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라이프저니 | 이여름 기자] 전쟁과 평화는 어떻게 제국을 만들고 무너뜨리는가. 코네티컷 대학교 생태학·진화생물학·수학과 교수 피터 터친(Peter Turchin)의 '제국의 탄생: 제국은 어떻게 태어나고 기세를 떨치다가 몰락하는가(War and Peace and War)'는 역사학에 수학적 모델을 적용해 인류 문명의 패턴을 분석한 혁명적 저작이다.
2006년 원서 출간 이후 학계에 거대한 파장을 일으킨 이 책은 단순한 역사서가 아니라, 역사를 예측 가능한 과학으로 만들려는 야심찬 시도다. 터친은 생물학자이자 수학자라는 독특한 배경을 바탕으로 '클리오다이나믹스(Cliodynamics, 계량역사학)'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를 개척했으며, 이 책은 그 핵심 이론을 집대성한 결과물이다.
피터 터친의 접근법은 전통 역사학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는 역사가 위대한 개인의 결단이나 우연한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 예측 가능한 패턴을 따른다고 주장한다. 생태학에서 포식자-피식자 관계가 수학적으로 모델링되듯, 인간 사회의 협력과 갈등, 제국의 성장과 쇠퇴 역시 수학적 법칙을 따른다는 것이다.
터친이 제시하는 핵심 개념은 '아사비야(Asabiya)'다. 이는 14세기 아랍 역사가 이븐 할둔이 사용한 용어로, 집단 연대감 또는 사회적 결속력을 의미한다. 터친은 아사비야가 높은 사회는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사비야가 약화되고 결국 붕괴한다는 순환 이론을 전개한다.
이 과정에서 '전쟁'은 역설적으로 사회 통합의 촉매제 역할을 한다. 외부의 위협은 내부 결속을 강화하고, 이렇게 형성된 강력한 집단이 제국을 건설한다. 그러나 제국이 안정되고 평화가 지속되면 엘리트 간 경쟁이 심화되고, 불평등이 증가하며, 사회적 신뢰가 붕괴되면서 제국은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
터친은 이론을 공허한 추상으로 남기지 않는다. 그는 로마 제국, 중국 왕조, 러시아 제국, 미국 등 수천 년에 걸친 방대한 역사 데이터를 수집하고, 이를 통계적으로 분석해 자신의 이론을 검증한다.
로마 제국의 경우, 공화정 시대의 강력한 시민 연대가 제국 확장의 원동력이었지만, 제국 후기로 갈수록 엘리트의 부패, 군인 황제 시대의 혼란, 사회적 분열이 심화되며 결국 멸망에 이르렀다. 이는 아사비야 상승-정점-하락의 전형적인 패턴을 보여준다.
러시아 제국의 형성 과정도 흥미롭다. 터친은 유라시아 스텝 지대에서 유목민의 끊임없는 침략이 슬라브 민족의 결속을 강화했고, 이것이 결국 거대한 러시아 제국 건설의 기반이 되었다고 분석한다. 외부 압력이 강력한 국가를 만드는 역설을 보여주는 사례다.
미국 역시 예외가 아니다. 터친은 미국 독립전쟁과 남북전쟁 같은 위기가 오히려 국가 통합을 강화했지만, 20세기 후반 이후 엘리트 과잉 생산, 불평등 심화, 정치 양극화가 진행되면서 사회적 불안정이 증가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피터 터친이 창시한 클리오다이나믹스는 역사학에 수학, 통계학,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도입해 역사적 과정을 정량적으로 분석하는 학문이다. 이는 역사를 단순히 서술하는 것을 넘어 예측 가능한 과학으로 만들려는 시도다.
터친과 그의 동료들은 방대한 역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사회 불안정 지수, 엘리트 과잉 생산 지표, 국가 재정 위기 예측 모델 등을 개발했다. 놀랍게도 이들의 모델은 2010년과 2020년경 미국에서 사회적 불안정이 정점에 이를 것이라고 2010년 이전에 예측했는데, 실제로 오큐파이 월스트리트 운동(2011), 트럼프 당선과 정치 양극화(2016-2020), 그리고 2020년 조지 플로이드 시위 등이 발생했다.
학계의 반응은 엇갈린다. 지지자들은 터친의 접근이 역사학을 주관적 해석의 늪에서 건져내고 경험적으로 검증 가능한 과학으로 만들었다고 평가한다. 특히 사회과학자와 복잡계 과학자들은 클리오다이나믹스를 역사 연구의 새로운 지평으로 환영한다.
그러나 비판도 만만치 않다. 전통 역사학자들은 터친의 접근이 지나치게 환원주의적이며, 역사의 복잡성과 우연성,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한다고 지적한다. 아사비야 같은 개념을 수치화할 수 있는가, 문화적·지리적 맥락이 전혀 다른 사회들을 동일한 수학 모델로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근본적 의문도 제기된다.
