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라이프저니|고요비 기자] 얼어붙은 호숫가, 초록빛 벤치에 매달린 고드름. 스웨덴 레이블 BIS가 내놓은 후고 알벤(Hugo Alfvén, 1872~1960) 전집 박스셋의 표지는 그 자체로 이 음반이 담고 있는 세계를 예고한다.
북유럽의 서늘한 대기와 여름 백야의 열기가 공존하는 음악, 바로 알벤의 오케스트라 작품들이다. 1988년부터 1992년 사이 스톡홀름 콘서트홀에서 녹음된 다섯 장의 CD를 한데 묶어 2004년 재발매된 이 박스셋은, 로열 스톡홀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네메 예르비가 남긴 알벤 교향곡 전곡 사이클의 완결판이다. 그 가치는 지금도 변함이 없어, 클래식 팬들을 매료시킨다.
흩어진 명반들을 하나로
알벤의 교향곡 다섯 곡과 스웨덴 랩소디 세 곡을 포함해 '드라파', '안단테 렐리지오소', '방탕한 아들' 모음곡, '스케리의 전설', '몬테인 킹' 모음곡, '구스타브 2세 아돌프'중 엘레지까지 아우르는 이 박스셋은 알벤이 남긴 관현악 유산의 상당 부분을 한자리에 모아 놓았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크다.
원래 다섯 장의 개별 음반으로 나뉘어 발매됐던 녹음들을 합리적인 가격의 세트로 재구성한 것으로, 스웨덴 바깥에서는 좀처럼 연주되지도, 온전한 형태로 녹음되지도 않았던 알벤의 오케스트라 세계를 국제 청중에게 소개하는 통로 역할을 해왔다.
음반 시장에서 스칸디나비아 관현악 음악이 시벨리우스와 닐센 중심으로 소개되던 흐름 속에서, 이 세트는 알벤이라는 이름을 그 지형도 위에 다시 새겨 넣은 기록물로 평가된다.
예르비와 스톡홀름 필, 두 세대를 관통한 해석
에스토니아 출신 지휘자 네메 예르비는 시벨리우스, 그리그, 닐센 등 북유럽 관현악 레퍼토리를 폭넓게 녹음해 온 지휘자로, 로열 스톡홀름 필하모닉과의 알벤 사이클에서도 특유의 활력과 극적인 대비를 앞세운 해석을 들려준다. 다섯 장의 녹음이 1987년부터 1992년까지 5년에 걸쳐 이뤄진 만큼 오케스트라의 앙상블은 세월을 두고 다져졌고, 그 결과 초기 교향곡의 낭만적 열정과 후기작의 응축된 어법을 아우르는 일관된 해석의 축이 형성되었다.
평자들은 예르비가 악보에 담긴 격정과 서정을 과장 없이, 그러나 뚜렷한 존재감으로 끌어낸다고 평가했으며, 오케스트라의 정교한 세부 표현과 지휘자의 즉흥적이면서도 수사적인 에너지가 서로를 보완한다고 짚었다.
시벨리우스의 그늘 아래, 스웨덴 교향곡의 개척자
알벤은 스스로 자신의 교향곡 1번을 두고 '스웨덴어로 쓰인 최초의 교향곡'이라 자평했을 만큼, 스웨덴 국민 음악의 정체성을 관현악이라는 틀 안에 세우려 한 작곡가였다. 실제로 알벤의 교향곡 다섯 곡은 1896년부터 1952년에 이르는 반세기에 걸쳐 작곡되었고, 후기 낭만적 어법과 대담한 관현악법, 극적인 에너지에서 이웃 나라 핀란드의 장 시벨리우스와 자주 비교된다.
다만 시벨리우스가 국제적으로 폭넓게 연구되고 연주된 반면, 알벤은 상대적으로 스웨덴 국내에 머무는 작곡가로 남았다. 그런 점에서 이 박스셋은 시벨리우스의 그늘에 가려졌던 스칸디나비아 교향곡 전통의 또 다른 축을 복원하는 의미를 지닌다. 알벤은 작곡가이자 지휘자, 바이올리니스트, 나아가 수채화가로도 활동했던 다재다능한 인물이었으며, 웁살라 대학교 음악감독으로 29년간 재직하며 스웨덴 음악계의 제도적 기틀을 다진 인물이기도 하다.
