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위태로운 자리에서 가장 진실한 소리를 찾던 피아니스트”…스티븐 코바세비치(Stephen Kovacevich), 86세로 영면
이주상 기자
klifejourney2025@gmail.com | 2026-10-30 18:45:58
[K라이프저니|이주상 기자]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스티븐 코바세비치(Stephen Kovacevich)가 지난 27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햄스테드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6세. 아들 맷 비숍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부친이 잠든 채 평온하게, 고통 없이 숨을 거두었다고 전했다.
그는 베토벤과 슈베르트, 브람스, 바르토크를 오가며 ‘위험을 감수하는 연주’의 미학을 보여준 피아니스트였다. 활동 초기에는 ‘스티븐 비숍’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무대에 올랐고, 지난해 10월 85세 생일 리사이틀로 런던 위그모어홀 관객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캘리포니아 항구도시의 소년, 음악을 사랑하되 음악가는 아니었던 집안에서
코바세비치는 1940년 10월 17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항구 지역 샌페드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크로아티아계, 어머니는 미국인이었다. 훗날 그는 집안이 음악을 사랑하되 음악을 직업으로 삼은 이는 없는 가정이었다고 회고했다.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의붓아버지의 성을 따라 ‘스티븐 비숍’이 됐다. 열한 살 무렵 이미 피아노 신동으로 공개 무대에 서며 경력을 시작했다. 10대 후반에는 영국으로 건너가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마이라 헤스(Myra Hess)에게 배웠다. 이후 런던은 그의 삶과 음악의 중심지가 됐다.
그의 음악적 취향은 일찍부터 뚜렷했다. 코바세비치는 생전 인터뷰에서 쇼팽의 마주르카를 빼면 자신을 사로잡은 음악은 거의 작곡가들의 ‘말년 작품’이었다고 말했다. 열여덟 살에 베토벤의 ‘디아벨리 변주곡’에 빠지기 전까지는 베토벤에 큰 흥미가 없었는데, 그 뒤 후기 현악사중주를 접하고 압도당했다고 한다. 말년의 음악에 대한 이끌림은 평생의 레퍼토리와 연주 철학이 됐다.
이름에도 사연이 있다. 활동 초기에는 같은 이름의 대중 가수와 혼동되는 일이 잦았다. 그는 1970년대 중반부터 어머니 쪽이 아닌 아버지 가문의 성 ‘코바세비치’를 덧붙여 ‘스티븐 비숍코바세비치’로 활동했고, 훗날 간결하게 ‘스티븐 코바세비치’로 정착했다.
1961년 위그모어홀 데뷔, 그리고 ‘디아벨리’가 연 국제무대
그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1961년 런던 위그모어홀 데뷔 리사이틀이었다. 이날 그가 들려준 베토벤 ‘디아벨리 변주곡’은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1968년 필립스(Philips)에서 발매한 이 곡의 첫 음반은 그의 초기 국제적 명성의 시금석이 됐다.
1967년 노르웨이 방송 NRK에서는 동갑내기 라이벌이자 런던 동료였던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와 한 프로그램에서 마주쳤다. 사회자의 권유로 두 사람은 약속 없이 피아노 앞에 앉아 모차르트의 네손 변주곡과 베토벤의 네손 소나타를 즉석에서 연주했다. 어색하게 시작한 방송이 점차 흥겨워지는 장면은 두 거장의 젊은 시절을 담은 귀한 기록으로 남았다.