또한 터친의 예측이 자기실현적 예언이 될 위험도 있다. 만약 많은 사람이 특정 시점에 사회 붕괴가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 믿음 자체가 불안정을 야기할 수 있다.
피터 터친은 전형적인 역사학자가 아니다. 그는 소련(현 러시아)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에서 생물학을 전공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듀크 대학교에서 동물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초기에는 딱정벌레 개체군 동역학을 연구하는 생태학자였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터친은 생태학의 수학적 모델을 인간 사회에 적용하면 역사적 패턴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는 통찰을 얻었다. 이후 그는 역사학, 사회학, 경제학, 인류학을 독학하며 학문 간 경계를 넘나드는 연구를 시작했다.
2003년 터친은 학술지 'Journal of Peace Research'에 미국의 사회 불안정을 예측하는 논문을 발표했고, 2008년에는 동료들과 함께 클리오다이나믹스 연구를 전문으로 하는 학술지를 창간했다. 그는 현재 코네티컷 대학교에서 생태학, 진화생물학, 수학을 동시에 가르치며 복잡성 과학 연구소(Complexity Science Hub Vienna)의 연구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터친의 강점은 자연과학자의 엄밀함과 사회과학자의 통찰을 결합한 데 있다. 그는 데이터를 중시하고 가설을 경험적으로 검증하려 하지만, 동시에 역사의 복잡성과 인간 사회의 특수성도 인정한다. 이러한 균형 잡힌 접근이 그를 단순한 환원주의자가 아닌, 새로운 학문 패러다임의 개척자로 만들었다.
'제국의 탄생'의 가장 큰 학문적 기여는 역사 연구에 새로운 방법론을 도입했다는 점이다. 전통 역사학이 주로 문헌 분석과 질적 해석에 의존했다면, 터친은 대규모 데이터 수집, 통계 분석, 수학적 모델링을 역사 연구의 핵심 도구로 만들었다.
이는 역사학을 더 이상 '과거를 기록하는 학문'이 아니라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과학'으로 만들려는 시도다. 물론 인간 사회는 물리학의 대상처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지만, 터친은 적어도 확률적 예측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제국의 탄생'은 다학제적 연구의 모범을 보여준다. 생물학의 개체군 동역학, 경제학의 게임 이론, 사회학의 집단 행동 이론, 인류학의 문화 진화론이 하나로 통합되어 인류 문명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공한다.
터친의 연구는 정책 결정자들에게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만약 사회 불안정이 예측 가능한 패턴을 따른다면, 조기 경보 시스템을 구축하고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터친의 모델은 불평등 감소, 엘리트 순환 촉진, 사회적 신뢰 회복이 장기적 안정의 핵심임을 시사한다.
'제국의 탄생'이 2020년대 독자들에게 특히 절실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현재 세계가 터친이 경고했던 '불안정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터친의 모델에 따르면, 현대 서구 사회는 여러 위험 신호를 보이고 있다. 엘리트 과잉 생산(대졸자는 늘어나지만 좋은 일자리는 제한적), 불평등 심화(상위 1%로의 부 집중), 국가 재정 위기(늘어나는 부채), 정치 양극화(타협 불가능한 이념 대립)가 모두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2016년 트럼프 당선, 2020년 대선 불복 사태와 국회의사당 습격, 지속되는 정치적 대립이 사회 불안정의 증거로 해석된다. 유럽에서는 포퓰리즘의 부상, 브렉시트, 이민 갈등이 사회적 결속을 약화시키고 있다.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니다. 세대 갈등, 젠더 갈등, 지역 갈등이 심화되고, 청년 실업과 주거 불안이 고조되며, 정치적 양극화가 극에 달하고 있다. 이는 모두 터친이 말하는 '아사비야 약화'의 징후들이다.
'제국의 탄생'과 터친의 클리오다이나믹스 이론을 바탕으로 미래 세계사를 전망하면, 크게 세 가지 시나리오가 가능하다.
시나리오 1: 불안정의 심화와 체제 위기 (2020-2030년대)
터친의 모델은 2020년대가 미국과 서구 사회에서 사회 불안정의 정점이 될 것으로 예측한다. 실제로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조지 플로이드 시위, 그리고 정치적 극단화는 이를 입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향후 10년간 다음과 같은 현상이 심화될 가능성이 크다. 엘리트 간 권력 투쟁 격화로 정치 시스템의 마비가 일어나고, 경제 불평등 심화로 중산층 붕괴와 사회 이동성 저하가 가속화되며, 포퓰리즘과 극단주의의 부상으로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세대·인종·지역 간 갈등이 폭력적으로 표출될 것이다.
이는 1920-1930년대 대공황기나 1960-1970년대 사회 격변기와 유사한 패턴이다. 터친의 이론에 따르면 이러한 위기는 40-60년 주기로 반복되며, 현재는 바로 그 위기의 국면에 진입하고 있다.
