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 빛과 색채로 수놓은 베네치아의 꿈…앙리-에드몽 크로스의 '리오 산 트로바소, 베니스'

고요비 기자

klifejourney2025@gmail.com | 2026-04-27 17:56:20

앙리-에드몽 크로스의 '리오 산 트로바소, 베니스'

[K라이프저니|고요비 기자] 프랑스 후기인상주의와 신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앙리-에드몽 크로스(Henri-Edmond Cross, 1856~1910)의 걸작 '리오 산 트로바소, 베니스(Rio san Trovaso, Venise)'(1904, 캔버스에 유채)는 분할주의(디비지오니즘) 기법의 정수를 보여주는 수작으로, 베네치아 운하의 빛과 물과 식물이 색채의 향연으로 재탄생한 명작이다.

신인상주의의 숨은 거장, 앙리-에드몽 크로스

크로스는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 폴 시냐크(Paul Signac)와 함께 신인상주의 운동의 핵심 축을 이룬 화가다. 본명은 앙리-에드몽-조제프 들라크루아(Henri-Edmond-Joseph Delacroix)로, 위대한 낭만주의 거장 외젠 들라크루아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영어식 성 '크로스(Cross)'를 필명으로 채택했다. 1881년 파리로 이주한 뒤 인상주의의 세례를 받았고, 1880년대 후반부터 쇠라의 점묘법 이론에 매료되어 신인상주의로 전향했다.

그는 미술사적으로 쇠라 사후 시냐크와 함께 신인상주의를 이끌며 이 사조를 단순한 과학적 실험에서 서정적이고 장식적인 예술로 승화시킨 인물로 평가받는다. 특히 야수주의(포비즘)의 탄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쳐,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가 1904년 크로스의 화풍을 직접 접한 뒤 색채 해방의 길로 나아갔다는 사실은 미술사의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색채의 과학과 시정(詩情) 사이…분할주의 화법의 정수

이 작품은 크로스가 완숙기에 접어든 1904년에 완성한 것으로, 그의 화법적 특징이 절정에 달한 시기의 역작이다. 그는 쇠라의 엄격한 점묘법(Pointillisme)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다 크고 자유로운 붓 터치로 색점을 화면에 배치하는 분할주의(Divisionism) 방식을 구사했다.

화면을 가득 채운 크고 둥근 색채 점들은 결코 기계적으로 찍힌 것이 아니다. 파랑, 초록, 노랑, 분홍, 주황, 흰색이 리드미컬하게 교차하며 빛이 수면에 반사되는 찰나의 순간을 포착해낸다. 전경의 운하 수면에는 핑크와 오렌지, 블루의 색점들이 어우러져 오후 햇살이 물 위에서 춤추는 듯한 생동감을 자아낸다. 오른편 수직으로 우뚝 선 계류용 말뚝들은 짙은 네이비와 블루 계열의 점들로 이루어져 강렬한 명암 대비를 형성하고, 그 위를 풍성하게 덮은 초록 나무들의 싱그러운 색채와 절묘한 대비를 이룬다.

중경에는 베네치아 특유의 아치형 돌다리와 수변 건물들이 밝고 환한 색점들의 집합으로 표현되어 몽환적인 분위기를 더한다. 왼편의 붉은 줄무늬 계류 기둥과 그 곁에 정박한 곤돌라의 흰 실루엣이 베네치아임을 조용히 암시한다. 화면 전체는 구체적인 대상의 묘사보다 빛과 색채가 만들어내는 인상과 감각에 집중하며, 현실의 베네치아를 넘어선 이상화된 색채 세계를 구현해낸다.

