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 색채 뒤에 숨은 절규 — 마리안네 폰 베레프킨, '가을(학교)'이 그리는 침묵의 행렬
고요비 기자
klifejourney2025@gmail.com | 2026-09-19 15:53:10
[K라이프저니|고요비 기자] 게시한 작품은 러시아 태생의 화가 마리안네 폰 베레프킨(Marianne von Werefkin, 1860~1938)이 1907년경에 그린 '가을(학교, Herbst/Schule)'이다.
검은 옷을 입은 아이들이 한 줄로 늘어서 교사를 따라 걷는 이 작품은 호숫가 풍경과 타오르는 듯한 주황빛 하늘을 배경으로, 얼핏 평화로워 보이지만 들여다볼수록 서늘한 긴장을 품고 있다.
화가 뒤에 가려진 화가 — 베레프킨의 초상
베레프킨은 1860년 러시아 툴라에서 태어나 1938년 스위스 아스코나에서 세상을 떠난 화가로, 독일 표현주의의 태동을 이끈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러나 정작 미술사에서 그의 이름은 그가 뮌헨의 스튜디오에서 길러낸 알렉세이 폰 야블렌스키와 바실리 칸딘스키 같은 남성 동료들의 그늘에 가려져 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젊은 시절 일리야 레핀의 문하에서 사실주의를 배우며 '러시아의 렘브란트'라는 별칭까지 얻었던 베레프킨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상속받은 재산 덕분에 1896년 야블렌스키와 함께 뮌헨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주 후 거의 10년 가까이 스스로는 붓을 내려놓고 야블렌스키의 재능을 키우는 데 헌신했다는 사실이다. 대신 그는 뮌헨 기젤라슈트라세의 자택에 살롱을 열어 예술가, 문인, 러시아 망명객들이 모이는 교류의 중심지를 만들었고, 이 살롱이야말로 이후 '청기사파(Der Blaue Reiter)'로 이어지는 독일-러시아 아방가르드 인맥의 산실이 됐다.
1906년, 46세의 나이로 붓을 다시 든 베레프킨은 이듬해부터 폴 고갱과 루이 앙크탱의 '평면 회화' 기법, 그리고 에드바르 뭉크의 영향이 뚜렷한 표현주의 작품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1908년부터는 야블렌스키, 칸딘스키, 가브리엘레 뮌터와 함께 뮌헨 근교 무르나우에서 어울려 야외 작업을 이어갔고, 이듬해인 1909년 이들은 '신뮌헨예술가협회(NKVM)'를 공동 창설했다. 이 단체는 몇 년 뒤 칸딘스키와 프란츠 마르크가 갈라져 나가 결성한 청기사파의 직접적인 모태가 됐다. 흥미롭게도 베레프킨의 전기 작가 베른트 페트케는 칸딘스키의 명저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에 담긴 여러 아이디어가 실은 베레프킨에게서 비롯됐으나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검은 행렬, 타오르는 하늘 — '가을(학교)'의 화법
작품 '가을(학교)'은 템페라로 카드보드에 그려진 55×74cm 크기의 작품으로, 현재 아스코나의 코무날레 현대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화면 왼쪽에는 검은 옷을 입은 교사로 보이는 여성이 앞장서고, 그 뒤를 똑같이 검은 원피스와 모자를 쓴 여학생들이 두 줄로 짝지어 따라간다. 화면을 가로지르는 헐벗은 검은 나무줄기들이 인물들 사이사이를 파고들며 시야를 분절시키는데, 러시아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매거진은 이 나무줄기들이 마치 아이들을 우리에 가둔 듯한 인상을 주며 그들의 움직임을 멎게 만든다고 짚었다. 호수는 짙은 남색으로, 산줄기는 검푸르게, 그리고 하늘은 주황과 회보라가 격렬하게 충돌하는 색으로 칠해져 있어 조용한 등굣길 풍경치고는 이질적일 만큼 강렬한 색채 대비를 이룬다.
베레프킨은 인물들을 거의 동일한 형상으로 반복해 그리는 기법을 즐겨 썼는데, 이는 개인의 정체성이 지워지고 집단 속에 매몰되는 감각을 암시하는 장치로 해석된다. '길' 역시 그가 평생 반복해서 다룬 모티프로, 인물들이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는 구도는 그의 풍경화 전반에서 되풀이해 나타난다.
