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음반] 전설의 순간을 되살린 음반, 푸르트뱅글러의 바그너!
이주상 기자
klifejourney2025@gmail.com | 2025-12-19 01:59:59
[K라이프저니 | 이여름 기자] 사진 속 CD는 클래식 음반 수집가들 사이에서 보물로 통하는 Testament 레이블의 역사적 음반이다. 빌헬름 푸르트뱅글러(1886~1954)가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바그너 작품 녹음을 1998년 디지털 리마스터링해 발매한 것으로, 20세기 지휘 예술의 정점을 보여주는 귀중한 음원이다.
이 음반의 특별한 가치는 수록곡 구성에 있다. '로엔그린' 1막 전주곡(9분 12초)과 '탄호이저' 서곡(13분 51초)은 모두 'Previously unpublished'라고 표기된 미공개 녹음이다. 당시 EMI가 녹음했지만 발매하지 않았던 음원을 Testament 레이블이 발굴해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지크프리트 목가', '신들의 황혼' 중 '지크프리트의 라인 여행'(11분 36초), '지크프리트의 장송 행진곡'(8분 25초) 등 모두 5개 트랙이 수록돼 있다. 녹음 연도는 1947년, 1949년, 1950년에 걸쳐 있으며, 비엔나 뮤지크페라인 잘(Musikvereinsaal)과 루체른에서 진행됐다.
Testament는 영국에 본사를 둔 클래식 음반 전문 레이블이다. EMI, 도이치 그라모폰 등 메이저 레이블의 아카이브와 각국 방송국의 자료를 발굴해 복각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1950~60년대 EMI의 황금기 녹음을 재발매하는 데 주력했으며,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솔로몬 등 전설적 음악가들의 미공개 방송 실황을 소개했다.
푸르트뱅글러는 베토벤과 함께 바그너를 가장 자신 있게 연주한 지휘자였다. 그의 바그너 해석은 단순히 악보를 재현하는 것을 넘어 음악 속에 내재된 철학과 드라마를 극대화했다.
푸르트뱅글러 자신은 "바그너가 해석적 접근법을 통해 새로운 세대의 지휘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말했다. 바그너의 '악극(Gesamtkunstwerk)' 개념, 즉 시, 음악, 드라마, 시각 요소를 하나로 통합하는 이상은 푸르트뱅글러의 지휘 철학과 완벽히 맞아떨어졌다.
그의 바그너 해석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아고긱(Agogic)', 즉 템포의 미묘한 변화다. 푸르트뱅글러는 칼같이 맞아떨어지는 정확성보다 음악의 흐름과 자연스러움을 중시했다. 템포를 유동적으로 조절하며 폭풍우가 몰아치는 듯한 효과를 만들어냈다.
특히 '트리스탄과 이졸데' 중 '사랑의 죽음'에서 그는 무한으로 향하는 도취적 상태의 극한을 들려줬다. 음악의 휴지부조차 음악적 잔영이 지속되도록 만들었다. 침묵을 통해 긴장을 유지하고, 청중을 침묵 속에 빠뜨렸다가 꺼내는 마술사였다.
푸르트뱅글러는 관현악 사운드를 근저에서부터 위로 끌어올리는 식으로 구축했다. 더블 베이스와 첼로의 저현을 단단한 화성적 토대로 삼아, 다양한 비브라토로 풍부한 현의 소노리티를 덧댔다. 바그너의 유도동기(Leitmotiv)를 극적으로 부각시키며, 각 모티프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도록 했다.
이 음반에서 대부분 트랙을 연주한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푸르트뱅글러의 이상적인 파트너였다. 푸르트뱅글러는 1927년부터 비엔나 필 상임 지휘자를 역임했고, 1930년 사임 후에도 객원으로 꾸준히 협연했다.
비엔나 필의 매력은 '마법 같은 음색(immaculate magical sound)'에 있다. 특히 현악 섹션의 풍부한 울림과 목관의 부드러움은 바그너의 관현악법을 구현하는 데 이상적이었다. 비엔나 뮤지크페라인 잘의 잔향도 녹음에 따뜻함을 더했다.
1949년 4월의 녹음 세션은 특히 중요하다. 4월 1일과 4일에 '탄호이저' 서곡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전주곡 등을 녹음했고, 3월 30~31일에는 '발퀴레의 기행', 2월에는 '지크프리트의 라인 여행'을 녹음했다. 1950년 2월 1일에는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3막 전주곡을, 1월 31일에는 '지크프리트의 장송 행진곡'을 녹음했다.
이 시기는 전쟁이 끝나고 푸르트뱅글러가 포디움에 복귀한 직후였다. 1945년 1월 스위스로 망명했던 그는 1947년에야 연주 활동을 재개했다. 비엔나 필과의 녹음은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음악적 정체성을 되찾는 과정이었다.
'로엔그린' 1막 전주곡은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함께 1947년에 녹음했다. 루체른 페스티벌은 스위스의 대표적 음악제로, 전쟁 중에도 중립국 스위스에서 계속 개최됐다.
푸르트뱅글러는 1947년 루체른 페스티벌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인과 함께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해 큰 감동을 주었다. 이 녹음은 지금도 명연으로 꼽힌다.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는 유럽 각지의 정상급 연주자들이 모여 만든 축제 오케스트라다. 고정된 상임 오케스트라가 아니었지만, 바로 그 점이 장점이었다. 최고 수준의 연주자들이 푸르트뱅글러의 지휘봉 아래 모여 짧은 시간에 집중적으로 리허설하고 연주했다.
