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음반] 세자르 프랑크의 숨겨진 걸작, '십자가 위 그리스도의 일곱 말씀' 재조명
이주상 기자
klifejourney2025@gmail.com | 2026-01-04 20:49:59
[K라이프저니 | 이여름 기자] 벨기에의 명문 클래식 레이블 Cypres가 'Musique en Wallonie(왈로니아 음악)' 시리즈를 통해 발매한 세자르 프랑크(1822-1890)의 초기 대작 '십자가 위 그리스도의 일곱 말씀(Les Sept Paroles du Christ sur la Croix)'는 1859년 작곡된 오라토리오로 프랑크의 종교음악 세계를 이해하는 핵심 작품이지만, 그동안 음반 시장에서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숨은 걸작이다.
이 음반은 여러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를 지닌다. 프랑크의 종교음악 작품 중 비교적 덜 알려진 레퍼토리를 다룬다는 점에서 음반학적 희소성이 높으며, 벨기에 태생 작곡가의 작품을 벨기에 연주단체가 직접 연주했다는 점에서 정통성을 확보했다. 특히 Cypres 레이블의 'Musique en Wallonie' 시리즈는 벨기에 프랑스어권 지역의 음악 유산을 체계적으로 기록하는 프로젝트로, 이 음반은 프랑크 연구에 있어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또한 이 음반에는 프랑크의 또 다른 종교음악 '도미네 논 세쿤둠(Domine non secundum)'이 함께 수록되어 작곡가의 종교음악 세계를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한다. 프랑스 문화부와 벨기에 프랑스어권 공동체, 타르브 시, 앙리 뒤파르크 음악원 등의 지원으로 제작된 이 음반은 공공 문화 사업으로서의 의미도 크다.
지휘자 장-폴 살란(Jean-Paul Salanne)이 이끄는 도멘 뮤지컬 오케스트라(Orchestre du Domaine Musical)와 앙리 뒤파르크 합창단(Chœur Henri Duparc)은 프랑스 낭만주의 종교음악의 정통 해석을 들려준다. 살란은 프랑스 음악 전통에 정통한 지휘자로, 프랑크 특유의 반음계적 화성과 오르간적 사고가 반영된 관현악법을 섬세하게 표현해냈다.
솔로이스트 진용도 인상적이다. 소프라노 베르나데트 드젤랭(Bernadette Degelin)은 프롤로그와 3번째 말씀에서 맑고 투명한 음색으로 천상의 위로를 전하며, 테너 존 허스트(John Hurst)는 2번째와 6, 7번째 말씀에서 그리스도의 고뇌와 용서를 깊이 있게 표현한다. 베이스 자크 슈바르츠(Jacques Schwarz)는 5번째 말씀에서 중후한 성음으로 갈증의 절박함을 노래하며, 오르가니스트 제라르 셀(Gerard Seel)은 '도미네 논 세쿤둠'에서 오르간 반주의 풍부한 음향을 선사한다.
앙리 뒤파르크 합창단은 합창 부분에서 균형 잡힌 앙상블과 명료한 딕션으로 라틴어 가사의 의미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타르브의 앙리 뒤파르크 음악원 스튜디오에서 이루어진 녹음은 교회 음향의 잔향을 적절히 담아내면서도 각 성부의 명료함을 잃지 않는 균형감을 보여준다.
'십자가 위 그리스도의 일곱 말씀'은 프랑크가 37세이던 1859년에 작곡한 작품으로, 그의 창작 여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나타낸다. 이 시기는 프랑크가 파리 생트-클로틸드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임명되고(1858년) 본격적으로 종교음악에 몰두하기 시작한 때다.
이 작품은 하이든의 같은 제목 작품(1785년경)과 구노의 '십자가의 일곱 말씀'(1855년) 등 선배 작곡가들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프랑크 특유의 반음계적 화성 언어와 순환 형식의 맹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특히 각 '말씀(Parole)' 사이의 조성 관계와 동기 연결은 후기 대작인 '복음의 여덟 가지 축복(Les Beatitudes, 1869-1879)'으로 이어지는 작곡 기법의 실험장이었다.
