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라이프저니|글·사진 이주상 기자] 25일 열린 영화 ‘가능한 사랑’ 제작보고회에서 이창동 감독은 스스로 "영화를 쉽게 찍지 못하는 감독"이라고 말한다.
시나리오를 써 놓고도 좀처럼 촬영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그는 영화를 시작하기 전 반드시 세 가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고 밝혔다. "이 영화, 이 이야기가 나한테 의미가 있느냐", "이 영화가 관객한테 의미가 있느냐", 그리고 "내가 하려고 하는 이 영화가 영화적으로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이 세 가지를 납득하지 못하면 시나리오를 다 쓰고도 결국 접었다는 것이 그의 고백이다. '가능한 사랑' 역시 그에게는 "굉장히 오래된 프로젝트"였다.
접어두었던 이야기, 시대가 다시 열어준 문
이야기의 시작은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의 한 대기업에서 벌어진 대규모 정리해고와 파업, 그리고 그 파업이 공권력에 의해 강제 진압된 사건이 한국 사회를 크게 흔들었던 그때, 이창동 감독은 이를 영화로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멈춰 섰다.
그는 "파업 과정이나 노동자들의 저항이 어떻게 파괴되고 진압됐는지를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다룬 다큐멘터리도 있는데, 내가 이걸 다시 극영화로 만드는 게 맞는 건지, 심지어는 극적으로 드라마를 만드는 게 윤리적인 건지라는 생각까지 들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시간은 그를 다시 이 이야기 앞으로 데려다 놓았다. 그는 "노동 문제는 점점 한국인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의 삶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됐고, 노동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사라져 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며 "이 이야기를 지금 해야 되지 않느냐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고 말했다. 이때 다큐멘터리 감독의 이야기와 결합해야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노동자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영화 만드는 사람의 이야기가 함께 결합이 되면서 이게 제 이야기가 됐다"고 전했다.
이날 제작보고회에서도 그는 같은 맥락에서 이 사건을 특정 기업의 일로 좁혀 읽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그는 "노동자가 구조조정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앞으로 피할 수 없는 사태라고 생각했다"며 "사람들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느냐에 따라 자기 정체성을 갖게 되는데, 이것이 그 정체성까지도 바꿀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이어 "시간이 지나며 기술과 함께 노동 자체가 소멸돼 가는 시대가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문제를 이야기해야만 하는 필연성이 오히려 더 강해졌다"고 덧붙였다.
"삶을 지탱하는 건 결국 사람"…노동에서 사랑으로
그렇다면 왜 노동의 이야기가 사랑의 이야기로 도착했을까. 이창동 감독은 "삶을 지배하는 힘이 점점 강해질 때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고 되물으며 "이럴 때일수록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것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그는 "그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일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이며, 그 본질은 사랑일 것"이라며 "앞으로도 우리의 삶을 이어 나가게 하는 것은 사람과의 관계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노동이나 자본, 혹은 그 어떤 거대한 힘이 우리의 삶을 규정하려 하더라도, 인간은 끝내 자유를 향해 나아가려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고 믿는다"며 "저는 그 마음, 어쩌면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는 그 욕망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나아가 우리가 살아가며 만나게 되는 사랑, 그리고 결국 우리가 누군가에게 건네야 하는 사랑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연출 의도를 묻는 질문에 대한 그의 답도 확연했다. "우리의 노동 문제든, 노동과 자본의 문제든, 우리 인간의 삶이 크게 변화하고 바뀌고 고통을 겪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하고 절망하기도 하지만, 그 삶의 구조가 어떻게 바뀌든지 인간이 그걸 넘어설 수 있는 건 우리 마음속에 있는 '자유'에 대한 생각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이어 "자본이 어떤 식으로 우리를 규정하고 우리 삶의 여러 조건들을 박탈하더라도, 우리 개개인은 자신만의 자유로움으로 그걸 이겨 나갈 수 있다는 것, 자기만의 자유로움은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을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싶었다"며 "한 가지 분명하게 받아들여졌으면 하는 것이 있다면 '자유'"라고 못박았다.
역설의 제목, "가능한지, 가능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능한 사랑'이라는 제목 자체도 이 철학의 연장선에 있다. 이창동 감독은 "사랑 이야기라고 하면 사실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전제를 안고 받아들이게 되는데, 손쉽게 이뤄지고 모두에게 축복받는 사랑이라면 굳이 서사로 만들어져 관객에게 전달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그는 "오히려 가능한 사랑이라고 했다"며 "사실 어떤 사랑이 가능한지, 사랑을 가능하게 하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런 질문을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가능한 사랑'을 사랑에 관한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남녀 간의 사랑뿐만 아니고 사람이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사랑, 또는 해야만 하는 사랑에 관한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고 밝혔다.
현실 그 자체를 담아낸 프로덕션, "우리가 실제 눈으로 보는 것처럼"
이창동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 무엇보다 현실감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촬영에 앞서 김지용 촬영감독, 장민우 미술감독, 정재일 음악감독을 비롯한 모든 스태프에게 작품의 출발점과 연출 의도를 전했고, 이는 프로덕션 전반을 관통하는 기준이 됐다.
그는 "꾸며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 눈으로 보는 것처럼 느껴졌으면 좋겠다"는 의도를 전했고, 이에 맞춰 조명 역시 '드러나지 않음'을 목표로 설계됐다. 음악에 대해서는 "'가능한 사랑'의 음악은 아름다우면서도, 영화 속 인물 간 느껴지는 긴장감을 잘 보여주고, 하늘의 떠 있는 달처럼 초월적인 정서를 준다고 생각한다"며 정재일 음악감독과의 작업에 만족감을 드러냈다.
넷플릭스가 지킨 약속, 그리고 세계가 건넨 응답
이창동 감독은 넷플릭스와의 협업에 대해 "처음부터 이 작품에 대한 신뢰를 갖고 가고 싶어 했다"며 "제작 전 과정에 걸쳐 특별한 요구 사항 없이 연출자로서의 독립성을 절대적으로 인정해줬다"고 말했다. 극장 개봉이 이뤄질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에는 "넷플릭스에 론칭되기 전 극장 개봉을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켜줬다"고 답했다.
OTT 공개를 둘러싼 시선에 대해서는 "영화 산업의 구조는 이미 바뀌어가고 있고 그 흐름은 되돌릴 수 없다"며 "극장과 스트리밍이 결국 공존할 수밖에 없다는 걸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영화가 관객과 더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그는 "영화는 만들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 믿음에 세계가 응답했다. '가능한 사랑'은 제84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 부문, 제51회 토론토국제영화제 경쟁 부문, 제64회 뉴욕영화제 메인 슬레이트 부문에 초청됐고, 이창동 감독은 토론토국제영화제 트리뷰트 어워즈에서 한국 감독 최초로 TIFF 에버트 감독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그는 이 소식들 앞에서 "이 영화를 관객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게 될지, 최초의 반응이 매우 궁금하다"며 담담한 기대를 전했다.
'가능한 사랑'은 9월 23일 한국 극장에서 개봉하며, 11월 6일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에 공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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