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 라트비아 근대미술의 거장 야니스 로젠탈, '앉아있는 누드'에 담긴 시대정신
이주상 기자
klifejourney2025@gmail.com | 2026-01-05 19:47:28
[K라이프저니 | 이여름 기자]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로 넘어가는 격변의 시기, 라트비아 화단은 유럽 미술의 새로운 조류를 받아들이며 독자적 정체성을 모색하고 있었다. 야니스 로젠탈(Janis Rozentals, 1866-1916)의 'Seated Nude(앉아있는 누드, 1906년 추정)'는 이러한 시대적 전환점에서 탄생한 작품으로, 61×33cm의 작은 캔버스 안에 근대 라트비아 미술의 정수를 응축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로젠탈은 전통적인 여성 누드라는 고전적 주제를 인상주의적 감수성으로 재해석했다. 흰 천 위에 앉아 붉은 꽃을 향해 몸을 기울인 여성의 자세는 자연스럽고 친밀하다. 화가는 아카데믹한 이상화된 누드가 아닌, 살아 숨쉬는 인간의 육체를 포착했다. 여성이 꽃 향기를 맡는 순간의 몰입은 감각적 경험에 대한 찬미이자,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관계를 상징한다.
붉은 제라늄 꽃과 여성의 피부가 만들어내는 색채 대비는 생명력과 관능미를 동시에 전달한다. 배경의 회청색 벽면은 따뜻한 살색과 붉은 꽃을 더욱 돋보이게 하며, 전체 화면에 몽환적이면서도 시적인 분위기를 조성한다.
로젠탈의 화법은 프랑스 인상주의의 영향을 명확히 보여준다. 빠르고 자유로운 붓질, 빛에 따라 변화하는 색채의 표현, 순간의 인상을 포착하려는 시도 등이 그것이다. 특히 흰 천과 여성의 피부를 처리하는 방식에서 빛의 미묘한 변화와 반사를 섬세하게 다루는 인상주의적 기법이 돋보인다.
동시에 이 작품은 상징주의적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 꽃을 향한 여성의 몸짓은 단순한 일상적 제스처를 넘어 아름다움과 감각에 대한 탐닉, 덧없는 청춘에 대한 은유로 읽힌다. 이는 19세기 말 유럽 전역을 풍미했던 상징주의와 데카당스 문학의 주제의식과도 맥을 같이 한다.
화면 왼쪽의 커튼과 오른쪽의 꽃다발이 만들어내는 구도는 무대적 연출성을 암시하며, 이는 아르누보 특유의 장식적 감수성과도 연결된다. 로젠탈은 이처럼 동시대 유럽 미술의 다양한 조류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종합해냈다.
1906년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은 벨 에포크(Belle Epoque) 시대 유럽의 문화적 분위기를 반영한다. 19세기의 엄격한 도덕률이 느슨해지고, 예술적 자유와 개인의 감각적 경험이 새롭게 조명받던 시기였다. 여성 누드를 둘러싼 시선도 변화하고 있었다. 신화적·종교적 알리바이 없이도 여성의 육체를 미의 대상이자 예술적 탐구의 주제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로젠탈의 작품에서 여성은 남성 관람자를 위해 포즈를 취하는 수동적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감각 세계에 몰입한 능동적 주체로 그려진다. 이는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시각이었으며, 20세기 초 여성성에 대한 재인식과도 맞닿아 있다.
야니스 로젠탈은 라트비아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1866년 라트비아의 소도시 살두스에서 태어난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제국미술아카데미에서 일리야 레핀 등 러시아 리얼리즘 대가들에게 사사받았고, 이후 독일 뮌헨에서 유럽 모더니즘을 흡수했다.
로젠탈은 러시아 아카데미즘, 프랑스 인상주의, 독일 상징주의와 아르누보 등 다양한 조류를 라트비아적 맥락으로 재해석하며 독자적 화풍을 확립했다. 그는 단순히 서유럽 양식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라트비아의 풍경과 민족 정체성, 일상의 서정을 담아내며 라트비아 국민 낭만주의 회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의 대표작들인 '파란 소녀'(1903), '봄을 기다리며'(1910) 등은 라트비아 문화의 아이콘이 되었으며, 오늘날까지 라트비아 국립미술관의 핵심 소장품으로 국민적 사랑을 받고 있다. 로젠탈은 단순한 화가를 넘어 근대 라트비아 문화 정체성 형성에 기여한 문화적 선구자로 기억된다.
보다 넓은 맥락에서 로젠탈은 발트 3국(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근대미술의 형성기를 대표하는 화가다. 당시 발트 지역은 러시아 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지만, 독자적인 민족 문화 부흥 운동이 활발했다. 로젠탈을 비롯한 발트 3국 화가들은 서유럽의 모더니즘을 수용하면서도 자신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표현하려 노력했다.
로젠탈은 동시대 핀란드의 악셀리 갈렌-칼렐라, 노르웨이의 에드바르 뭉크 등 북유럽 국민 낭만주의 화가들과 비교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주변부 민족의 화가로서 유럽 중심부의 모더니즘을 자국 문화와 접목시키며 독자적 예술 세계를 구축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앉아있는 누드'는 61×33cm라는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로젠탈 예술의 핵심 요소들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인상주의적 기법, 상징주의적 함의, 인간 육체에 대한 존중과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이 작품은 화려한 대작이 아닌 친밀한 습작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바로 그 친밀함 속에서 화가의 진솔한 예술적 탐구를 엿볼 수 있다.
세기가 바뀌는 시점에서 로젠탈은 새로운 시대의 가능성과 낙관을 화폭에 담아냈다. 꽃 향기에 몰입한 여성의 모습은 감각의 자유, 미적 경험의 순수성, 삶의 아름다움에 대한 긍정을 상징한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불과 몇 년 전, 벨 에포크의 마지막 순간에 그려진 이 작품은 곧 사라질 평화로운 시대에 대한 무의식적 기록이기도 하다.
로젠탈은 1916년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예술적 유산은 오늘날까지 라트비아 문화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앉아있는 누드'는 그의 방대한 작품 세계 중 하나의 작은 조각이지만, 그 안에는 한 시대의 미학과 한 민족의 문화적 각성, 그리고 인간 존재에 대한 보편적 성찰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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