시나리오 2: 외부 위협을 통한 재결속 (2030-2050년대)
역사적으로 사회적 분열은 종종 외부 위협에 대한 대응 과정에서 극복되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대공황의 분열을 극복했고, 냉전은 서구 동맹의 결속을 강화했다.
21세기에도 유사한 메커니즘이 작동할 수 있다. 기후변화로 인한 글로벌 위기는 국제 협력을 강제할 것이고, 중국과 서구의 지정학적 경쟁은 각 진영 내부의 결속을 강화할 수 있으며, 사이버 위협이나 팬데믹 같은 초국가적 도전은 새로운 형태의 집단 연대를 만들어낼 것이다.
이 경우 2030년대 이후 새로운 국제 질서가 형성되고, 각국은 내부 개혁을 통해 사회적 결속을 회복하며, 새로운 형태의 '디지털 아사비야'가 등장할 수 있다.
시나리오 3: 제국의 쇠퇴와 다극화 세계 (2050년 이후)
그러나 터친의 이론이 제시하는 가장 근본적인 통찰은, 모든 제국은 결국 쇠퇴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팍스 아메리카나 역시 영원할 수 없다.
미국이 아사비야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21세기 중반 이후 세계는 진정한 다극화 시대로 접어들 것이다. 미국, 중국, 인도, EU, 이슬람 권역 등 여러 권력 중심이 공존하는 새로운 국제 질서가 형성되고, 어느 한 국가도 세계를 주도하지 못하는 '제국 없는 시대'가 올 수 있으며, 지역 블록 간 경쟁과 갈등이 증가하되, 핵무기와 상호 의존성 때문에 전면전은 회피될 것이다.
이는 로마 제국 붕괴 후 중세 유럽의 분열이나, 몽골 제국 해체 후 아시아의 다극화와 유사한 패턴이다.
터친의 이론은 한국의 미래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역사적으로 한반도는 거대 제국(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의 각축장이었다. 그러나 터친의 관점에서 보면, 변방의 압력이 오히려 강력한 사회 결속을 만들 수 있다.
한국은 분단과 전쟁, 외세의 간섭이라는 지속적인 외부 위협 속에서 높은 수준의 사회적 결속을 유지해왔다. 이것이 놀라운 경제 발전과 민주화의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현재 한국 사회는 결속이 약화되는 징후를 보인다.
향후 한국의 진로는 두 갈래다. 하나는 내부 갈등을 극복하고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연대를 구축해 동아시아의 중심 국가로 부상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분열이 심화되어 주변 강대국의 영향력 경쟁 속에 표류하는 것이다.
터친의 이론은 전자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불평등 완화, 세대 간 연대 회복, 엘리트의 사회적 책임 강화가 필수적임을 시사한다.
'제국의 탄생'은 역사학에 과학적 방법론을 도입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한계도 명확하다.
첫째, 과거 데이터로 구축한 모델이 미래에도 유효할지는 불확실하다. 핵무기, 인터넷, 인공지능 같은 기술 혁신은 인류 역사에 전례 없는 변수를 도입했다.
둘째, 수학 모델은 측정 가능한 것만 포착한다. 문화, 가치관, 정체성 같은 질적 요소는 수치화하기 어렵지만, 역사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
셋째, 터친의 예측이 널리 알려지면 사람들이 행동을 바꿔 예측이 빗나갈 수 있다. 이는 사회과학의 근본적 딜레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탄생'은 역사를 보는 새로운 눈을 제공한다. 역사가 단순한 일회적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패턴을 가진 과정이며, 그 패턴을 이해함으로써 우리가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피터 터친의 '제국의 탄생'은 불편한 책이다. 그것은 우리가 자유의지로 역사를 만든다고 믿고 싶어 하지만, 실은 우리도 예측 가능한 패턴의 일부일 수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터친의 메시지는 숙명론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패턴을 이해함으로써 우리가 더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제국이 쇠퇴하는 이유를 안다면, 우리는 그 쇠퇴를 막거나 늦출 수 있다. 사회 불안정의 징후를 미리 포착한다면, 위기가 폭발하기 전에 대응할 수 있다.
21세기 세계는 지금 터친이 경고했던 불안정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불평등은 심화되고, 엘리트는 분열하며, 사회적 신뢰는 무너지고 있다. 이는 역사가 반복될 것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역사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나선형으로 진행된다. 우리는 과거의 교훈을 알고 있고, 새로운 도구를 가지고 있으며,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제국의 탄생'은 그 선택을 위한 지도이자, 경고이자, 초대장이다.
인류가 제국의 흥망성쇠라는 오래된 패턴을 넘어설 수 있을지, 아니면 또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할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그 답은 우리 모두의 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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