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라이프저니|고요비 기자] 붉은 입술과 은빛 큐피드가 새겨진 앨범 커버가 먼저 시선을 잡는다. 그러나 이 음반이 품고 있는 것은 단순한 시각적 아름다움이 아니다. 판 클래식(Pan Classics) 레이블이 2016년 발매한 이 음반은, 서유럽 음악사에서 오랫동안 변방으로 밀려나 있던 스페인 바로크 음악의 진면목을 세상에 다시 꺼내 놓는 중요한 음악적 사건이다. 세바스티안 두론(Sebastián Durón, 1660~1716)이라는 이름이 아직 낯선 독자라 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 낯섦 자체가 이 음반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다.
잊혀진 거장 두론, 스페인 바로크의 마지막 불꽃
세바스티안 두론은 1660년 스페인 브리우에가(Brihuega)에서 태어나 1716년 망명지 프랑스 캉보레뱅(Cambo-les-Bains)에서 생을 마감한 작곡가다. 그는 마드리드 왕립 예배당(Real Capilla)의 오르가니스트이자 궁정 작곡가로서 스페인 최고의 음악적 권위를 누린 인물이었다.
음악사적으로 두론은 17세기 스페인 성악 양식과 이탈리아 바로크 오페라 양식을 융합한 선구자적 위치에 서 있다. 특히 스페인 고유의 음악극 장르인 '사르수엘라(Zarzuela)'를 예술적으로 완성한 작곡가 중 한 명으로, 당시 이탈리아에서 유입되던 오페라 양식을 스페인 토양에 이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헨델이 런던에서, 라모가 파리에서 바로크 음악의 꽃을 피우던 바로 그 시대에, 두론은 마드리드 궁정에서 이에 비견할 만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운명은 정치에 의해 꺾였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쟁(1701~1714) 당시 두론은 합스부르크 왕가를 지지했다가 결국 승리한 부르봉 왕조에 의해 추방당했고, 그의 음악도 함께 역사의 그늘 속으로 밀려났다. 정치적 패배가 한 시대의 음악을 통째로 묻어버린 비극적 사례였다.
소프라노 에바 후아레스 — 고음악의 언어를 꿰뚫는 목소리
이 음반의 중심에는 소프라노 에바 후아레스(Eva Juárez)가 있다. 스페인 출신의 그녀는 바로크 및 르네상스 레퍼토리에 특화된 고음악 전문 성악가로, 섬세한 장식음 처리와 언어의 억양을 음악적 표현으로 전환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두론의 아리아들은 기교적 난이도보다 감정의 밀도가 관건이다. 눈물(lágrimas)과 사랑(amor)이라는 앨범의 두 키워드처럼, 수록된 아리아들은 격렬한 감정의 폭발보다 내면에서 조용히 무너지는 슬픔과 욕망을 표현한다. 후아레스의 목소리는 이 내향적 감정선을 파고드는 데 탁월하다. 과잉 없이, 그러나 결코 무심하지 않게 — 그것이 이 음반에서 그녀가 선택한 해석의 방향이다.
A 코르테 무지칼과 로헤리오 곤살베스의 지휘 — 시대악기로 재현한 마드리드 궁정
앙상블 'A 코르테 무지칼(A Corte Musical)'은 포르투갈 출신 바순 연주자이자 타악기 연주자인 로헤리오 곤살베스(Rogério Gonçalves)가 이끄는 시대악기 전문 단체다. 이 음반에는 바이올린(Vitaliy Shestakov, Lasma Meldere), 스페인 기타 & 테오르보(Maria Ferré), 스페인 하프(Maria Cristina Cleary), 첼로(Theresia Kainzbauer), 비올로네(Stephan Schürch), 하프시코드(Corien de Jong) 등이 참여해 17~18세기 스페인 궁정 음악의 음향적 색채를 정밀하게 복원했다.