'로엔그린' 전주곡의 9분 12초는 일반적인 연주 시간보다 다소 긴 편이다. 푸르트뱅글러 특유의 느린 템포와 깊이 있는 해석이 반영된 결과다. 바그너가 의도한 신비롭고 초월적인 분위기를 극대화했다.
1947~1950년은 아직 모노럴 녹음 시대였다. 스테레오 녹음은 1950년대 중반에야 상용화됐다. 하지만 당시 EMI의 녹음 기술은 이미 상당한 수준이었다.
78rpm SP 음반 시대에서 LP 시대로 전환하는 과도기였지만, EMI는 이미 장시간 녹음 기술을 확보하고 있었다. 비엔나 뮤지크페라인 잘의 우수한 음향과 EMI의 녹음 기술이 결합해 당시로서는 최상급의 음질을 구현했다.
Testament가 1998년에 진행한 디지털 리마스터링은 원본 마스터 테이프의 음질을 최대한 살리는 데 초점을 맞췄다. Testament는 "깨끗하고 투명하지만 원본의 따뜻함을 유지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부 음반 평론가들은 Testament의 리마스터링이 "다소 건조하고 분석적"이라고 지적하기도 하지만, 70년 전 녹음의 역사적 가치와 음악적 내용을 고려하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음질이다. 특히 오리지널 78rpm SP 음반이 희귀하고 고가인 상황에서, Testament의 복각은 많은 애호가들에게 접근 가능한 선택지를 제공했다.
푸르트뱅글러와 나치의 관계는 여전히 논쟁거리다. 그는 나치 당원이 아니었지만, 전쟁 중에도 독일에 남아 베를린 필을 지휘했다. 나치는 그를 독일 음악의 상징으로 이용하려 했고, 푸르트뱅글러는 유대인 음악가들을 돕는 한편 나치와 거리를 두려 애썼다.
1945년 스위스로 망명한 후, 그는 비나치화 재판을 받았다. 재판장 알렉스 포겔은 "푸르트뱅글러는 어떤 나치 조직의 회원도 아니었으며, 인종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노력했다"고 밝혔다.
이 음반의 녹음 시기인 1947~1950년은 푸르트뱅글러가 전쟁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음악적 재기를 이루던 시기다. 비엔나 필과의 바그너 녹음은 그 여정의 중요한 이정표였다.
1950년대 초 푸르트뱅글러는 라 스칼라에서 바그너 '반지' 전곡을 지휘했고, 1953년에는 로마 방송국에서 '반지' 전곡을 녹음했다. 1954년 9월에는 '발퀴레'를 비엔나 필과 스튜디오 녹음하기 시작했지만, 같은 해 11월 30일 폐렴으로 타계하면서 완성하지 못했다. 향년 68세였다.
푸르트뱅글러의 바그너 해석은 후대 지휘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라이벌이었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푸르트뱅글러의 깊이 있는 해석을 의식하면서도 자신만의 명료한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칼 뵘, 게오르크 솔티, 다니엘 바렌보임 등 후배 바그너 지휘자들은 모두 푸르트뱅글러의 녹음을 연구했다. 특히 템포 설정, 프레이징, 오케스트라 밸런스 조절에서 푸르트뱅글러의 영향이 감지된다.
현대의 지휘자들도 푸르트뱅글러의 접근법을 참조한다. 크리스티안 틸레만, 필립 조르당 등은 "푸르트뱅글러의 녹음은 여전히 바그너 해석의 기준"이라고 말한다.
푸르트뱅글러의 가장 큰 유산은 '주관적 해석'의 정당성을 확립한 것이다. 그는 악보에 충실하면서도 지휘자의 철학적 해석을 강조했다. 이는 당시 객관적 재현을 중시하던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접근법과 대비됐다.
음악학자들은 푸르트뱅글러를 "음악을 근저에서부터 끌어올리는 지휘자"라고 평가한다. 그의 지휘는 단순히 박자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의 내면에서 생명력을 끌어내는 행위였다.
CD에 담긴 녹음들은 70년 이상 전의 것이지만, 그 음악적 가치는 시간이 지나도 바래지 않는다. 오히려 역사적 거리가 멀어질수록 그 의미가 더욱 선명해진다.
푸르트뱅글러의 바그너는 단순한 음악 재현이 아니라, 한 인간의 철학적 성찰이자 전쟁과 고통을 겪은 세대의 증언이다. '신들의 황혼' 중 '지크프리트의 장송 행진곡'을 들으면, 단순히 영웅의 죽음이 아니라 한 시대의 종말을 목격하는 듯하다.
Testament 레이블의 복각 덕분에, 이 귀중한 녹음들은 새로운 세대의 음악 애호가들에게 전해졌다. CD라는 매체는 이미 스트리밍 시대에 구식이 되었지만, 이런 역사적 음반은 여전히 물리적 매체로 소장할 가치가 있다.
클래식 음반 시장에서 이 음반은 여전히 수집가들이 찾는 아이템이다. 미공개 녹음 2곡이 포함돼 있고, Testament의 리마스터링 품질이 우수하며, 무엇보다 20세기 최고의 지휘자가 최고의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표지에 새겨진 'TESTAMENT'라는 단어는 '유언', '증언'이라는 뜻이다. 푸르트뱅글러가 남긴 음악적 유언, 그가 증언한 바그너의 세계. 그것이 바로 이 음반에 담긴 진정한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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