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라이프저니 | 이여름 기자] 독일 카루스 레이블이 2015년에 선보인 음반은 이탈리아 후기낭만파 작곡가 오토리노 레스피기(1879-1936)의 대작 '주님 탄생 찬가(Lauda per la Nativita del Signore)'를 중심으로, 20세기 성탄 음악의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제시한다.
음반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레스피기의 '주님 탄생 찬가'다. 25분이 넘는 이 대곡은 독창자들, 합창단, 플루트, 오보에, 호른, 2대의 파곳, 현악, 트라이앵글 등 실내악 편성의 관현악이 어우러지는 독특한 구성을 자랑한다.
'로마 3부작'으로 유명한 레스피기의 화려한 관현악법과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선율에 대한 그의 애정이 조화롭게 녹아든 작품으로, 상업적 성공에 가려져 있던 진주 같은 성탄 음악이다.
음반은 레스피기 작품 외에도 신중하게 선곡된 성탄 모테트들로 채워져 있다. 미하엘 프레토리우스의 전통 코랄을 스웨덴 작곡가 산드스트룀이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장미 한 송이 피었네(Es ist ein Ros entsprungen)'로 시작해, 하인리히 카민스키의 신비로운 '마리아는 가시나무 숲을 지나(Maria durch ein Dornwald ging)', 미국 합창음악의 거장 모르텐 라우릿센의 명작 'O magnum mysterium'이 이어진다.
특히 프랑시스 풀랑의 '성탄절 4개의 모테트'는 프랑스 합창 전통의 정수를 보여준다. 명료한 텍스처와 섬세한 화성 처리가 돋보이는 이 작품들은, 베를린 방송합창단의 탁월한 딕션과 앙상블 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니콜라스 핑크와 마리스 시르마이스, 두 지휘자의 협업도 주목할 만하다. 핑크는 1-8번 트랙의 소품들에서 각 작품의 개성을 명확히 부각시키는 세밀한 해석을 들려주고, 시르마이스는 레스피기의 대작에서 드라마틱한 구조감과 서정성의 균형을 잡아낸다.
베를린 방송합창단은 독일 합창 전통의 탄탄한 기반 위에서도 이탈리아적 레가토와 프랑스적 섬세함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소프라노 서예리, 크리스티네 라리사 풍크하우저, 테너 크리스티안 아담 등 독창자들의 투명한 음색도 앙상블의 완성도를 한층 높인다. 특히 고음악에 정통한 한국이 낳은 소프라노 서예리의 호소는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폴리포니아 앙상블 베를린의 기악 연주 역시 합창과의 일체감이 뛰어나다.
2014년 12월과 2015년 1월, RBB 자알에서 진행된 녹음은 도이칠란트라디오 문화방송(Deutschlandradio Kultur)과의 공동제작으로 이루어졌다. 공영방송의 안정적 지원 속에서 충분한 녹음 시간을 확보한 덕분에 각 작품의 뉘앙스가 세밀하게 포착됐다. 음향의 공간감과 투명도가 뛰어나며, 합창과 기악의 균형도 이상적이다.
51분 남짓한 러닝타임은 성탄 음악 앨범으로는 다소 짧게 느껴질 수 있으나, 내용의 밀도와 완성도를 고려하면 오히려 적절한 선택이다. 상업성보다 예술성을 우선한 카루스 레이블다운 기획이며, 크리스마스 시즌은 물론 한 해 내내 감상할 가치가 있는 수작이다.
klifejourney2025@gmail.com
[저작권자ⓒ K라이프저니.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