19세기 프랑스 종교음악사에서 이 작품은 베를리오즈, 구노로 이어지는 오라토리오 전통과 프랑크 이후 포레, 뒤뤼플레로 계승되는 프랑스 종교음악의 교량 역할을 한다. 낭만주의 시대 오페라의 극적 요소를 수용하면서도 그레고리안 성가의 선법적 요소를 유지하는 절충적 양식은 당시 프랑스 가톨릭 음악의 전형을 보여준다.
작품은 프롤로그와 일곱 개의 '말씀(Parole)', 그리고 '도미네 논 세쿤둠'으로 구성된다. 각 부분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십자가 상 발언을 라틴어 가사로 다룬다.
프롤로그 'O vos omnes'(오 너희 모든 이들이여)는 소프라노 독창으로 시작하여 예레미야 애가의 구절을 노래하며 작품 전체의 비극적 분위기를 설정한다.
제1 말씀 'Pater, dimitte illis'(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는 합창이 중심이 되어 예수의 용서를 장엄하게 노래한다.
제2 말씀 'Hodie mecum eris in paradiso'(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두 테너의 대화 형식으로 회개한 강도와의 대화를 극적으로 표현한다.
제3 말씀 'Mulier, ecce filius tuus'(여인이여, 이 사람이 당신의 아들입니다)는 소프라노, 테너, 베이스와 합창이 어우러져 성모 마리아에 대한 배려를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프랑크는 이 부분에서 가장 섬세한 화성 처리를 보여준다.
제4 말씀 'Deus meus, ut quid dereliquisti me'(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는 합창의 절규로 그리스도의 극한 고뇌를 표현한다.
제5 말씀 'Sitio'(목마르다)는 베이스 독창과 합창이 짧지만 강렬하게 육체적 고통을 전한다.
제6 말씀 'Consummatum est'(다 이루었다)는 테너 1과 합창이 성취의 평화를 노래한다.
제7 말씀 'Pater, in manus tuas commendo spiritum meum'(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은 테너 1과 합창이 최종적 위탁과 평온을 표현하며 작품을 마무리한다.
'도미네 논 세쿤둠'은 소프라노, 테너, 베이스 삼중창과 오르간 반주를 위한 참회의 음악으로, "주님, 저희 죄대로 갚지 마소서"라는 간구를 담고 있다.
프랑크가 이 작품을 쓰게 된 계기는 19세기 중반 프랑스 가톨릭 교회의 종교음악 부흥 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850년대는 그레고리안 성가 복원 운동과 팔레스트리나 양식의 재평가가 활발했던 시기로, 프랑크는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면서도 낭만주의 음악 언어를 접목한 새로운 종교음악을 모색했다.
1858년 생트-클로틸드 성당의 오르가니스트 겸 성가대 지휘자로 임명된 프랑크는 사순절과 성주간 전례를 위한 음악을 작곡할 필요성을 느꼈다. '십자가 위 그리스도의 일곱 말씀'은 성금요일 예배를 위한 명상 음악으로 구상되었으며, 당시 파리의 종교음악계에서 인기를 얻고 있던 오라토리오 형식을 채택했다.
작품은 1859년 4월 15일 성금요일에 파리에서 초연되었으나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프랑크 특유의 복잡한 화성과 반음계적 진행이 당시 청중에게는 다소 난해하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곡가는 이 작품을 통해 자신만의 종교음악 어법을 확립했으며, 이는 이후 '레뎀시옹(1871-1872)', 'Les Beatitudes' 등 대규모 종교 작품으로 발전하는 토대가 되었다.
프랑크는 리에주 태생의 벨기에인으로서 프랑스에서 활동한 작곡가였기에, 이 작품에는 플랑드르 다성음악 전통과 프랑스 오페라적 극성이 독특하게 결합되어 있다. 오르간 음악에서 단련된 대위법적 기교와 화성적 풍부함이 관현악과 합창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으며, 이는 프랑크를 19세기 프랑스 교회음악의 혁신가로 자리매김하게 한 요인이다.
이 음반은 잊혀졌던 프랑크의 중요한 종교음악을 정통 벨기에-프랑스 전통의 연주로 재조명함으로써, 19세기 낭만주의 종교음악의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자 감동적인 음악적 성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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