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 천경자 화백의 마지막 대작 '환상여행', 미완으로 남은 회화 인생의 총체

이주상 기자

klifejourney2025@gmail.com | 2026-01-03 07:39:06

천경자의 환상여행(미완성). 이여름기자 klifejourney2025@gmail.com

[K라이프저니 | 이여름 기자] "작품이 완성되면 아마 대표작이 될 것"이라던 천경자 화백의 예언은 절반만 실현됐다. 1995년 제작된 '환상여행(미완성)'은 작가가 스스로 붓을 놓기 전 남긴 마지막 대작으로, 그의 예술 세계를 집약한 자전적 고백이다.

130×161.5cm 화폭에는 천경자 회화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전경에 펼쳐진 누드 여인들은 작가 자신을 투영한 분신이다. 주변을 감싸는 꽃, 개, 트럼프, 수양버들은 평생 천경자 작품에 등장한 대표 소재들이다. 후경의 거룻배에 탄 기타 치는 인물들은 1965년 작품 '초혼'에서 가져왔다. 30년 세월을 뛰어넘어 과거와 현재를 한 화면에 응축시킨 것이다.

화면 구성은 이중적 정서를 드러낸다. 거룻배의 인물들이 악기를 연주하며 거대한 물고기를 배치해 고혹적 암담함을 추억하는 동안, 전경의 누드 여인들은 암울하고 공허한 표정으로 관객을 응시한다. 회색빛 하늘과 어둠이 지배하는 화면 속에서 유일하게 생명력을 발산하는 것은 녹색 수양버들과 선명한 꽃들이다.

천경자의 환상여행(부분). 이여름기자 klifejourney2025@gmail.com

1924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난 천경자는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53년 뱀 35마리를 그린 '생태'로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1955년 대한미술협회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으며 입지를 굳혔고, 홍익대 동양화과 교수와 과장을 역임했다. 1972년에는 김기창, 박서보 등과 함께 베트남전 종군화가로 파견됐는데, 10명 중 유일한 여성이었다.

천경자 화풍의 핵심은 강렬한 채색과 환상적 구성이다. 수묵화가 주류였던 1950년대부터 과감하게 채색화를 고수했고, 추상화가 화단을 장악할 때도 구상을 포기하지 않았다. 꽃과 여인을 통해 한(恨), 꿈, 고독, 강인한 삶의 의지를 표현했으며, 세계 각국을 여행하며 이국적 풍물화를 남겼다. 당대 보수적 시대 분위기와 달리 애연가로 유명했고, 표범무늬 옷과 터번으로 패션 리더 역할도 했다.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미인도' 위작 논란은 그의 삶을 뒤흔들었다. 67세의 천경자는 "자기 그림도 몰라보는 화가"라는 수군거림 속에 절필을 선언했다. 하지만 4개월 만에 돌아와 카리브해, 멕시코 등으로 스케치 여행을 떠났고, 1995년 호암갤러리에서 15년 만에 대규모 전시를 열어 8만 명을 동원하는 대성공을 거뒀다. 

'환상여행'은 바로 이 전시를 위해 제작됐다. 천경자는 대구 회고전을 앞두고 이 작품에 대해 "작품이 완성되면 아마 대표작이 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하지만 작품은 끝내 미완으로 남았다. 역설적으로 이 미완성이야말로 천경자가 말하는 '미완성의 완성'이다. 여러 시절에 대한 향수, 젊은 날의 꿈과 환상, 고독, 한 등 천경자 내면의 모든 것을 담아낸 이 작품은 자신의 삶과 회화세계를 돌아보는 동시에 아우르는 환영으로 완결됐다.

1998년 천경자는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뉴욕으로 떠났다. 2003년 뇌출혈로 쓰러진 후 더 이상 붓을 들지 못했고, 2015년 8월 91세로 타계했다. 현재 '환상여행'을 포함한 그의 작품들은 서울시립미술관 천경자실에 상설 전시되고 있다. 

경매 시장에서 천경자 작품은 호당 4천만 원대를 호가하며, 2009년 '초원Ⅱ'는 12억 원에 낙찰돼 최고가를 기록했다. 소설가 박경리는 '고약한 예술가'라는 애칭으로 그를 불렀다. '환상여행'은 그 고약하고 천형적인 예술가가 미완으로 남긴, 가장 완전한 자화상이다. 

천경자의 환상여행(부분). 이여름기자 klifejourney202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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