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라이프저니|글·사진 고요비 기자] 알베르토 수기(Alberto Sughi, 1928-2012)는 20세기 이탈리아 회화를 대표하는 네오리얼리즘 화가다. 1928년 에밀리아로마냐 주 체세나에서 태어난 그는 볼로냐 미술아카데미에서 수학하며 조르조 모란디의 영향을 받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황폐해진 이탈리아 사회의 일상을 포착하며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수기는 1950-60년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회화 운동의 핵심 인물로, 레나토 구투소, 움베르토 바초니와 함께 사회적 리얼리즘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러나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강조한 동료 작가들과 달리, 수기는 현대 도시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내면적 고독과 소외에 집중했다. 바, 카페, 기차역, 호텔 로비 같은 공공장소에서 타인과 함께 있으면서도 철저히 고립된 현대인의 모습을 일관되게 그려냈다.
그의 작품은 1960년대부터 베니스 비엔날레, 상파울루 비엔날레 등 주요 국제전에 출품되며 세계적 인정을 받았다. 이탈리아 현대미술사에서 수기는 미래주의와 추상표현주의 사이에서 구상회화의 가치를 지켜낸 작가로 평가받으며, 특히 인간 존재의 실존적 조건을 회화로 탐구한 철학적 화가로 기억된다.
템페라 기법으로 포착한 도시 야경의 멜랑콜리
1991년 제작된 'At the Bar'는 80 x 60cm 크기의 캔버스에 템페라 기법으로 그려진 작품이다. 템페라는 안료를 계란 노른자와 혼합해 사용하는 전통 기법으로, 유화보다 빠르게 건조되며 무광택의 차분한 질감을 만들어낸다. 수기는 이 고전적 기법을 현대적 주제에 적용하며 독특한 회화적 긴장을 창출했다.
작품은 어두운 바 내부를 배경으로 네 개의 둥근 조명이 천장에 매달려 있고, 그 아래로 희미한 스모그가 공간을 채운다. 화면 전경에는 빨간 드레스를 입은 주황색 머리 여성이 바 테이블에 앉아 검은 정장의 남성과 마주하고 있다. 두 사람 사이 테이블 위에는 보라색 병이 놓여 있다. 배경 왼쪽에는 두 남성이 밀착되어 서 있으며, 한 명은 베이지색 코트를, 다른 한 명은 어두운 옷을 입고 있다.
수기 특유의 거친 붓질과 흐릿한 윤곽선은 인물들을 마치 기억 속 잔상처럼 표현한다. 어두운 청회색과 갈색 톤이 지배적이며, 여성의 빨간 드레스만이 유일한 강렬한 색채로 화면 중심을 차지한다. 조명은 따뜻한 노란빛을 발하지만 공간 전체를 밝히지 못하고, 오히려 어둠을 더욱 강조한다. 인물들은 서로 가까이 있지만 시선은 교차하지 않으며, 각자 자신만의 고립된 세계에 갇혀 있는 듯하다.
현대 도시 문명의 실존적 풍경화
'At the Bar'는 단순한 바 풍경을 넘어 현대 도시 문명의 실존적 조건을 응축한 작품이다. 바는 사람들이 모여 소통하는 사교 공간이지만, 수기의 그림 속에서는 역설적으로 가장 고독한 장소가 된다. 타인과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으면서도 정서적으로는 완전히 단절된 현대인의 역설을 시각화한 것이다.
이 작품이 지닌 미술사적 가치는 여러 측면에서 발견된다. 첫째, 에드워드 호퍼의 미국적 고독과 구별되는 유럽적 멜랑콜리를 보여준다. 호퍼가 대도시의 기하학적 공간에서 고립된 개인을 그렸다면, 수기는 인파 속에서 더욱 깊어지는 내면의 공허를 포착했다. 둘째, 전통적 템페라 기법을 현대적 주제에 적용하며 고전과 현대의 대화를 시도했다. 르네상스 화가들이 사용한 기법으로 20세기 말 도시의 밤 풍경을 그리며, 시간의 층위를 중첩시켰다.
셋째, 1990년대 초 냉전 종식 이후 유럽 사회의 정서적 지형을 반영한다.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끝나고 개인화와 소비주의가 가속화되던 시기, 수기는 화려한 소비 공간 이면의 실존적 공허를 예리하게 포착했다. '바'라는 공간은 자본주의 사회의 여가 문화를 상징하면서도, 그 속에서 더욱 심화되는 인간 소외를 드러낸다.
스모그 자욱한 공간에 떠도는 고독의 시
작품 앞에 서면 바 특유의 묵직한 공기가 느껴진다. 천장의 조명은 따뜻한 빛을 내지만 그 빛은 스모그와 어둠에 가로막혀 인물들에게 닿지 못한다. 빨간 드레스의 여성은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를 응시하고, 그녀를 마주한 남성은 그림자처럼 어둠 속에 잠겨 있다.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각자의 침묵 속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배경의 두 남성은 서로에게 기대어 있지만, 그들의 자세에서도 친밀함보다는 피로와 무력감이 느껴진다. 테이블 위 보라색 병은 유일한 선명한 오브제로, 마치 이 공간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실재인 듯하다. 전체적으로 흐릿하고 몽환적인 화면은 술에 취한 시선으로 본 세계 같기도 하고, 희미해진 기억의 단편 같기도 하다.
수기의 붓질은 거칠고 즉흥적이지만, 그 속에서 깊은 슬픔과 연민이 느껴진다. 그는 이 사람들을 판단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존재하는 방식, 고독한 방식으로 함께 있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목격하고 기록한다. 감상을 마치고 나면 어딘가 쓸쓸하면서도 위로받는 기분이 든다. 우리 모두가 때로는 이 바의 손님들처럼 외롭지만, 바로 그 외로움이 우리를 연결하는 보편적 조건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국내외에서 꾸준히 재평가받는 작가
알베르토 수기는 이탈리아 미술계에서 확고한 위상을 지닌 작가지만, 국제 경매시장에서는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편이다. 그의 작품은 주로 이탈리아 국내 경매와 유럽 경매 시장에서 거래되며, 크리스티와 소더비 등 메이저 경매사보다는 피네르테 경매, 판티 경매 등 이탈리아 경매사를 통해 유통된다.
수기의 작품 가격은 제작 시기, 크기, 주제에 따라 편차가 크다. 1950-60년대 네오리얼리즘 전성기에 제작된 대형 작품들은 5만에서 15만 유로 선에서 거래되며, 특히 사회적 주제를 다룬 초기작들이 높은 평가를 받는다. 1990년대 제작된 'At the Bar'와 같은 작품은 크기와 보존 상태에 따라 2만5만 유로 선에서 거래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2012년 수기 사망 이후 이탈리아 주요 미술관들이 회고전을 개최하며 그의 예술적 업적을 재조명하고 있다. 밀라노 현대미술관(GAM), 로마 국립현대미술관(GNAM) 등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고향 체세나에는 수기 재단이 설립되어 작품 보존과 연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미술시장 전문가들은 이탈리아 전후 미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수기의 작품도 점진적인 가치 상승을 보일 것으로 전망한다. 특히 구상회화에 대한 재평가, 사회적 리얼리즘의 역사적 중요성 인식 확대 등이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수기는 렌초 베스피냐니, 주세페 마이네리 등과 함께 20세기 이탈리아 구상회화의 핵심 작가로, 그의 작품은 이탈리아 현대미술사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자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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