특히 스페인 기타, 테오르보, 스페인 하프의 조합은 이탈리아나 프랑스 바로크 앙상블과 확연히 구분되는 이베리아 반도 특유의 음색을 만들어낸다. 곤살베스의 지휘는 화려함보다 균형감을 앞세우며, 성악과 기악이 서로 밀고 당기는 긴장 관계를 섬세하게 조율한다. 2014년 2월 스위스 겔터킨덴(Gelterkinden)의 개혁교회에서 녹음된 이 앨범은 공간의 잔향을 적절히 살려 당시 궁정 음악의 친밀하고도 격식 있는 분위기를 재현했다.
사르수엘라의 눈물 — 수록곡의 탄생 배경과 에피소드
수록된 12개 트랙은 두론의 사르수엘라들에서 발췌한 아리아들과 익명의 기악곡들로 구성된다. 사르수엘라는 17세기 스페인 마드리드 근교 왕실 별궁 '라 사르수엘라(La Zarzuela)'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음악과 대사, 춤이 결합된 스페인 고유의 음악극 형식이다.
트랙 2 'Auras Suaves'(부드러운 산들바람)는 1702년경 작품인 사르수엘라 'Las nuevas armas de Amor'(사랑의 새로운 무기들)에서 발췌한 것으로, 이탈리아 바로크 아리아의 정제된 형식미를 스페인어의 유려한 운율에 접목한 초기 융합의 시도를 보여준다.
트랙 5 'El marido que sufrido'(참을성 있는 남편)와 트랙 6 'Dioses piedad'(신들이여, 자비를)는 모두 1705년 사르수엘라 'Coronis'에서 나왔다. 이 작품은 그리스 신화의 코로니스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아폴론의 질투와 배신, 그리고 죽음이라는 비극적 서사를 극적인 아리아들로 담아냈다.
트랙 3 'Ondas, riscos, peces, mares'(파도여, 암초여, 물고기여, 바다여)와 트랙 10 'Llorad infaustos zagales'(불운한 양치기들이여, 울어라)는 1706년 사르수엘라 'Veneno es de Amor la envidia'(질투는 사랑의 독)에서 발췌한 곡들로, 두론이 추방되기 불과 수년 전, 마드리드 궁정에서의 마지막 전성기를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기악 트랙인 트랙 4 'Españoleta', 트랙 8 'Chacona', 트랙 11 'Passacalles de primer tono' 는 모두 작자미상의 익명 기악곡으로, 당시 스페인 궁정에서 유행하던 춤 형식을 기반으로 한 작품들이다. 이 기악곡들은 아리아 사이의 숨 고르기이자, 이베리아 반도 고유의 리듬감이 얼마나 개성적인지를 보여주는 귀중한 증거이기도 하다.
눈물과 사랑
앨범 제목 'Lágrimas, Amor…'(눈물, 사랑…)은 두론 음악의 감정적 핵심을 단 두 단어로 압축한다. 수록된 아리아들을 관통하는 정서는 실연(失戀)과 갈망, 그리고 신과 자연을 향한 호소다.
바로크 음악의 언어에서 '눈물'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다. 그것은 영혼이 감정의 극단까지 내몰렸을 때 터져 나오는 형이상학적 언어였다. 두론의 아리아들에서 눈물은 상실의 표현이자, 사랑이 인간에게 가하는 불가항력적 힘에 대한 경외의 몸짓이다. 트랙 7 'Yo no puedo'(나는 할 수 없다)처럼 사랑 앞에서 무력해진 인간의 고백은, 3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오늘의 청중에게도 낯설지 않게 가닿는다.
이 음반은 단순한 역사적 복원 프로젝트가 아니다. 정치에 의해 추방당하고, 역사에 의해 잊혀진 한 작곡가의 음악이 오늘의 연주자들 손에 의해 다시 살아 숨 쉬는 과정 — 그것이 'Lágrimas, Amor…'가 담고 있는 가장 깊은 울림이다.
눈물은 흘러 사라지지만, 음악은 남는다. 두론의 음악이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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