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리] 마드리갈과 함께 순례의 시간을 건반 위에 새기다 — 라그나 시르머의 리스트 '순례의 해' 전집
고요비 기자
klifejourney2025@gmail.com | 2026-09-02 03:24:25
[K라이프저니|고요비 기자] 프란츠 리스트의 피아노 독주곡집 '순례의 해(Années de Pèlerinage)' 전곡을 담은 3장의 CD가 눈길을 끈다.
독일 피아니스트 라그나 시르머(Ragna Schirmer)가 연주하고, 라이프치히의 보컬 앙상블 아마르코드(amarcord)가 참여한 이 음반은 2011년 리스트 탄생 200주년을 맞아 베를린 클래식스(Berlin Classics) 레이블을 통해 발매됐다.
커버에는 낡은 벽화 아치 앞에 선 시르머의 사진이 실렸는데, 이는 이 음반이 단순한 연주 기록이 아니라 '여행'과 '순례'라는 리스트 원작의 정신을 시각적으로도 계승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스위스에서 이탈리아까지, 건반 위의 여정
'순례의 해'는 '제1년: 스위스', '제2년: 이탈리아'(부록 '베네치아와 나폴리' 포함), '제3년'으로 구성된 3부작으로, 리스트가 연인 마리 다구 백작부인과 함께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얻은 인상을 음악으로 옮긴 작품이다. 이 곡집의 제목은 괴테의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에서 따온 것으로, 리스트는 각 곡 앞에 실러, 바이런, 세낭쿠르 등 낭만주의 문학가들의 문장을 붙여 음악과 문학을 넘나드는 표제음악의 정수를 보여줬다.
특히 제1년 '스위스'는 자연 풍광에 대한 감흥을, 제2년 '이탈리아'는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의 회화, 단테의 문학에서 받은 영감을 담고 있으며, 초기 두 권이 청년기의 서정과 기교를 담았다면 훗날 완성된 제3년은 한층 절제되고 실험적인 화성어법으로 리스트 후기 양식의 특징을 드러낸다. 음악학계에서는 이 전집을 리스트의 작곡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대표작이자 그의 예술관을 집대성한 작품으로 평가한다.
리스트, 낭만주의 피아노 음악의 정점에 서다
1811년 헝가리에서 태어난 프란츠 리스트는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연주에서 영감을 받아 피아노의 기교적 가능성을 극한까지 확장시킨 인물로, 표제음악과 교향시라는 장르를 개척하며 낭만주의 음악사에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겼다.
그의 음악은 초절기교의 화려함으로만 기억되기 쉽지만, '순례의 해'는 오히려 그 반대편 — 사색적이고 내면적인 리스트의 얼굴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꼽힌다. 후년으로 갈수록 짙어지는 종교적 명상과 죽음에 대한 성찰은 이후 드뷔시와 라벨 등 인상주의 작곡가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받는다.
르네상스 마드리갈의 두 거장, 제수알도와 마렌치오
이번 음반이 특별한 또 다른 이유는 리스트의 피아노곡 사이사이에 이탈리아 르네상스 마드리갈이 배치돼 있다는 점이다. 카를로 제수알도(1566~1613)는 극단적인 반음계 화성과 격렬한 감정 표현으로 당대는 물론 20세기 스트라빈스키에게까지 재조명받은 인물로, 아내와 그 정부를 살해한 사건으로도 잘 알려진 파란만장한 생애의 소유자다.
그의 마드리갈 '나는 침묵하리(Io tacerò)'나 종교적 참회곡 '나는 매일 죄를 짓나이다(Peccantem me quotidie)' 등은 이번 음반에서 아마르코드의 목소리로 재현됐다.
루카 마렌치오(1553년경~1599)는 16세기 이탈리아 마드리갈의 대가로, 서정적이고 우아한 선율 처리로 이후 몬테베르디를 비롯한 후대 작곡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작곡가다. 리스트가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받았던 예술적 영감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바로 이 르네상스 마드리갈 전통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두 시대를 잇는 프로그램 구성은 단순한 곁들이기가 아니라 음반 전체의 개념을 완성하는 핵심 장치로 기능한다.
시르머의 개인적 순례, 그리고 아마르코드의 목소리
바흐 국제 콩쿠르 2회 우승 경력의 피아니스트 라그나 시르머는 이번 프로젝트에서 단순한 연주자를 넘어 '리스트의 발자취를 직접 따라간 순례자'를 자처했다. 그는 음반 부클릿에 자신만의 여행 일기를 함께 실어, 스위스와 이탈리아 곳곳을 다니며 받은 감상을 리스너들과 공유했다.
한 평론에서는 이러한 접근에 대해 리스트가 머릿속에 그렸던 풍부한 이미지를 새롭게 되살려내며, 음반 전체를 마치 하나의 여행 일기처럼 몰입해서 들을 수 있게 만들었다고 평했다.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합창단 출신 멤버들이 주축이 된 남성 보컬 앙상블 아마르코드는 균질하고 정교한 화음, 스타일에 대한 정확한 이해로 정평이 난 단체로, 유럽 클래식 비평계가 수여하는 국제클래식음악상(ICMA)과 독일의 권위 있는 음반상 에코 클라식(ECHO Klassik) 등을 여러 차례 수상한 바 있다.
이들이 들려주는 르네상스 마드리갈의 순도 높은 화성은 시르머의 낭만주의적 해석과 대비를 이루면서도, 리스트가 추구했던 시간을 초월한 예술적 연결고리를 설득력 있게 완성해낸다.
시대를 넘나드는 프로그래밍의 미덕
이 음반의 또 다른 가치는 프로그래밍 자체에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낭만주의 거장의 사색적인 순례기를 르네상스 마드리갈이라는 시간을 거스른 렌즈로 비춰봄으로써, 청자는 리스트가 이탈리아에서 마주했을 법한 정서적 원천을 함께 체험하게 된다.
한 장의 음반 안에서 400년의 시간차를 넘나드는 이 대담한 구성은, 리스트 탄생 200주년이라는 기념비적 해에 발매된 여러 전집 음반들 가운데서도 독자적인 위치를 점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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