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문화회관 세종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르네상스에서 인상주의까지: 샌디에이고 미술관 특별전'에 전시된 엘 그레코의 '참화하는 성 베드로'(부분). 전시회는 11월 5일부터 2026년 2월 22일까지 열린다. 이여름기자 klifejourney2025@gmail.com
[K라이프저니 | 이여름 기자] 샌디에이고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의 '참회하는 성 베드로(The Penitent Saint Peter)'는 스페인 황금기 예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종교적 주제를 통해 인간 내면의 깊은 영적 갈등을 표현한 매너리즘 회화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신약성서에 나오는 사도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세 번 부인한 후 깊은 회개에 빠진 순간을 담고 있다. 황금빛 망토와 푸른색 옷을 걸친 베드로는 눈물 어린 눈으로 하늘을 응시하며, 한 손에는 천국의 열쇠를 쥐고 있다. 이는 예수로부터 받은 천국의 문지기라는 사명과 자신의 나약함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인간적 고뇌를 상징한다.
화면 왼쪽 중간 부분에는 새벽의 동트는 모습과 함께 천사의 모습이 희미하게 그려져 있다. 이는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라는 예수의 예언을 상기시키는 장치다. 어두운 배경과 극적인 명암 대비는 베드로의 내적 고통을 더욱 강조한다.
그리스 크레타 섬 출신으로 이탈리아를 거쳐 스페인 톨레도에 정착한 엘 그레코는 비잔틴 이콘화, 베네치아파의 색채, 매너리즘의 형태 왜곡을 독자적으로 융합한 화가다. 이 작품에서도 그의 특징적인 화법이 두드러진다.
인체는 실제보다 길쭉하게 늘어나 있고, 색채는 현실을 초월한 신비로운 빛을 발한다. 황금색과 청색의 강렬한 대비는 지상과 천상, 죄와 구원의 이중성을 시각화한다. 붓질은 자유롭고 역동적이며, 윤곽선은 흐릿하게 처리되어 마치 영적 환시를 보는 듯한 효과를 자아낸다.
엘 그레코가 활동한 16세기 후반 스페인은 반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의 중심지였다. 가톨릭교회는 프로테스탄트의 도전에 맞서 신앙의 정서적, 신비적 측면을 강조했고, 예술은 이러한 종교적 열정을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참회하는 성 베드로'는 단순한 성인 초상화를 넘어, 죄를 깨닫고 진정으로 회개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는 당시 가톨릭교회가 강조하던 참회성사의 중요성과도 맥을 같이한다. 엘 그레코는 종교적 교리를 추상적으로 설교하는 대신, 베드로라는 구체적 인물의 심리적 위기를 통해 보편적인 인간의 약함과 구원의 가능성을 동시에 제시했다.
엘 그레코는 생전에는 톨레도 지역에서만 알려진 화가였으나, 19세기 말 인상주의와 표현주의 화가들에 의해 재발견되었다. 그의 과감한 색채 사용, 형태의 왜곡, 주관적 감정 표현은 20세기 현대미술의 선구로 평가받는다.
샌디에이고 미술관의 이 작품은 엘 그레코가 말년에 반복적으로 다룬 주제 중 하나로, 그의 성숙한 예술세계를 보여준다. 미술사학자들은 엘 그레코가 '참회하는 성 베드로'를 여러 차례 그린 것은 단순한 주문 제작이 아니라, 신앙과 예술에 대한 자신의 깊은 성찰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한다.
이 작품의 진정한 가치는 종교화라는 형식을 빌려 인간 존재의 보편적 딜레마를 포착했다는 점에 있다. 약속과 배신, 죄책감과 용서,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흔들리는 베드로의 모습은 시대와 신앙을 초월해 모든 인간이 겪는 도덕적 갈등을 대변한다.
엘 그레코는 단순히 성서의 한 장면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극적인 구도와 초자연적 색채, 왜곡된 형태를 통해 영혼의 고뇌를 가시화했다. 이는 예술이 물질적 현실을 재현하는 것을 넘어 보이지 않는 내면세계를 표현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샌디에이고 미술관의 '참회하는 성 베드로'는 그러한 예술정신의 빛나는 증거로, 오늘날까지 관람객들에게 깊은 감동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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