곡마다 새겨진 사연들
이 박스셋에 담긴 곡들에는 각기 독특한 탄생 배경이 있다. 대표곡인 스웨덴 랩소디 1번 '미드섬머 비질'은 1903년 여름 덴마크 스카겐에서 작곡됐다. 알벤은 1892년 스웨덴의 한여름 축제(midsummer)에 참여했던 기억에서 이 곡의 씨앗을 얻었다고 밝힌 바 있으며, 완성된 곡은 스웨덴 민요 선율을 클라리넷의 유쾌한 독주로 시작해 전 오케스트라의 활기찬 춤곡으로 확장해 나간다.
이 곡은 발표 직후부터 대중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각종 무단 편곡판이 쏟아져 나왔고, 이는 스웨덴에서 신설된 작곡가 저작권 단체가 저작권법의 실효성을 시험하는 첫 사례로 다뤄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또 다른 대표작인 '몬테인 킹' 모음곡은 원래 1916년부터 1922년까지 왕립 스웨덴 오페라의 위촉으로 만들어진 발레 판토마임이었다. 트롤에게 붙잡힌 양치기 소녀의 이야기를 그린 이 작품에 대해 알벤은 훗날 "지금까지 맡았던 일 가운데 가장 즐거운 작업"이었다고 회고했다.
여름의 아름다움과 일몰, 겨울의 냉기까지 자연의 온갖 표정을 음악으로 옮길 기회를 얻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923년 초연 이후 이 발레는 8년 가까이 무대에서 자취를 감췄고, 알벤은 1950년대까지도 이 작품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발레 상연이 끊긴 뒤 알벤 자신이 골라낸 모음곡 형태로 주로 연주된다.
교향곡 4번은 원래 '군도의 이야기'라는 제목의 표제음악으로 시작됐으나, 20여 년에 걸쳐 확장되면서 네 개 악장이 끊김 없이 이어지는 45분 규모의 교향곡으로 완성되었다. 남녀 성부의 가사 없는 노래(보칼리제)가 오케스트라에 포함된 이례적인 편성 때문에, 그리고 곡에 담긴 감정의 밀도가 지나치게 노골적이라는 이유로 일부 평자들은 공개 연주에 부적절하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을 만큼 파격적인 작품이었다.
반면 마지막 교향곡인 5번은 작곡가가 세상을 떠나던 해까지 손에서 놓지 못한 곡으로, 1953년 초연 이후에도 알벤 스스로 만족하지 못해 계속 수정을 거듭했다. 그는 이 곡의 1악장을 두고 "내가 만든 것 중 가장 덜 나쁜 것"이라는 특유의 겸손한 표현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연과 사람, 스웨덴의 감정을 그려낸 음악
알벤이 이 곡들을 통해 그려내고자 한 것은 결국 스웨덴이라는 풍경과 그 풍경 속 사람들의 내면이었다. 교향곡 4번에 대해 알벤은 "군도에서, 어둡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이면 바다가 암초 사이에서 포효하고, 달빛과 햇살 속에서는 잔잔해지는 그곳에서 두 젊은 영혼의 이야기가 펼쳐진다"고 설명하며 "자연의 정서는 다름 아닌 인간 마음의 상징"이라고 덧붙인 바 있다.
이는 알벤의 음악 전반을 관통하는 태도라 할 수 있다. 추상적으로 보이는 교향곡조차 스웨덴 군도의 물빛과 햇살로 채색되어 있으며, 관현악의 색채와 화성 운용에 대한 회화적인 감각이 두드러진다. '미드섬머 비질'이 민속적 축제의 흥과 그 안에 스민 애수를, '몬테인 킹'이 신화적 자연 세계의 위협과 경이를 그렸다면, 만년의 교향곡 5번은 자신이 쌓아온 선율적 자산을 반복적으로 되짚으며 마치 정교한 시계 장치에 갇힌 듯한 감정을 형상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뒤늦은 재발견
이 시리즈는 개별 CD로 나뉘어 발매되던 시절부터 국제 음반 비평지들로부터 이례적일 만큼 호평을 받았다. 독일의 포노포룸은 예르비가 이끄는 스톡홀름 필하모닉이 곡에 담긴 음향적 아름다움을 훌륭하게 살려냈다고 평했고, 미국의 팡파르는 이 시리즈를 기획한 BIS의 과감한 시도에 찬사를 보냈다.
영국의 그라모폰은 예르비의 교향곡 해석과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미드섬머 비질' 연주 모두에서 설득력을 확인했다며, 이후 다른 녹음에 대해서는 예르비와 오케스트라가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BIS의 녹음 기술이 자연스러움과 생동감에서 새로운 기준을 세웠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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