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음반] 낙소스 'A-Z of Conductors' - 300명 지휘자의 예술세계를 집대성한 불멸의 아카이브!
이주상 기자
klifejourney2025@gmail.com | 2025-11-26 18:48:54
[K라이프저니 | 이여름 기자] 2007년 낙소스 레이블을 통해 세상에 공개된 'A-Z of Conductors' 음반은 20세기 클래식 음악사를 수놓은 거장 지휘자들의 예술세계를 한 곳에 집약한 기념비적 음반 세트다. 영국 셰필드 대학교 녹음 음악 역사 및 분석 센터(CHARM) 연구원이자 클래식 음반 평론가 데이비드 팻모어가 집필한 책자 'A-Z of Conductors'는 단순한 음반을 넘어 20세기 지휘 예술의 역사를 총망라한 백과사전적 저작이다.
이 음반 세트의 핵심은 98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책자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레오폴트 스토코프스키, 토마스 비첨, 빌렘 멩겔베르크,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레너드 번스타인 등 20세기를 대표하는 거장부터 잊혀진 마에스트로들까지 300명이 넘는 지휘자들의 전기가 사진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각 지휘자의 항목에는 전기적 사실뿐 아니라 경력 개요, 선별된 녹음 목록, 해석적 특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4장의 CD에는 48명의 지휘자가 남긴 역사적 녹음의 발췌본이 총 5시간 7분에 걸쳐 수록됐으며, 완전한 작품들은 별도의 무료 웹사이트를 통해 감상할 수 있다.
데이비드 팻모어는 'Classic Record Collector' 매거진의 정기 기고자로 활동하며 녹음 산업 역사 연구의 권위자로 인정받아 왔다. 그의 해설은 세 가지 명확한 기준에 따라 작성됐다.
첫째, 역사적 맥락이다. 각 지휘자가 활동하던 시대의 음악적 사조, 오케스트라 문화, 녹음 기술의 발전 과정을 함께 설명함으로써 그들의 예술을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예컨대 토스카니니의 NBC 교향악단 창설 배경에는 미국 RCA의 데이비드 사노프가 주도한 방송 산업의 확장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둘째, 연주 스타일의 객관적 분석이다. 팻모어는 특정 지휘자를 추앙하거나 폄하하지 않고, 템포 설정, 악보 해석의 충실도, 오케스트라 운용 방식 등을 구체적으로 기술한다. 그는 토스카니니가 47cm의 긴 지휘봉을 사용했으며 경제적인 지휘 동작으로 명쾌한 리듬과 강렬한 다이내믹을 구사했다는 점, 푸르트벵글러의 모호한 비팅이 오히려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자발적 호흡을 이끌어냈다는 점을 구분해 설명한다.
셋째, 녹음 유산의 평가다. 각 지휘자가 남긴 녹음 중 어떤 것이 역사적으로 중요하고 음악적으로 의미 있는지를 명시한다. 칼 리히터의 1958년 아르히프 레이블 '마태 수난곡' 녹음이 바로크 연주 관행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 안탈 도라티가 머큐리 레이블에 남긴 시카고 심포니와의 녹음들이 뛰어난 녹음 기술과 연주로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는 점 등을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이 음반 세트가 조명하는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20세기 전반을 양분한 두 거장 -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극명한 대조다.
토스카니니는 "악보대로 연주하라"는 엄격한 객관주의를 신봉했다. 심한 근시였던 그는 악보 전체를 암기했으며,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정확한 템포와 명쾌한 리듬으로 음악의 구조를 명징하게 드러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는 "칸타레!(노래하라)"를 외치며 모든 악기가 노래하듯 연주할 것을 요구했지만, 자의적 해석은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리허설에서는 불같은 성격을 드러내며 지휘봉을 부러뜨리고 악보를 찢어 단원들로부터 '토스카노노(No! No!를 외치는 토스카니니)'라는 별명을 얻었다.
반면 푸르트벵글러는 "연주는 재현이 아니라 재창조"라는 낭만주의적 신념을 견지했다. 음악을 "흐르는 강물"에 비유한 그는 모호한 지휘 동작으로 유명했으나, 바로 그 모호함 속에서 음악이 살아 숨 쉬었다. 단원들이 "지휘자를 보고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악장을 보고 연주했다"는 농담이 돌 정도였지만, 베를린 필과 빈 필로부터 전폭적 신뢰를 받았다.
바이올리니스트 나탄 밀스타인은 이렇게 회고했다. "토스카니니는 가톨릭적이고 객관적이었으며, 푸르트벵글러는 신교도적이고 낭만적이었다. 토스카니니는 지휘할 때 모든 세부 사항까지 구축하려 애썼고, 푸르트벵글러의 동작은 모호했지만 단원들은 어떻게든 알아차렸다."
이 음반 세트의 또 다른 의의는 토스카니니, 푸르트벵글러, 카라얀 같은 슈퍼스타 지휘자들만이 아니라 역사 속으로 사라진 '잊혀진 거장들'을 재조명한다는 점이다. 팻모어는 영국의 알버트 코츠, 퍼시 피트, 알릭 매클린 같은 전간기(兩大戰間期) 지휘자들이 왜 역사에서 잊혔는지를 분석한다.
그는 1931년 콜롬비아 그라모폰과 그라모폰 컴퍼니가 합병해 EMI를 창설한 과정에서 RCA의 데이비드 사노프가 주도한 독점적 홍보 전략이 토스카니니를 집중 조명하고 다른 지휘자들을 주변화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1930년대 NBC가 토스카니니를 대대적으로 마케팅하면서 다른 훌륭한 지휘자들의 녹음이 상대적으로 묻혀버린 것이다.
칼 리히터의 바흐 해석이 19세기 전통과 결별하고 더 작은 편성, 빠른 템포, 가볍고 활기찬 리듬을 도입해 바로크 음악 연주에 혁명을 가져왔다는 점, 레오폴트 스토코프스키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 이끌며 미국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에 기여한 점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A-Z of Conductors'는 20세기 녹음 역사의 초기부터 iPod 시대까지를 아우르는 포괄적 지휘 예술사다. 오케스트라 음악을 처음 접하는 입문자에게는 방대한 레퍼토리와 다양한 해석을 탐색할 수 있는 가이드북이 되고, 노련한 수집가에게는 잊혀진 명연주를 재발견하는 보물창고가 된다.
팻모어는 이후 낙소스를 통해 'A-Z of Singers'도 출간하며 성악 분야에서도 같은 작업을 이어갔다. 그의 작업은 단순한 음반 해설을 넘어, 20세기 클래식 음악 녹음 유산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보존하는 음악학적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토스카니니의 객관주의와 푸르트벵글러의 낭만주의, 카라얀의 완벽주의와 번스타인의 열정, 리히터의 고증적 접근과 스토코프스키의 대중적 감각까지 - 20세기 지휘 예술의 다채로운 스펙트럼이 이 980페이지 책자와 4장의 CD 속에 압축되어 있다. 클래식 음악 애호가라면 서재에 반드시 구비해야 할 불멸의 아카이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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