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 광주 한 달 전, 사북에 묻힌 진실... 노동투쟁이 국가폭력으로 짓밟힌 현대사의 비극

이주상 기자

klifejourney2025@gmail.com | 2025-11-04 13:21:37

45년 만에 재조명되는 1980년 4월 사북 사건, 생존권 투쟁에서 유혈사태로 영화 '1980 사북' 포스터

[K라이프저니 | 이여름 기자] 1980년 4월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광주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기 한 달 전, 탄광촌 사북에서는 또 다른 비극이 펼쳐지고 있었다. 열악한 노동환경과 어용 노조에 맞선 광부들의 절규가 국가 폭력에 의해 짓밟혔던 '사북 사건'. 45년간 역사의 그늘에 묻혀있던 이 사건이 다큐멘터리 영화 '1980 사북'을 통해 재조명되고 있다.
 
사북 사건의 본질은 노동자들의 정당한 생존권 투쟁이었다. 1980년 4월 21일, 동원탄좌 사북광업소의 광부 3천여 명이 노조지부장 사퇴를 요구하며 항의 농성에 돌입했다. 부당한 임금체계, 사업주의 착복, 어용 노조와의 결탁 등 비인간적인 노동환경에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경찰 지프차가 농성 중인 광부들에게 돌진하면서 급격히 악화됐다. 경찰의 무리한 진압에 분노한 광부들은 사북지서를 파괴했고, 이에 경찰은 대규모 진압을 시도했다. 4월 22일, 사북으로 통하는 안경다리에서 광부들과 경찰 사이에 치열한 투석전이 벌어졌다. 경찰들을 몰아낸 광부들은 바리케이드를 치고 사북을 봉쇄했다.
 
상황이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계엄군의 공수부대 투입이 임박했다. 4월 23일 밤, 공수부대원들이 증산초등학교에서 대기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졌고, 김성배 강원도지사가 광부들과 협상에 나섰다. 극적인 타협 끝에 4월 24일 새벽 4시, 합의사항이 타결됐다. 정부는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는 거짓이었다. 5월 7일부터 광부와 주민 200여 명이 연행됐다. "움직이면 죽인다. 발포한다"는 협박 속에서 이들은 가혹한 고문과 폭력에 시달렸다. 성적 가혹행위도 서슴없이 자행됐다. 결국 28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사북 사건은 단순한 노동분쟁이 아니었다. 이는 1980년 대한민국에서 국가가 국민을 폭력으로 억눌렀던 국가 폭력의 원형이었다. 비상계엄 상황 속에서 계엄사령관은 체포, 구금, 언론, 집회, 결사에 대한 특별조치권을 행사할 수 있었고, 이러한 권한은 무소불위의 폭력으로 작동했다.

국가는 사건 관련자들에게 "고문받았다는 이야기를 어디 가서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린다"고 협박했다. 간첩, 빨갱이, 폭도라는 낙인이 찍힌 이들은 동료들에게도 외면당했다. 강요된 침묵이 45년간 이어졌다. 고문으로 노동력을 상실하고 가정이 파탄 나고 병들어 일찍 죽어간 이들의 목소리는 묻혀버렸다.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가 공권력의 고문과 가혹행위를 인정하고 국가 사과를 권고했다. 2015년 이후 이원갑, 강윤호 등 사건 관련자들이 재심을 통해 잇따라 무죄를 선고받으면서 사북 사건은 국가 폭력 사건이자 심각한 인권 침해 사건으로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박봉남 감독은 5년간 160회의 촬영과 100여 명의 인터뷰를 통해 사북 사건을 재구성했다. 그는 "폭동과 항쟁, 서로 다른 두 개의 시선이 존재한다. 모든 이야기를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객관적으로 드러내고자 한다"고 밝혔다.

사북 사건은 1979년 부마항쟁과 1980년 광주항쟁 사이,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만약 4월 25일 동틀 무렵 계엄군의 작전이 예정대로 진행됐다면 어떻게 됐을까. 광주보다 한 달 앞선 사북의 운명은 역사에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

2024년 12월 3일, 대한민국은 다시 비상계엄을 마주했다. 1980년의 계엄법이 여전히 개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국가가 필요에 따라 언제든 같은 방식으로 국민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사북 사건은 결코 과거가 아니다.

지난 10월 29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1980 사북'은 2024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한국경쟁 장편 대상과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 2025 EBS국제다큐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다.

다음은 사북 사건 주요 인물들이다. 

이원갑 - 동원탄좌 현장감독이자 광부 대표. 계엄군 투입이 임박한 상황에서 타협을 이끌어 더 큰 유혈사태를 막았으나, 약속이 뒤집히면서 연행되어 고문당한 뒤 군사재판에서 4년 실형을 선고받았다.

강윤호 - 공수부대 출신 광부. 무기고 파손 혐의로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하고 2년 실형을 선고받았다. 42년 만인 2022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으며 2024년 세상을 떠났다.

이명득 - 지장산사택 부인회장이자 광부의 아내. 집단폭행 가담 누명을 쓰고 체포되어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평생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 2019년 사망했다.

 다음은 사북 사건 연표.

1980년 4월 21일: 광부들 노조 사무실 집결, 항의 농성 / 경찰 지프차 뺑소니 사건 발생 / 광부들 사북지서 파괴
4월 22일: 안경다리 투석전 / 이덕수 순경 사망 / 광부들 사북 봉쇄 / 23시 계엄군 이동
4월 23일: 공수부대 증산초등학교 대기 / 김성배 도지사 협상 / 16시 계엄군 추가 배속, 19시 10분 이동 지시
4월 24일: 새벽 4시 합의사항 타결
5월 7일~: 광부 및 주민 200여 명 연행, 고문 / 28명 군사재판 유죄 판결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 고문 사실 인정, 국가 사과 권고
2015년 이후: 이원갑, 강윤호 등 재심을 통해 무죄 선고

사북 사건은 민초들의 가슴아픈 항쟁이다. 비록 국가권력에 처참히 짓밟혔지만, 정신은 살아남아 대한민국 민주주의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자양분이 되었다. 현재는 과거를 관통한다. 사북 사건을 잊어서는 안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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