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최불암
[K라이프저니|이주상 기자] 한국 대중문화의 가장 따뜻한 얼굴로 기억돼 온 배우 최불암(본명 최영한)이 29일 밤 10시께 서울 강서구의 한 병원에서 입원 치료 중 세상을 떠났다. 향년 87세. 고인은 지난해 3월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은 뒤 재활에 힘써 왔으나 최근 건강이 급격히 악화한 것으로 전해졌다.
같은 시기, 영국 출신 배우 패트릭 스튜어트도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대중이 한 사람은 '우리 집 아버지'로, 다른 한 사람은 '우주선 함장'으로 기억한다. 서로 다른 대륙에서 서로 다른 얼굴로 살았지만, 두 사람은 연극 무대에서 연기를 시작해 한 시대의 정서를 대표하는 자리에 오른 배우였다.
햄릿으로 시작해 안방극장의 역사가 되다
1939년 인천에서 태어난 최불암은 호적상 1940년생이다. 서울 중앙고와 서라벌예대,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거쳤다. 본래 연출가를 꿈꿨던 그는 1959년 극단 '실험극회'의 연극 '햄릿'으로 연기자의 길에 들어섰고, 1965년 국립극단 단원이 되면서 본격적인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이름이 대중에게 퍼진 것은 1967년 KBS의 전신인 서울중앙방송 특채 6기 탤런트로 TV에 진출하면서부터다. 20대의 나이에 드라마 '수양대군'에서 노년의 김종서를 소화해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67년 동안 연극과 영화, 드라마를 넘나들며 활동한 그의 이력은 그대로 한국 방송 드라마의 성장사였다.
'박 반장'의 정의감, 한국형 수사물의 문을 열다
최불암을 국민 배우의 반열에 올린 첫 작품은 MBC '수사반장'이다. 1971년 첫 방송 이후 1989년까지 이어진 이 드라마에서 그는 박영한 반장을 연기했다. 한국형 수사 드라마의 시초로 꼽히는 이 작품에서 박 반장은 범인을 쫓는 형사이면서도, 범죄의 뒷면에 놓인 사람의 사정을 헤아리는 인물이었다. 정의감과 인간미를 함께 지닌 이 캐릭터는 이후 한국 수사물이 오래 참조하는 원형이 됐다.
22년, 양촌리 김 회장이 된 이름
'수사반장'이 최불암을 알렸다면 '전원일기'는 그를 '아버지'로 만들었다. 1980년부터 2002년까지 22년간 방송된 국내 최장수 드라마 '전원일기'에서 그는 양촌리의 김 회장으로 살았다. 배우 김혜자와 부부로 호흡을 맞추며 그려낸 가족과 마을의 풍경은 산업화로 고향을 떠난 세대에게 '정신적 고향'이 됐다. 호통은 치되 끝내 품어 주는 아버지, 말수는 적어도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을 외면하지 않는 어른이었다.
이 밖에도 MBC '그대 그리고 나'(1997~1998)의 캡틴 박을 비롯해 '여명의 눈동자', '영웅시대', '궁', '식객' 등 시대와 장르를 가리지 않는 작품에서 존재감을 보였다. 한 배우가 이처럼 오래, 이처럼 다양한 세대와 만난 사례는 한국 방송사에서 드물다.
고개를 젖혀 터뜨린 '파하' 웃음, 세대를 건넌 유머
고개를 젖히고 크게 터뜨리는 '파하' 웃음은 그의 상징이었다. 1990년대에는 그의 이름을 내건 '최불암 시리즈'가 큰 인기를 끌었다. 한 배우의 이미지가 이름 그대로 하나의 유머 장르가 된 보기 드문 경우다. 이는 대중이 그를 얼마나 가깝고 편안한 존재로 여겼는지를 보여 주는 대목이기도 했다.
1992년에는 국회의원에 당선돼 잠시 정계에 몸담았으나 재선에 실패한 뒤 다시 연기자의 자리로 돌아왔다. 2018년 연극 '바람 불어 별이 흔들릴 때'로 25년 만에 무대에 섰을 때, 그는 방송 연기자도 결국 광대라고 스스로를 정의했다. 최고의 자리에서도 자신을 낮추는 태도, 그것이 오랜 세월 사랑받은 이유였다.
밥상 앞의 진행자, 그리고 아이들 곁의 어른
최불암은 진행자로서도 시청자와 만났다. 1999년부터 2008년까지 KBS '좋은나라 운동본부'를 진행했고, 2011년부터 14년간 KBS 1TV '한국인의 밥상'을 이끌었다. 전국을 돌며 지역의 음식과 그 안에 담긴 사람들의 사연을 전한 이 프로그램에서 그는 차분한 목소리와 소탈한 진행으로 '밥상 앞의 어른'이 됐다. 허리디스크 수술 이후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하차했다.
고인은 연기 밖에서도 아이들 곁을 지켰다. MBC '전원일기'를 계기로 초록우산 어린이재단과 인연을 맺은 그는 1980년대부터 오랫동안 전국후원회장으로 활동했다. 그의 장례가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장으로 치러지는 이유다.
올해 5월 MBC는 60여 년 연기 인생을 돌아보는 2부작 다큐멘터리 '파하, 최불암입니다'를 방송했다. 고인은 재활 치료에 전념하기를 바란 가족의 뜻에 따라 직접 카메라 앞에 서지는 않았다. 이 다큐는 결과적으로 생전의 마지막 헌사가 됐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조문은 30일 오전 10시부터 가능하다.
우주선의 함장,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배우
같은 날 세계 영화계도 한 명의 거장을 떠나보냈다. 영국 출신 배우 패트릭 스튜어트 경이 86세로 숨졌다. 현지 보도에 따르면 그는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스튜어트는 ‘SF 스타'이기 전에 셰익스피어 무대에서 단련된 고전 연극 배우였다. 영국 로열셰익스피어컴퍼니(RSC)에서 다진 낭랑한 목소리와 절제된 품격은 훗날 그의 가장 큰 자산이 됐다. 1987년 시작된 '스타트렉: 넥스트 제너레이션'의 장뤼크 피카드 함장은 그 결실이었다. 폭력보다 대화를, 힘보다 윤리를 앞세우는 지휘관 피카드는 SF 장르가 그려 온 리더의 모습을 새롭게 바꿨다. 이 캐릭터는 TV 시리즈와 극장판, 2020년대의 후속 시리즈까지 이어졌다.
또 하나의 대표작은 '엑스맨' 시리즈의 찰스 자비에 교수다. 2000년 첫 작품부터 영화 '로건'에 이르기까지, 그는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지성과 연민을 갖춘 스승의 이미지를 완성했다. 2010년에는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서로 다른 무대, 같은 자리
최불암과 스튜어트는 닮은 점이 많다. 두 사람 모두 연극 무대, 그것도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가까운 자리에서 연기의 기초를 닦았다. 그리고 각자의 사회에서 한 시대가 믿고 의지한 어른의 얼굴을 만들어 냈다. 한쪽은 한국 가정의 식탁과 마을 어귀에서, 다른 쪽은 은하계의 함교와 학교의 교실에서였다.
그들이 남긴 것은 개별 작품의 성취만이 아니다. 오랜 시간 같은 얼굴로 대중 곁에 머물며 쌓은 신뢰, 그 자체가 유산이다. 안방극장의 '아버지'와 스크린의 '함장'을 동시에 떠나보낸 날, 이들의 작품은 다시 한번 새롭게 호출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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