이후 그는 지휘자 콜린 데이비스와의 협업으로 10년 가까이 황금기를 열었다. 코바세비치는 훗날 데이비스와의 관계가 “매우 좋은 10년”이었다고 돌아보면서도, 왜 관계가 멀어졌는지는 끝내 알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데이비스가 다시 함께 연주하자고 약속한 뒤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가장 밀도 높고 격찬받은 음반들
코바세비치의 이름이 가장 먼저 오르는 음반은 베토벤 ‘디아벨리 변주곡’이다. 2015년 영국 음악지 그라모폰은 이 곡의 음반 80종을 비교한 뒤 그의 녹음을 으뜸으로 꼽았다. 반세기 가까운 시간이 흘러도 그의 해석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콜린 데이비스와 함께한 협주곡 녹음도 빼놓을 수 없다. 본인이 직접 아끼는 음반으로 꼽은 바르토크 피아노 협주곡 2번과 브람스 협주곡 2번, 그리고 슈만의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가디언의 톰 서비스는 추모글에서 데이비스와의 협주곡 녹음을 들으면 두 사람이 함께 만들어낸 모험의 정신이 들린다고 평했다.
독주 음반에서는 필립스 시절의 브람스 소품집 작품 76이 그의 자부심이었다. 슈베르트 소나타 B플랫장조 D.960 녹음은 평론가와 애호가들 사이에서 꾸준히 이 곡의 기준으로 거론되는 음반이다. 톰 서비스는 그의 베토벤 소나타를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녹음이라고 밝혔다. 완벽을 겨냥하기보다 산정을 오르려는 시도의 순간을 고스란히 담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안전한 연주를 거부한 피아니스트…그의 음악이 달랐던 이유
코바세비치를 다른 피아니스트와 구별하는 가장 큰 특징은 ‘위험을 감수하는 연주’다. 톰 서비스는 그가 연주의 가장자리까지 나아가 음악이 가장 강력하고 가장 연약해지는 지점을 찾으려 했다고 평했다. 코바세비치 스스로도 자신의 연주가 실패로 끝난 적이 많았다고 솔직히 말하곤 했다. 그러나 그는 실패의 가능성을 피하지 않았다. 오늘날 연주자들이 지나치게 안전하게 연주한다는 것이 그의 불만이었다.
또 하나의 특징은 명징함과 사유의 깊이다. 백과사전들은 그를 기술적 완성도와 명료한 터치, 지적인 해석으로 평가받는 피아니스트로 기록한다. 그의 음악에는 화려한 기교의 과시가 없었다. 대신 슈베르트의 어둠, 베토벤의 빛, 라흐마니노프의 격정을 한 음 한 음에 눌러 담는 집중력이 있었다. 그가 가장 사랑한 피아니스트는 라흐마니노프였고, 연주에서 불꽃과 헌신을 보여주던 호로비츠와 라흐마니노프를 이상으로 삼았다. 훗날 그는 중국 출신의 후배 피아니스트 유자 왕과 친분을 쌓으며 젊은 세대의 재능에도 아낌없는 애정을 보였다.
베토벤의 후기 작품을 연주할 때도 그는 신성함을 ‘증거’로 보던 젊은 시절의 시선에서, 나이가 들며 신성함에 대한 ‘희망’으로 바라보게 됐다고 말했다. 슈베르트는 위안을 쉽게 주지 않는 작곡가여서 더욱 특별하다고 했다. 말년의 소리에는 그런 인생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한밤 3시의 바르토크, 에든버러의 공포, 그리고 비평가들
그의 연주 인생에는 일화도 많았다. 아르헤리치와 함께 필립스에서 바르토크의 ‘두 대의 피아노와 타악기를 위한 소나타’를 녹음하던 날이 대표적이다. 녹음 시작 전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쓸 피아노가 소리를 내지 않았다. 운반 중 떨어뜨린 것이 뒤늦게 밝혀졌고, 스타인웨이 사무실은 이미 닫혔다. 필립스 측이 런던 곳곳에 전화를 돌린 끝에 새벽 2시 30분에야 대체 피아노가 도착했다. 두 사람은 새벽 3시에 녹음을 시작해 아침 7시 30분에 끝냈다. 코바세비치는 “이만큼 호흡이 맞을 수 없다”는 뜻으로 이 일을 두고두고 이야기했다. 이렇게 완성된 녹음은 두 사람의 교감을 보여주는 명반으로 남았다.
