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라이프저니 | 이여름 기자] 독일 쿼스탠트 레이블이 2017년 발매한 마리 자엘(Marie Jaell, 1846-1925)의 피아노 전곡집은 클래식 음악사의 빈 공간을 메워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2013년부터 2016년까지 진행된 이 대규모 녹음 프로젝트는 5장의 CD에 담겨 있으며, 피아니스트 코라 이르센(Cora Irsen)이 전곡을 연주했다. 이 음반은 발매 직후 2017년 에코 클래식 상(ECHO Klassik)을 수상하며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이 전곡집은 거의 한 세기 동안 잊혀졌던 프랑스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의 방대한 피아노 작품 세계를 복원한 기념비적 성과로 평가받는다. 솔로 피아노 작품뿐 아니라 아르얀 티엔(Arjan Tien)의 지휘로 WDR 푼크하우스오케스터 쾰른(WDR Funkhausorchester Koln)과 협연한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까지 포함해 자엘의 피아노 음악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포괄적 컬렉션이다.
리스트의 제자에서 독자적 예술가로
마리 자엘은 1846년 프랑스 알자스 지역에서 태어나 1925년까지 활동한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다. 그녀는 프란츠 리스트의 마지막 제자 중 한 명으로, 스승의 가르침을 직접 받으며 뛰어난 연주 기교를 익혔다. 동료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알프레드 자엘과 결혼한 후 유럽 전역에서 활발한 연주 활동을 펼쳤으며, 특히 생상스, 포레 등 프랑스 음악계 거장들과 긴밀한 교류를 유지했다.
자엘은 단순한 연주자를 넘어 독창적인 작곡가이자 음악 교육자, 피아노 주법 연구자로서 다면적 활동을 전개했다. 그녀는 피아노 연주에서 촉각과 '근육 기억(muscle memory)'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독자적인 교수법을 개발했으며, 이를 다룬 여러 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생전에 파리 음악계에서 상당한 명성을 누렸지만, 사후 그녀의 음악은 급속히 잊혀졌다.
음악사에서 재평가되는 여성 작곡가
마리 자엘은 19세기 말 활동한 여성 작곡가 중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클라라 슈만, 파니 멘델스존 등과 달리 그녀는 유명 남성 작곡가의 그늘에 가려지지 않고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했다. 프랑스 후기 낭만주의 전통 안에서 리스트의 화려한 기교와 포레의 섬세한 서정성을 결합한 독특한 작곡 어법을 발전시켰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음악계가 현대주의로 급격히 전환하면서 그녀의 후기 낭만주의 음악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여겨졌다. 여성 작곡가에 대한 체계적 배제와 맞물려 그녀의 작품은 연주회 레퍼토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최근 들어 여성 음악가 재발굴 운동과 낭만주의 음악에 대한 재평가 흐름 속에서 자엘의 음악이 다시 조명받기 시작했다.
인상주의와 낭만주의 사이의 섬세한 균형
자엘의 작곡 스승은 화성과 형식 면에서 보수적인 후기 낭만주의 전통에 충실하면서도, 색채적 화성과 미묘한 뉘앙스 표현에서는 인상주의를 예고하는 특징을 보인다. 그녀는 리스트로부터 물려받은 초절기교적 요소를 프랑스적 우아함과 결합시켰으며, 시적 제목을 붙인 성격소품 형식을 선호했다.
특히 그녀는 피아노의 음향적 가능성을 탐구하는 데 깊은 관심을 보였다. 페달 사용을 통한 음색 변화, 터치의 미묘함, 투명한 텍스처 등은 그녀 음악의 중요한 특징이다. 단테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18개의 피아노 소품이나 생상스의 작품을 패러프레이즈한 곡들은 문학과 음악의 긴밀한 연관성을 추구한 그녀의 예술관을 보여준다.
서정적 선율과 화려한 기교의 조화
이 전곡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자엘 음악의 다양한 면모를 드러낸다. 초기작인 소나타는 고전적 형식 안에서 낭만적 표현을 펼치며, 여섯 개의 낭만적 스케치와 멜랑콜리 왈츠는 쇼팽의 영향을 받은 섬세한 서정성을 보여준다. 반면 생상스의 주제에 의한 패러프레이즈는 리스트 스타일의 화려한 기교를 과시한다.
단테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18개의 소품은 자엘의 대표작으로, 각 곡은 시적 풍경을 그리고 있다. 투명한 화성 진행과 섬세한 뉘앙스 변화는 이미 드뷔시의 인상주의를 예고하는 듯하다. 두 개의 명상곡과 아침 산책 같은 후기 작품들은 더욱 내면적이고 사색적인 경향을 보이며, 짧은 동기의 반복적 변주를 통해 명상적 분위기를 조성한다.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은 이 전곡집의 백미다. 특히 d단조 협주곡 1번은 웅장한 오케스트라 투티와 화려한 피아노 솔로가 대비를 이루며, 프랑스 낭만주의 협주곡 전통을 계승한 수작이다. c단조 협주곡 2번은 더 서정적이고 내밀한 성격을 지니며,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섬세한 대화가 인상적이다.
헌신적 해석으로 빛난 연주진의 역량
피아니스트 코라 이르센은 이 방대한 프로젝트를 4년에 걸쳐 완성하며 자엘 음악의 가장 권위 있는 해석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녀는 리스트적 화려함과 프랑스적 우아함 사이의 균형을 절묘하게 유지하며, 기교적 난관을 자연스럽게 소화한다. 특히 섬세한 페달 사용을 통해 자엘이 추구한 미묘한 음색 변화를 효과적으로 재현했다.
이르센의 연주는 낭만적 표현력과 구조적 명료함을 동시에 갖췄다. 서정적 악장에서는 노래하는 듯한 레가토와 섬세한 루바토로 시적 분위기를 조성하고, 기교적 패시지에서는 명확한 아티큘레이션과 리드미컬한 추진력을 발휘한다. 그녀는 자엘의 음악을 단순히 역사적 호기심의 대상이 아닌, 연주할 가치가 있는 예술작품으로 제시한다.
협주곡 녹음에서 아르얀 티엔이 이끄는 WDR 푼크하우스오케스터 쾰른은 균형 잡힌 앙상블과 유연한 반응성을 보여줬다. 티엔의 지휘는 후기 낭만주의 어법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오케스트라의 풍부한 음색을 이끌어내면서도, 피아노 솔로가 돋보이도록 세심하게 밸런스를 조절했다. 쾰른 방송 오케스트라의 높은 연주 수준은 이 잊혀진 협주곡들이 재평가받을 만한 가치를 지녔음을 입증한다.
전체적으로 이 녹음 프로젝트는 학구적 복원 작업을 넘어 마리 자엘의 음악적 가치를 현대 청중에게 생생하게 전달하는 예술적 성취를 이뤄냈다. 이르센과 연주진의 헌신적 해석은 19세기 프랑스 피아노 음악사의 중요한 공백을 메우는 의미 있는 기여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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