유쾌해 보이지만 유쾌할 수 없는 것
한 미술 평론가는 이 작품을 두고, 교사가 아이들을 인솔해 등교시키는 장면 자체는 얼마든지 다정한 그림이 될 수 있었지만 베레프킨은 의도적으로 황량한 접근법을 택했고, 그 효과를 검은 교복이 한층 강화한다고 짚었다. 표면적인 주제와 실제로 화면에서 풍기는 정서 사이의 이러한 간극이야말로 이 그림의 핵심적 가치다. 제목만 보면 계절의 서정을 담은 풍경화로 짐작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개인성을 상실한 채 획일적으로 줄지어 행진하는 존재들에 대한 무거운 질문을 던지는 작품인 셈이다. 이는 산업화와 제도화가 인간의 개별성을 어떻게 억누르는가에 대한 20세기 초 유럽 예술가들의 공통된 불안과도 맞닿아 있다.
안개 속에서 걸어 나오는 그림자들
그림 앞에 서면 먼저 눈을 사로잡는 것은 불타는 듯한 주황빛 노을과 그 아래 웅크린 검푸른 산의 대비다. 그러나 시선이 화면 아래로 내려와 나무 사이로 비치는 검은 행렬과 마주치는 순간, 아름다움은 이내 서늘함으로 뒤바뀐다. 반복되는 작은 실루엣들은 마치 그림자 인형극의 한 장면처럼 걸어가고, 헐벗은 나뭇가지들은 그 걸음을 가두는 창살처럼 느껴진다. 베레프킨은 생전에 "내 안에는 발명해 낸 수많은 존재들이 소용돌이치며 둘러싸고 있어, 현실을 보지 못하게 한다"는 취지의 말을 남긴 적이 있는데, 이 그림 속 반복되는 인물들의 행렬에서도 바로 그런 내면의 소용돌이가 감지된다. 계절의 정취 대신 존재의 고독과 순응, 그리고 그 이면에 감춰진 불안이 조용히 스며 나오는 작품이다.
잊혔던 이름이 다시 걷는 길
베레프킨은 표현주의 회화가 형태를 넘어 순수한 색채와 감정으로 나아가는 길목에서 중요한 다리 역할을 했다. 그가 뮌헨 살롱을 통해 촉발한 교류는 신뮌헨예술가협회와 청기사파로 이어졌고, 이는 결국 추상미술의 태동으로 연결됐다. 특히 인물을 반복적이고 유사한 형태로 배치해 개인성을 지우는 그의 화법, 그리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내면의 정서적 상태를 색채로 투영하는 태도는 이후 독일 표현주의 전반, 나아가 노동자와 사회적 소외 계층을 다룬 사회적 표현주의 계열의 화가들에게도 영향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오랫동안 야블렌스키와 칸딘스키의 조력자로만 기억됐던 그가 근래 들어 주요 미술관의 기획전에 독립적인 작가로 다시 소환되고 있는 것도 이런 재평가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시장 속 베레프킨의 자리
경매 시장에서 베레프킨의 위치는 '재조명이 진행 중인 작가'로 요약된다. 미술 시장 분석 업체 마스터웍스는 그를 독일 표현주의의 창립 세력 중 한 명으로 꼽으면서도, 그의 경매 시장 존재감은 여전히 미미하고 거래도 뜸한 편이라며 이는 같은 세대 남성 작가들과 대비된다고 짚었다. 이제까지 공개된 기록상 최고가는 '금요일 저녁(시나고그)'이 케터러쿤스트 경매에서 약 42만 5000유로(한화 약 7억 원)에 낙찰된 사례다.
이 밖에 렘퍼츠 경매를 통해 거래된 작품들을 보면 22만 8600유로, 11만 1600유로, 6만 7200유로, 4만 800유로 선에서 각각 낙찰됐고, 소품이나 종이 작업의 경우 1만~3만 유로대에 거래되는 사례가 많다. 유화 대작은 드물게 나오고, 템페라나 괏슈로 그려진 종이·카드보드 작업이 시장에 자주 등장하는 편인데, 이런 작품들은 대체로 중저가대에서 거래된다. 전문가들은 그의 미술사적 중요성에 비해 시장가는 아직 저평가돼 있으며, 앞으로 재평가가 이어질수록 가격대도 점차 오를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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