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 '20살에 세상을 등진 우크라이나의 비어즐리'…맥시모비치의 '키스', 국제 키스의 날에 어울리는 그림!

고요비 기자

klifejourney2025@gmail.com | 2026-07-07 13:47:57

프세볼로드 막시모비치의 '키스'

[K라이프저니|고요비 기자] 6일은 '국제 키스의 날(International Kissing Day)'이었다. 사랑이 세상을 지배해 전쟁이 없는 평화가 영원히 깃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만들어졌다. 이와 어울리는 그림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 우크라이나 화가 프세볼로드 막시모비치(Vsevolod Maksymovych, 1894~1914)의 1913년작 '키스(Поцілунок)'다. 캔버스에 유채로 그려진 가로세로 100×100cm 크기의 이 작품은 현재 키이우 국립우크라이나미술관(NAMU)에 소장돼 있다.

요절한 천재, 우크라이나 미술사에 남긴 짧지만 강렬한 흔적

막시모비치는 우크라이나 미술사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점하는 인물이다. 폴타바 출신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황립미술아카데미에서 수학했으며, 오브리 비어즐리와 미하일 브루벨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우크라이나의 비어즐리'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다. 미술사가들은 그를 우크라이나 아르누보의 가장 중요한 대표 주자로 평가한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오랫동안 미술사의 각주에 머물러 있었다. 활동 시기가 짙었던 1912~1914년은 러시아 아방가르드가 폭발적으로 태동하던 시기와 정확히 겹쳤고, 미하일 라리오노프·나탈리아 곤차로바 등 추상미술의 개척자들과 가까이 지냈음에도 그의 화풍은 이미 '한 시대 뒤처진'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라리오노프가 연출한 영화 '카바레 13호의 드라마'(1914)에 주연으로 출연했는데, 이 작품은 세계 최초의 아방가르드 영화로 평가받는다. 화가는 모스크바 개인전이 참담하게 실패한 직후 약물 과용으로 스무 살의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문양으로 뒤덮인 붉은 화면 속의 포옹

'키스'는 화면 전체를 뒤덮은 촘촘한 원형·나선형 장식 문양이 가장 먼저 시선을 붙잡는 작품이다. 검붉은 배경 위에 크고 작은 동심원과 소용돌이 무늬가 융단처럼 깔리고, 그 문양들 사이로 두 인물이 서로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장면이 클로즈업된다. 인물의 윤곽선은 짙은 흑색 선묘로 명료하게 마감돼 있고, 살결은 황금빛에 가까운 따뜻한 톤으로 채색돼 장식적 배경과 대비를 이룬다.

이러한 화법은 막시모비치 특유의 절충주의를 보여준다. 그는 고대 그리스·로마 미술, 아시리아 미술, 그리고 자신의 고향 폴타바 민속 미술의 문양을 동시에 끌어와 대형 장식 패널을 완성했다. 인물의 평면적이고 우아한 곡선 처리는 비어즐리의 선묘를 연상시키며, 배경을 가득 채우는 장식적 반복 문양은 클림트의 황금기 회화와도 종종 비교된다. 얼굴과 어깨의 양감을 살리면서도 전체적으로는 회화를 공예적 장식면으로 환원시키는 이중적 태도가 이 작품의 조형적 특징이다.

세제션 양식에 새긴 육체성

미술사가 이리나 호르바초바는 막시모비치가 세제션(Secession) 양식에 남긴 개인적 기여를 "관능적이고 나른한 에테르적 이미지에 육체 단련(운동성)의 요소를 접목한 것"이라 평가한다. 실제로 그는 폴타바 시절 피디르 크리쳅스키, 이반 미아소예도프 등과 함께 나체주의·보디빌딩 성향의 그룹에 몸담았을 만큼 신체와 관능에 대한 관심이 뚜렷했다. '키스' 역시 이러한 경향의 정점에서 탄생한 작품으로, 세기말적 에로티시즘과 신비주의, 이국적 취향이 결합된 그의 예술 세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치를 지닌다.

문양 속에 갇힌, 그러나 영원한 포옹

이 그림을 마주하면 가장 먼저 다가오는 감정은 '밀폐된 열정'이다. 두 사람의 입맞춤은 화면 밖 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채, 오직 서로에게만 몰입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배경을 가득 채운 원형 문양들은 마치 시간이 정지된 만다라처럼 두 사람을 감싸며, 동시에 압도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붉은 색조가 주는 열기와 흑선의 단호함이 뒤섞이며, 보는 이는 관능적 도취와 어딘가 불안정한 긴장감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화가가 채 20년을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이 그림 속 포옹은 더욱 절박하고 애틋한 여운으로 다가온다.

뒤늦게 재발견된 이름

막시모비치는 생전에 아방가르드의 격류에 휩쓸려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사후 그의 존재는 동시대 예술가들의 회고와 증언 속에 꾸준히 남았고, 다비드 부를류크, 벨리미르 흘레브니코프,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마리아 시니아코바 등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핵심 인물들과 교류했던 사실이 뒷받침한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의 작품은 국립우크라이나미술관 소장품의 중심에 자리하게 됐고, 미국과 유럽의 국제 전시에도 소개되며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특히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서구 미술계에서 우크라이나 근대미술사를 재조명하는 흐름과 함께 그의 이름이 다시 호출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시장보다 미술관에 남은 화가

경매 시장에서 막시모비치의 이름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스무 살에 요절한 그가 남긴 작품 수 자체가 적고, 대표작 대부분이 국립우크라이나미술관 등 공공 컬렉션에 편입돼 있어 개인 소장을 거쳐 경매에 나올 여지가 애초에 희소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그의 회화가 '투자 자산'으로서보다 '미술사적 유산'으로서 존재해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국내외 주요 아트마켓 데이터베이스에서도 그의 작품 낙찰 기록은 확인되지 않으며, 이는 같은 시기 활동한 나탈리아 곤차로바나 미하일 라리오노프 등이 국제 경매에서 수백만 달러대 가격을 형성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인 지점이다. 다만 이는 시장성의 부재라기보다, 그의 작품이 대부분 처음부터 뮤지엄 피스로 다뤄져 온 특수한 이력에서 비롯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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