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라이프저니|고요비 기자] 레이블 낙소스(Naxos)가 3장짜리 CD로 재발매한 보리스 랴토신스키(Boris Lyatoshynsky, 1895~1968)의 교향곡 전집은 20세기 우크라이나 음악사를 통째로 담아낸 기록물이다.
앨범에는 교향곡 1번부터 5번까지 다섯 곡 전곡과 함께, 폴란드 시인 아담 미츠키에비치의 시를 소재로 한 교향적 발라드 '그라지나(Grazhyna)'가 함께 수록됐다. 연주는 우크라이나 국립 심포니 오케스트라(당시 명칭 우크라이나 국립 교향악단, Ukrainian State Symphony Orchestra)가 맡았고, 지휘는 테오도르 쿠차르(Theodore Kuchar)가 맡았다.
왜 이 음반이 중요한가
이 전집이 갖는 가장 큰 가치는 '완결성'에 있다. 랴토신스키의 다섯 교향곡은 서로 다른 시대, 서로 다른 정치적 압력 속에서 쓰였다. 낭만적 색채가 짙은 1번(1917~19년)부터 소비에트 검열과 정면으로 맞닥뜨렸던 2번과 3번, 그리고 후기 양식이 완성된 4번과 5번(1960년대)까지, 다섯 작품을 한 지휘자·한 오케스트라의 일관된 해석으로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세트는 랴토신스키 교향곡 담론의 기준점 역할을 해왔다. 실제로 이 시리즈 중 교향곡 2번과 3번을 담은 녹음은 1994년 호주방송공사(ABC)로부터 '올해의 국제 녹음'으로 선정된 바 있으며, 이는 서방 음악계가 랴토신스키라는 이름을 본격적으로 재발견하는 계기가 됐다.
소비에트 붕괴 직후, 폐허 위에서 완성한 연주
이 녹음은 1993~94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된 지 불과 2~3년 만에 키이우에서 이뤄졌다. 당시 우크라이나 국립 교향악단은 음악 자재조차 넉넉지 않은 상황이었고, 쿠차르는 미국에서 악보와 연주 용품을 직접 가져오기도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 척박한 여건 속에서도 쿠차르와 악단은 1994년부터 2004년 사이 낙소스와 마르코 폴로 레이블에서 80여 장에 달하는 음반을 쏟아내며 옛 소련권 오케스트라 중 가장 많이 녹음된 악단으로 자리매김했다. 이 음반 자켓에 인용된 평단 '팡파르(Fanfare)'의 평가, 즉 쿠차르가 "완벽한 자격을 갖춘 지휘자"이며 오케스트라와 "더할 나위 없이 하나가 된" 연주를 들려준다는 언급은 이러한 배경을 압축한다.
쿠차르는 이후에도 랴토신스키의 동시대 후배 작곡가인 예우헨 스탄코비치의 교향곡 전곡을 같은 악단과 완성했고, 이후 리비우 국립 필하모닉 등 우크라이나를 대표하는 세 개 오케스트라에서 모두 상임 지휘자를 지낸 유일한 지휘자로 남아 있다. 그의 커리어 전체가 곧 랴토신스키를 비롯한 우크라이나 관현악 유산을 세계에 알리는 작업과 궤를 같이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스크랴빈에서 우크라이나 민요까지
랴토신스키는 흔히 '우크라이나 근대음악의 아버지'로 불린다. 키이우 음악원에서 글리에르를 사사했고, 초기에는 보로딘, 글리에르, 차이콥스키로 대표되는 러시아 낭만주의의 자장 안에 있었다. 그러나 이후 그는 스크랴빈의 격정적 화성어법에 깊이 매료되면서 러시아적 모델에서 벗어나, 우크라이나 민요와 선율을 현대적 화성·형식과 결합하는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그의 음악적 유산은 제자들을 통해서도 이어진다. 훗날 우크라이나 아방가르드를 대표하게 되는 발렌틴 실베스트로프, 그리고 현대 우크라이나 관현악의 대표주자인 예우헨 스탄코비치가 모두 키이우 음악원에서 그에게 작곡을 배웠다. 이런 점에서 랴토신스키는 단순히 한 시대의 작곡가가 아니라, 소비에트 체제 아래서도 우크라이나적 정체성을 다음 세대로 잇는 통로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된다.
검열이 지운 부제, "평화가 전쟁을 이긴다"
이 음반에서 가장 극적인 사연을 품은 곡은 교향곡 3번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인 1948년부터 작곡에 착수해 1951년 완성한 이 곡은 원래 마지막 악장에 "평화가 전쟁을 이긴다(Peace will defeat war)"라는 부제를 달고 있었다. 1951년 10월 키이우에서 나탄 라흘린이 지휘한 초연은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소비에트 당국은 이 곡을 이념적으로 문제 삼았다. 결국 랴토신스키는 곡을 다시 연주하기 위해 마지막 악장을 대폭 개작하고 부제까지 삭제해야 했으며, 개정판은 1955년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야 초연됐다. 이 음반에는 그 개정된 최종판이 수록돼 있다.
함께 실린 교향적 발라드 '그라지나'역시 사연이 깊다. 1955년, 폴란드 시인 아담 미츠키에비치 사후 100주년을 기념해 작곡된 이 곡은, 튜턴 기사단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리투아니아의 여성 영주 '그라지나'를 노래한 미츠키에비치의 서사시를 관현악으로 옮긴 작품이다. 저항과 희생이라는 주제 자체가 전쟁 직후 소비에트 체제 아래 창작 활동을 이어가야 했던 랴토신스키 자신의 처지와 묘하게 겹쳐진다.
침묵을 뚫고 나온 선율이 말하려 했던 것
교향곡 1번이 보로딘과 차이콥스키의 후예다운 서정으로 청년기의 낭만을 노래한다면, 2번과 3번은 전쟁과 검열이라는 현실과 정면으로 맞선 음악이다. 특히 3번은 원래 부제가 말해주듯 폐허가 된 세계에서 평화에 대한 갈망을 격렬한 관현악법으로 토해내려 한 작품이었고, 그 갈망이 정치적으로 '지나치게 솔직했다'는 이유로 검열됐다는 사실 자체가 이 곡이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를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4번과 5번 '슬라브적(Slavonic)'에 이르러서는 우크라이나 민요적 색채와 현대적 관현악 어법이 한층 정련된 형태로 융합되며, 개인의 서정을 넘어 민족적 정체성을 향한 좀 더 원숙한 시선을 드러낸다.
결국 이 다섯 교향곡을 관통하는 것은 하나의 질문이다. 강대국의 이념적 통제 아래서도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민요로 노래하려 한 한 작곡가의 의지. 이 음반이 오늘날 다시 주목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쟁으로 얼룩진 우크라이나의 현재와 겹쳐 들을 때, 랴토신스키가 70여 년 전에 지우려 했던 그 부제 "평화가 전쟁을 이긴다"는 여전히, 어쩌면 지금 더 절실하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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