앙리-에드몽 크로스의 '리오 산 트로바소, 베니스'(부분)

베네치아의 빛을 영원으로 고정한 명작의 가치

이 작품이 지닌 미술사적 가치는 복합적이다. 우선 신인상주의 화법이 가장 서정적이고 풍요롭게 구현된 사례로서, 기술적 완성도와 예술적 감성이 균형을 이룬 걸작으로 꼽힌다. 또한 크로스가 1903~1904년 베네치아를 방문하며 제작한 연작 가운데 하나로, 이 시기 그의 작품들은 화가로서 가장 원숙한 경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학계에서 높이 평가된다.

특히 이 작품은 베네치아라는 실재하는 도시 공간을 소재로 삼으면서도, 사실적 재현보다 색채와 빛의 감각적 경험을 우위에 놓음으로써 20세기 추상 회화로 향하는 전환점을 예고한다는 점에서 미술사적 의미가 크다.

운하 위를 흐르는 빛의 시

이 그림 앞에 서면 눈보다 먼저 감각이 반응한다. 수면을 가득 채운 분홍과 노랑, 파랑의 색점들은 마치 베네치아의 오후 햇살이 캔버스 위에서 그대로 진동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고요하지만 결코 정지해 있지 않은 화면 — 수천 개의 색채 호흡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빛의 숨결을 이루는 듯하다.

짙은 남색의 말뚝들이 드리우는 그림자는 화면에 무게와 고요함을 부여하고, 그 위로 초록 나무들이 터질 듯 풍성하게 피어나 생명의 환희를 노래한다. 배경으로 희미하게 녹아드는 베네치아의 건물들과 아치형 다리는 꿈속의 풍경처럼 아스라이 아름답다. 크로스의 이 그림은 눈으로 보는 풍경화가 아니라, 피부로 느끼는 오후의 햇빛이자 귀로 듣는 물의 노래다.

앙리-에드몽 크로스의 '리오 산 트로바소, 베니스'(부분)

마티스에서 추상까지…크로스가 현대 회화에 남긴 유산

크로스의 영향은 그의 생전부터 이미 강력하게 발현되었다. 1904년 여름, 젊은 마티스는 시냐크의 초대로 남프랑스 생트로페를 방문하여 크로스를 직접 만나고 그의 분할주의 화법을 접했다. 이 경험은 마티스로 하여금 색채를 묘사의 도구가 아닌 감정과 표현의 언어로 인식하게 만들었고, 이듬해 포비즘(야수주의)의 폭발적 탄생으로 이어졌다.

또한 크로스의 색채 분할 방식은 칸딘스키(Kandinsky)를 비롯한 초기 추상 화가들에게도 색채 자체가 독립적인 표현력을 지닐 수 있음을 시사한 중요한 선례로 작용했다. 신인상주의에서 야수주의로, 야수주의에서 추상으로 이어지는 현대 회화의 계보에서 크로스는 그 결정적인 가교 역할을 한 화가로 미술사에 기록된다.

경매 시장에서 재조명되는 크로스의 위상

생전에 시냐크의 명성에 가려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았던 크로스는 20세기 후반 이후 경매 시장에서 꾸준히 재평가받고 있다. 크리스티(Christie's), 소더비(Sotheby's) 등 주요 경매 하우스에서 그의 작품들은 지속적으로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크로스의 작품 가격대는 작품의 크기와 완성도, 제작 시기에 따라 편차가 크다. 소품 드로잉이나 수채화는 수만 달러 선에서 거래되는 반면, 1890년대~1900년대 초의 완숙기 캔버스 유채화는 수백만 달러에서 수천만 달러에 이르는 낙찰가를 기록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신인상주의 작품에 대한 글로벌 컬렉터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크로스의 주요 작품들은 경매 추정가를 크게 웃도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포츠담에 소재한 바르베리니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리오 산 트로바소, 베니스'는 화가의 최전성기 작품인 데다 소장 이력도 명확해, 전문가들 사이에서 크로스 작품 가운데서도 특히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 수작으로 평가된다. 빛과 색채로 베네치아를 다시 창조한 이 그림은, 10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보는 이의 눈앞에서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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