상징이면서도 단순한 장식미술가에 머물지 않았다. 슬라브 민족의 역사와 정체성을 담은 대작 '슬라브 서사시' 연작을 통해 민족주의 화가로서의 면모를 보였으며, 상업성과 예술성, 장식과 서사를 동시에 추구한 선구자였다.
템페라 기법으로 구현한 성스러운 서정
'백합의 성모'(Madonna of the Lilies, 1905)는 템페라 기법으로 제작된 247×182cm 크기의 대형 작품이다. 템페라는 계란 노른자를 바인더로 사용하는 전통 기법으로, 무하는 이를 통해 투명하고 발광하는 듯한 색채를 구현했다.
화면은 두 여인으로 구성된다. 전경의 여인은 슬라브 전통 의상을 입고 화관을 쓴 채 앉아있다. 붉은 머리카락과 정교한 자수 장식의 흰 드레스는 체코 민속 문화를 상징한다. 후경의 금발 여인은 흰 백합과 함께 서 있으며, 성모 마리아의 이미지를 환기시킨다. 두 인물은 흐르는 듯한 베일로 연결되어 하나의 시적 장면을 이룬다.
배경은 무하 특유의 장식적 자연주의로 가득하다. 흰 백합들이 화면을 둘러싸며 청록색과 회색이 어우러진 대기는 꿈결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아르누보의 특징인 유기적 곡선과 평면적 패턴이 조화를 이루며, 성속(聖俗)이 공존하는 독특한 화면을 완성한다.
민족정신과 보편적 아름다움의 조우
이 작품의 가치는 무하가 추구한 이중적 주제의식에 있다. 표면적으로는 성모 마리아와 백합의 기독교적 도상을 따르지만, 실제로는 체코 민족의 순수성과 정체성을 표현한다. 무하는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이후 점차 슬라브 민족주의로 경도되었고, 이 작품은 그 전환기의 산물이다.
'백합의 성모'는 상업적 포스터 작업에서 벗어나 순수미술로 나아가려는 무하의 의지를 보여준다. 장식미술가라는 꼬리표에서 벗어나 역사화가, 민족화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려 했던 그의 예술적 야심이 담겨 있다. 동시에 여성의 아름다움, 자연, 영성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아르누보의 이상이 절정에 달한 작품이기도 하다.
백합 향기에 실린 슬라브의 꿈
작품 앞에 서면 먼저 압도적인 크기가 관람자를 감싼다. 247cm의 세로 길이는 인물들을 실제 크기 이상으로 느끼게 하며, 성스러운 현현(顯現)을 목격하는 듯한 경외감을 준다. 템페라의 반투명한 층위는 빛을 머금은 듯 은은하게 발광하며, 백합의 순백과 의상의 크림색이 어우러져 따뜻하면서도 초월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두 여인의 대비는 시적인 긴장을 낳는다. 땅에 앉은 여인의 현실감과 서 있는 여인의 환영적 존재감 사이에서, 관람자는 현세와 영원 사이 어딘가에 머문다. 흐르는 베일은 마치 시간의 흐름 같기도 하고, 두 세계를 잇는 다리 같기도 하다. 백합들은 화면을 가득 채우며 향기를 거의 느낄 수 있을 듯한 감각적 현존감을 전한다.
전체적으로 작품은 애수와 고요, 그리움과 한상이 뒤섞인 감정을 자아낸다. 무하가 그리워했던 고향 체코, 그가 꿈꾸었던 슬라브 민족의 이상향이 백합 향기에 실려 전해지는 듯하다.
시장에서 재평가받는 무하의 유산
알폰스 무하는 오랫동안 '포스터 작가'로 과소평가되어 왔으나, 21세기 들어 미술시장에서 급격히 재평가받고 있다. 그의 대표 포스터 작품들은 경매에서 수십만 달러에 거래되며, 원화는 수백만 달러를 호가한다. 2019년 무하 서거 80주년을 계기로 국제적 관심이 더욱 높아졌다.
'백합의 성모' 같은 대형 템페라 작품은 시장에 거의 나오지 않는 희귀작으로, 가격 추정이 어렵지만 전문가들은 최소 500만 달러 이상으로 본다. 무하의 '슬라브 서사시' 연작 중 일부는 체코 국보로 지정되어 매매가 불가능하다.
현대 미술시장에서 무하는 클림트, 실레 등 빈 분리파 작가들과 함께 20세기 초 장식미술의 최고봉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아시아 컬렉터들의 관심이 높아 한국, 일본, 중국에서의 전시 수요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서울 전시, K-아르누보의 가능성을 열다
서울 여의도 더현대서울현대백화점에서 열리고 있는 알폰스 무하 전시회(알폰스 무하: 빛과 꿈, 2025.11.08. ~ 2026.03.04.)는 한국 관객에게 무하의 진면목을 소개하는 의미 있는 기회다. 그동안 국내에서는 무하를 포스터 디자이너 정도로만 인식했으나, 체코 국보급 작품들을 통해 통해 그의 예술세계가 얼마나 깊고 넓은지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무하의 민족주의 예술이 한국의 문화적 맥락과 공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세기 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치하에서 체코 정체성을 지키려 했던 무하의 노력은, 식민지와 분단을 겪은 한국의 역사와 교차한다. 전통과 현대, 민족성과 보편성을 조화시키려 한 그의 시도는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이 직면했던 과제와도 맞닿아 있다.
무하의 아르누보는 현대 한국 디자인과 일러스트레이션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쳐왔다. 게임, 애니메이이션, 패션 분야에서 무하풍 이미지를 자주 볼 수 있는 것은 그의 장식미학이 동시대와 여전히 호흡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이번 전시는 한국 창작자들에게 아르누보의 원류를 직접 경험하고, 한국적 해석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백합의 성모'가 전하는 백년 전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아름다움과 정체성, 전통과 혁신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 서울에서 만나는 무하는 그 향기로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뿌리는 무엇이며, 당신이 꿈꾸는 아름다움은 어떤 모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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