에든버러 페스티벌 개막 무대에서 바르토크 협주곡 2번을 연주하던 날도 그는 잊지 못했다. 라이브 방송이었는데 너무 두려운 나머지 BBC의 음향 점검조차 받지 못했고, 연주를 멈춰야 할 경우를 대비해 말할 내용까지 준비한 채 무대에 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대목을 완벽하게 넘기자 객석의 아르헤리치와 스페인 피아니스트 라파엘 오로스코가 서로 얼싸안았고, 그는 “지금까지 가장 잘 연주했다”고 느낄 만큼 몰입했다. 공연 뒤 무대 뒤에서 마신 페리에 한 병이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고, 외식을 싫어하던 콜린 데이비스까지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고 한다.
비평가들과의 일화도 있다. 리카르도 샤이가 이끄는 콘세르트헤바우 무대에서 베토벤 협주곡 4번을 연주할 때, 그는 지휘자가 연구한 대로 도입부를 아르페지오로 풀어 연주했다. 이를 두고 한 비평가는 피아노를 기타로 아느냐고 비아냥거렸다. 그는 근거도 없이 그렇게 연주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 일화를 전해 들은 아슈케나지는 영국 잡지에 항의 편지까지 썼다. EMI 녹음을 두고 그라모폰이 혹평하자 “베토벤이 이만큼 연주했다면 이렇게 했을 것”이라는 취지로 맞섰다.
그에게는 사랑과 우정의 이야기도 있다. 아르헤리치와는 부부로 인연을 맺은 뒤에도 평생 듀오 파트너로 남았다. 드뷔시의 ‘흑과 백’은 두 사람이 처음 함께 녹음한 곡이었고, 80세가 넘은 뒤에도 같은 무대에 섰다. 지난해 85세 생일 무대에도 아르헤리치가 바이올리니스트 이렌 뒤발과 함께 올랐다.
뇌졸중도 막지 못한 무대…“살아남으며 배웠다”
2008년 그는 심각한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한동안 말을 하지 못할 정도였지만 몇 주 만에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이후 레퍼토리를 줄이고 연주 횟수도 줄였지만, 무대를 떠나지 않았다. 70세, 75세, 80세, 85세 생일마다 위그모어홀에서 열린 리사이틀은 말년의 이정표가 됐다. 2020년 80세 공연은 코로나 시기의 거리두기 객석에서 열렸고 온라인으로 중계됐다.
그는 인터뷰에서 뇌졸중 이후 더 열심히 연습해야 했고, 그것이 오히려 이전에는 얻지 못했던 것을 안겨줬다고 말했다. 오랜 무대 공포증과의 싸움도 마찬가지였다. 연주를 멈춰야 했던 순간이 있었지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살아남았고, 살아남으며 배웠다.”
그는 지휘자로서도 활동했다. 1984년 휴스턴 심포니와 지휘 데뷔 무대를 가졌고, 1990년부터 1993년까지 아일랜드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을 지냈다. 하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그는 언제나 건반 앞의 투사로 남았다.
마지막 인사
톰 서비스는 불과 몇 주 전까지도 그와 대화를 나눴다고 했다. 병원에서 회복 중이던 코바세비치는 호로비츠와 라흐마니노프, 그리고 젊은 후배들의 불꽃에 대해 이야기하며 여전히 음악에 열렬했다. 서비스는 그와의 대화가 언제나 열정적이고 고집스러웠으며, 이야기 속 작곡가들이 눈앞에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그는 완벽하지 않아서 더 진실했던 피아니스트였다. 안전한 길을 택하지 않았고, 위태로운 가장자리에서 음악의 가장 뜨거운 곳을 찾았다. 그가 남긴 디아벨리와 베토벤, 슈베르트의 음반은 앞으로도 그 위태롭고 눈부신 시도의 증거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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