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라이프저니|고요비 기자] 초콜릿과 장미가 넘쳐나는 발렌타인데이, 우리는 사랑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16세기 이탈리아 화가 야코포 바사노(Jacopo Bassano, 1510-1592)가 1563년 완성한 '선(善)한 사마리아인(The Good Samaritan)'은 사랑이 단순한 낭만적 감정을 넘어 타인을 향한 무조건적 연민과 자비로 확장될 때 얼마나 숭고해지는지를 149×188cm의 캔버스에 생생하게 담아냈다. 현재 베니스의 갤러리아 델 아카데미아(Gallerie dell'Accademia)에 소장된 이 작품은 발렌타인데이를 맞아 사랑의 본질을 되새기게 한다.
베네토 지역을 대표한 '시골 화가'의 독창성
야코포 바사노는 본명이 야코포 달 폰테(Jacopo dal Ponte)로, 베네토 지역의 소도시 바사노 델 그라파에서 태어나 평생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화가 프란체스코 달 폰테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베니스에서 수학하며 티치아노와 베네치아파의 화려한 색채를 습득했지만, 대도시에 정착하지 않고 고향에 공방을 차렸다.
16세기 중반 베네토 지역의 주요 예술 중심지로 성장한 바사노의 공방은 그의 네 아들 - 프란체스코 2세, 조반니 바티스타, 레안드로, 지롤라모 - 과 함께 이탈리아 북부 전역에 작품을 공급하며 르네상스 미술의 지역적 확산에 기여했다. 미술사가들은 바사노를 "베네치아파의 화려함과 시골의 소박함을 결합한 독창적 화가"로 평가한다.
성스러움을 일상 속에 녹여낸 혁신적 화법
바사노의 가장 큰 특징은 성서의 이야기를 농촌의 풍경 속에 배치한 점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에서도 이 특징이 두드러진다. 강도를 만나 쓰러진 여행자를 돌보는 사마리아인의 모습은 단순한 종교화가 아니라 16세기 베네토 농촌의 일상적 풍경처럼 연출됐다.
화면 왼쪽 하단에는 소와 개 같은 가축이 배치되어 있고, 배경에는 광활한 풍경과 극적인 하늘이 펼쳐진다. 1550-60년대 바사노의 작품들은 후기 르네상스 매너리즘의 영향을 받아 인물의 신체를 길게 늘리고,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강화하며, 공간 구성을 복잡하게 만드는 특징을 보인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바로 이러한 양식적 전환기의 대표작이다.
발렌타인데이에 다시 보는 '사랑'의 의미
붉은 옷을 입은 사마리아인이 반쯤 벗겨진 여행자를 부축하는 장면은 극적인 명암 대비 속에서 강렬한 감정을 전달한다. 사마리아인의 얼굴에는 깊은 연민이, 부상자의 몸에는 고통이 생생하게 표현됐다. 이 순간의 감정은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자신의 안전과 편안함을 포기하고 낯선 이를 돌보는 희생적 사랑이다.
바사노는 이 장면을 통해 "사랑은 같은 민족, 같은 종교, 같은 계급의 사람에게만 향하는 것이 아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당시 적대 관계였지만, 사마리아인은 유대인 여행자를 외면하지 않았다. 발렌타인데이에 주고받는 초콜릿과 꽃다발도 아름답지만, 진정한 사랑은 어쩌면 이렇게 조건 없이 타인의 고통에 손을 내미는 순간에 더 빛나는 것이 아닐까.
어둠 속에서 빛나는 인간성
화폭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극적인 하늘이다. 푸르고 어두운 구름 사이로 빛이 새어 나오는 풍경은 인간의 삶이 얼마나 불확실하고 위태로운지를 상징한다. 왼쪽 멀리 보이는 마을은 평화롭지만, 화면 중앙의 현실은 폭력과 고통으로 얼룩져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어둠 속에서 붉은 옷의 사마리아인은 한 줄기 빛처럼 빛난다. 그의 손은 부상자를 감싸고, 그의 눈빛은 연민으로 가득하다. 발치의 개들조차 조용히 이 순간을 지켜본다. 바사노는 이 장면을 통해 "인간성의 빛은 가장 어두운 순간에 가장 밝게 빛난다"는 진리를 전한다.
화면을 보고 있으면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을 받는다. 사마리아인의 손길 하나하나에서 따뜻함이 느껴지고, 부상자의 고통이 관객의 가슴에 전해진다. 이것이 바로 바사노 예술의 힘이다. 종교적 메시지를 전달하면서도 깊은 인간적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미술시장에서의 위치와 가치
바사노 가문의 작품들은 국제 미술시장에서 꾸준히 거래된다. 야코포 바사노의 작품은 주로 100만~300만 달러 선에서 거래되며, 보존 상태가 좋고 출처가 명확한 대형 작품의 경우 더 높은 가격에 낙찰된다. 2019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그의 작품 '최후의 만찬' 습작이 약 180만 달러에 낙찰된 바 있다.
하지만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주요 작품들은 대부분 유럽의 주요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어 시장에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 베니스의 갤러리아 델 아카데미아는 이 작품을 베네치아파 회화의 중요한 사례로 영구 소장하고 있다.
미술사학자들은 바사노를 "티치아노와 틴토레토의 그늘에 가려진 숨은 거장"으로 평가한다. 그는 베네치아 본류에서 약간 벗어나 있었지만, 농촌 풍경과 성서 이야기를 결합한 독창적 양식으로 후대 바로크 미술, 특히 카라바조의 자연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선한 사마리아인' - 서양 문화 속 자비의 상징
‘Good Samaritan(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표현은 오늘날 영어권에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와주는 친절한 사람"을 의미하는 관용어로 쓰인다. 이 표현의 유래는 신약성서 누가복음 10장 25-37절의 예수 비유에서 나온다.
한 유대인 여행자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를 만나 쓰러졌다. 같은 유대인 제사장과 레위인이 지나갔지만 모두 외면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경멸하던 사마리아인이 그를 발견하고 상처를 치료해주고 여관으로 데려가 돌봐주었다. 예수는 이 비유를 통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쳤다.
미국에는 "Good Samaritan Law(선한 사마리아인 법)"라는 법률도 존재한다. 응급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돕다가 실수로 피해를 입힌 경우, 선의로 행동했다면 법적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이 법의 이름 자체가 자비와 이타심의 상징으로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의미를 담고 있다.
발렌타인데이, 사랑의 진정한 색깔을 찾아서
붉은 장미와 하트 모양 초콜릿으로 상징되는 발렌타인데이지만, 바사노의 '선한 사마리아인'이 보여주는 사랑의 색깔은 조금 다르다. 그것은 화려한 붉은색이 아니라 땅에 무릎 꿇고 상처 입은 이를 어루만지는 손의 색깔이다. 조건 없이, 대가 없이, 그저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의 색깔이다.
460년 전 이탈리아 시골 화가가 그린 이 그림은 오늘날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사랑은 얼마나 넓은가? 당신과 다른 사람, 당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사람, 당신이 모르는 사람에게도 손을 내밀 수 있는가?"
이 발렌타인데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건네는 것도 아름답지만, 바사노의 그림 앞에 잠시 멈춰 서서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은 어떨까.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가 가장 필요로 하는 발렌타인데이의 선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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