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음반] 15세기 모테트의 정수 '플로스 비르기눔', 600년 전 음악의 숨결 되살려
이주상 기자
klifejourney2025@gmail.com | 2025-11-25 13:47:36
[K라이프저니 | 이여름 기자] 독일 성악 앙상블 슈팀베르크(Stimmwerck)가 15세기 모테트와 칸초네를 집대성한 음반 '플로스 비르기눔(Flos virginum, 동정녀(처녀)들의 꽃)'을 CPO 레이블을 통해 발매했다. 이 음반은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넘어가는 과도기, 서양 다성음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시기의 종교 성악곡들을 담아냈다.
부르고뉴 악파에서 플랑드르 악파로, 음악사의 대전환기 15세기는 서양 음악사에서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중세 다성음악의 경직된 구조에서 벗어나 화성과 대위법이 정교해지고, 인본주의 정신이 종교음악에도 스며들기 시작한 시기다. 부르고뉴 공국의 궁정을 중심으로 활동한 작곡가들은 세속음악과 종교음악의 양식을 융합하며 새로운 표현의 지평을 열었다.
이 음반에는 기욤 뒤파이(Guillaume Dufay, 1397?-1474)를 필두로 요하네스 브라사르트(Johannes Brassart), 요하네스 마르티니(Johannes Martini), 요하네스 룰레(Johannes Roullet) 등 15세기 전반기 주요 작곡가들의 작품 16곡이 수록됐다. 특히 트렌트 코덱스(Trent Codices)와 니콜라우스 레오폴트 코덱스(Nikolaus Leopold Codex)에서 발굴한 익명 작곡가들의 작품까지 포함해, 당시 음악 문화의 폭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뒤파이는 15세기 최고의 작곡가로 평가받는 인물로, 이 음반에 수록된 '미사 S. Georgii(Missa S. Georgii)'는 그의 정교한 4성부 대위법과 화성적 풍요로움을 대표한다. 그는 영국 음악의 삼화음적 명료함과 대륙 전통의 복잡한 리듬을 결합해 르네상스 음악의 토대를 마련했다.
요하네스 브라사르트는 신성로마제국 궁정에서 활동한 작곡가로, '오 렉스 프리드리체(O rex Fridrice)'는 황제에게 바치는 모테트다.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이 작품은 당시 음악이 단순히 종교적 기능을 넘어 권력의 상징으로 기능했음을 보여준다.
익명 작곡가들의 작품은 민속적 선율과 전례 음악의 결합을 보여준다. '디에스 에스트 레티티에(Dies est letitie)'는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곡으로, 단순하면서도 경쾌한 리듬이 당시 민중의 신앙심을 반영한다.
슈팀베르크는 독일을 대표하는 고음악 성악 앙상블로, 이번 음반에서 카운터테너 프란츠 비츠툼(Franz Vitzthum)과 다비드 에를러(David Erler), 테너 클라우스 벤크(Klaus Wenk)와 게르하르트 횔츨레(Gerhard Holzle), 베이스바리톤 마르쿠스 슈미들(Marcus Schmidl)이 참여했다.
이들의 연주는 15세기 성악 양식의 핵심인 '순수한 음정'과 '투명한 음색'을 완벽하게 구현한다. 특히 카운터테너 두 명이 참여해 고음부의 층을 두텁게 쌓아올리며, 당시 소년 합창단이나 팔세토 가수들이 만들어냈을 음향을 재현했다.
비츠툼의 카운터테너는 천사적 순수함과 서정성을 동시에 지녔다. '오 베아타 인판티아(O beata infantia)'에서 그의 목소리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경외를 투명한 음색으로 전달한다. 에를러가 게스트로 참여한 트랙들에서는 두 카운터테너의 정교한 대위법적 대화가 돋보인다.
테너 벤크와 횔츨레는 중성부를 탄탄히 받치며 화성의 풍성함을 더한다. 15세기 다성음악에서 테너는 정선율(cantus firmus)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은 긴 음가를 유지하면서도 음악적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다.
베이스바리톤 슈미들은 저음부의 토대를 제공한다. '플로스 비르기눔(Flos virginum)'에서 그의 목소리는 마치 오르간의 페달음처럼 안정적이면서도 표현력이 풍부하다.
15세기는 백년전쟁, 흑사병의 여파, 교회 대분열 등으로 혼란스러웠지만, 동시에 인쇄술의 발명, 대항해시대의 시작 등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던 시기였다. 음악 역시 중세의 엄격함에서 벗어나 인간적 감정과 미적 추구가 중시되기 시작했다.
모테트는 원래 종교적 라틴어 가사를 사용하지만, 이 시기에는 세속적 주제나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들도 등장한다. '로마노룸 렉스(Romanorum rex)'처럼 황제를 찬양하는 곡이나, '라우스 티비(Laus tibi)'처럼 신학적 사변을 담은 곡까지, 모테트는 당시 지성인들의 사유와 권력 구조를 반영하는 매체였다.
칸초네는 세속 성악곡으로, 사랑과 자연을 노래한다. 이 음반에 포함된 익명의 칸초네들은 궁정 음악의 세련미와 민속 음악의 생동감이 결합된 독특한 매력을 지닌다.
2013년 9월과 2014년 5월 독일 아들러스베르크 수도원 교회(Klosterkirche Adlersberg)에서 녹음된 이 음반은 SACD 포맷으로 제작돼 멀티채널 서라운드를 지원한다. 수도원 교회의 긴 잔향이 15세기 다성음악의 음향적 이상을 재현하며, 각 성부의 분리도와 블렌딩이 최상급으로 구현됐다.
슈테판 레(Stephan Reh)의 음악 프로듀싱과 밸런스 엔지니어링은 각 성부가 독립적으로 들리면서도 하나의 유기적 전체를 이루도록 만들었다. 이는 15세기 다성음악의 본질인 '다양성 속의 통일'을 청각적으로 완벽히 구현한 것이다.
이 음반은 트렌트 코덱스라는 중요한 음악 사료를 기반으로 했다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크다. 트렌트 코덱스는 15세기 중반 남 티롤 지역에서 필사된 7권의 악보 모음집으로, 당시 다성음악 레퍼토리를 가장 포괄적으로 담고 있다. 슈팀베르크는 이 귀중한 자료를 현대의 청중에게 생생히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르네상스 초기 음악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이 음반은 필수적이다. 600년 전 작곡가들의 혁신적 실험과, 그것을 21세기에 되살린 연주자들의 예술적 열정이 만나 탄생한 걸작이다.
klifejourney2025@gmail.com
[ⓒ K라이프저니.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WEEKLY HOT
- 1[이 음반] 귄터 헤르비히의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 냉전시대 동독 클래식의 금자탑
- 2"정의의 아이콘 김도기로 돌아왔다"... 이제훈, '모범택시3'로 입증한 대체 불가 배우 파워
- 3[이 책] "역사는 과학이 될 수 있는가"... 피터 터친 '제국의 탄생', 수학으로 인류 문명 흥망성쇠 해독하다
- 4엔믹스 릴리, 블랙 레더 재킷으로 완성한 시크 공항 패션... "금발+올블랙 조합 완벽"
- 5[이 책] "청산되지 않은 역사, 오늘도 반복된다"... 정운현 『친일파의 한국 현대사』, 대한민국 권력구조의 민낯 파헤쳐
- 6[이 책] "인류 문명의 불평등은 어디서 비롯됐나"... 제러드 다이아몬드 '총, 균, 쇠', 역사학계 패러다임 전환 이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