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라이프저니 | 이여름 기자] 바로크 시대 함부르크 오페라를 이끌었던 작곡가 요한 필리프 퇴르치(Johann Philipp Fortsch, 1652-1732)의 종교 성악곡이 세계 최초로 완전한 형태로 녹음됐다.
독일의 레이블 카루스가 2010년 발매한 이 음반은 바로크 음악사의 공백을 메우는 기념비적 작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2009년 9월 독일 츠베렌베르크 복음교회에서 3일간 진행된 이번 녹음 세션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총 11곡 가운데 9곡이 세계 초연 녹음(world premiere recordings)으로, 300년 가까이 악보로만 존재하던 퇴르치의 음악이 처음으로 소리를 얻은 것이다.
타이틀곡 'Ich freue mich im Herrn(주 안에서 기뻐하리)'를 비롯해 'Ach, dass die Hulfe aus Zion(오, 시온에서 도움이 오기를)', 'Ich weiß, dass mein Erloser lebt(내 구속자가 살아계심을 아노라)' 등 모두 성경 구절에 기반한 독일어 종교 성악곡들이다.
프로듀서 페터 랭어(Peter Laenger)는 "이 녹음은 단순히 음반을 만드는 작업이 아니라, 바로크 음악사의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내는 발굴 프로젝트였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번 녹음에는 바로크 음악 해석의 최전선에 선 연주자들이 참여했다. 소프라노 모니카 마우흐(Monika Mauch)와 바르바라 뷜(Barbara Bubl), 알토 알렉스 포터(Alex Potter), 테너 한스 외르크 맘멜(Hans Jorg Mammel), 베이스 마르쿠스 플라이그(Markus Flaig) 등 독일어권 바로크 성악의 정수를 보여주는 가수들이다.
특히 마우흐는 17세기 독일 성악 레퍼토리의 권위자로, 퇴르치 특유의 감정 표현과 텍스트 중심의 작곡 스타일을 섬세하게 구현해냈다. 알토 알렉스 포터는 카운터테너 특유의 투명한 음색으로 퇴르치가 추구한 '천상의 조화'를 표현했다.
앙상블 '라르파 페스탄테(L'arpa festante)'는 지휘자 리엔 보스쿠일렌(Rien Voskuilen)의 지휘 아래 비올라 다 감바, 류트형 테오르베, 바로크 오르간, 쳄발로 등 당대 악기를 활용해 17세기 후반 괴팅겐 궁정의 음향을 재현했다.
요한 필리프 퇴르치는 바로크 시대에서도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본업은 의사였던 그는 1680년부터 1690년까지 함부르크 오페라의 음악감독을 맡으며 독일 오페라 발전에 기여했다. 이후 고트로프 공작 프리드리히 4세의 초청으로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궁정 악장이 됐다.
그러나 퇴르치의 진정한 업적은 괴팅겐에서 이뤄졌다. 1702년부터 173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30년간 괴팅겐 궁정과 교회의 음악감독으로 재직하며 수많은 종교 음악을 작곡했다. 당시 괴팅겐 궁정은 경건주의 운동의 중심지였고, 퇴르치는 깊은 신앙심이 담긴 독일어 성악곡으로 이 흐름을 음악적으로 뒷받침했다.
음악학자들은 퇴르치를 "디트리히 북스테후데와 요한 쿤, 게오르크 필립 텔레만을 잇는 북독일 바로크 음악의 중요한 연결고리"로 평가한다. 특히 그의 칸타타와 모테트는 이탈리아 양식과 독일 전통을 결합한 독창적 스타일을 보여준다.
이번 음반에 수록된 11곡은 총 69분 44초 분량으로, 퇴르치 음악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준다. 5분대 소품부터 9분이 넘는 대작까지, 솔로 성악곡에서 5성부 합창곡까지 스펙트럼이 넓다.
특히 9분 8초 분량의 'O adoranda trinitas(오 경배할 삼위일체)'는 테너, 베이스, 3개의 비올라 다 감바, 통주저음, 테오르베, 오르간이 어우러진 장대한 구성으로 퇴르치의 대위법 기교와 음향적 상상력을 입증한다.
독일 바로크 음악 전문가인 한 음악학자는 "퇴르치는 북스테후데의 신비주의적 경건함과 텔레만의 세속적 우아함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다"며 "이번 녹음은 북스테후데 사후(1707)부터 바흐의 라이프치히 시절(1723) 사이, 독일 바로크 종교음악의 공백을 메우는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녹음 장소로 선택된 츠베렌베르크 복음교회는 바로크 시대 독일 교회의 음향적 특성을 고스란히 간직한 공간이다. 프로듀서 페터 랭어는 이 교회의 자연스러운 잔향과 명료한 음향을 최대한 살려냈다.
카루스는 이 음반과 함께 독일어-영어-프랑스어 3개 국어 해설과 가사집을 제공했다. 악보도 함께 출판해 연주자들이 실제 연주에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음반은 2010년 발매 직후 독일 클래식 전문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한 평론가는 "이것은 단순한 녹음이 아니라 역사적 발굴이며, 마우흐와 보스쿠일렌 팀의 헌신적 연주는 퇴르치가 잊혀진 작곡가가 아니라 재평가받아야 할 거장임을 증명한다"고 썼다.
바로크 음악의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는 이 음반은, 300년 전 괴팅겐 궁정에서 울려 퍼졌을 경건한 찬양이 21세기에 다시 생명을 얻었음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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