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라이프저니 | 이여름 기자] 독일 피아니스트 미하엘 코르스틱(Michael Korstick)이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의 대작 '순례의 해(Annees de Pelerinage)' 전곡을 녹음한 3장의 CD는 이 작품의 새로운 기준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음반은 리스트 피아노 음악의 핵심을 관통하는 순례 3부작에 피아노 소나타 b단조와 만년의 베네치아 관련 작품들까지 포함해, 리스트 예술 세계의 전 생애를 조망하는 기념비적 녹음이다.
'순례의 해'는 리스트가 젊은 시절부터 만년까지 약 40년에 걸쳐 완성한 피아노 모음곡으로, 그의 인생 여정과 예술적 진화를 담은 음악적 자서전이다. 단순한 여행 인상기가 아니라 문학, 미술, 자연, 종교에 대한 깊은 사색이 피아노 음악으로 승화된 작품이다.
제1년 '스위스'는 1835-36년 리스트가 마리 다구 백작부인과 스위스로 도피했던 시기의 경험을 담았다. 알프스의 장엄한 자연, 스위스 호수의 평화로움, 그리고 바이런과 실러 같은 문학가들의 영감이 녹아있다. '발렌슈타트 호수에서', '오베르만의 계곡', '샤펠의 종소리' 같은 곡들은 자연 풍경과 내면의 명상이 결합된 걸작이다.
제2년 '이탈리아'는 1837-39년 이탈리아 여행에서 받은 예술적 영감을 담았다. 단테, 페트라르카 같은 문학가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같은 화가들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됐다. '단테를 읽고 - 소나타 풍의 환상곡'은 단테의 신곡을 음악으로 재현한 대작이며, '페트라르카의 소네트 47, 104, 123번'은 이탈리아 시의 서정성을 피아노로 옮긴 명품이다.
제3년은 1867-77년 리스트 만년의 작품으로, 로마에서의 종교적 명상과 죽음에 대한 사색이 담겼다. '티볼리의 에스테 장의 분수', '달빛에 비친 성 프란체스코의 설교' 같은 곡들은 초기작의 화려함에서 벗어나 내면의 정신성을 탐구한다.
리스트는 '순례의 해'를 통해 피아노 음악의 표현 영역을 극적으로 확장했다. 단순한 기교 과시가 아니라 문학적 내러티브, 회화적 이미지, 철학적 사유를 피아노로 표현하려 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시도였다.
특히 리스트는 피아노의 오케스트라적 가능성을 극한까지 밀어붙였다. 넓은 음역대의 활용, 두터운 화성, 복잡한 대위법, 페달의 혁신적 사용을 통해 피아노 한 대로 교향곡적 웅장함을 구현했다. 동시에 '페트라르카의 소네트'처럼 극도로 섬세하고 서정적인 표현도 가능함을 보여줬다.
만년의 제3년에서는 표현주의적 경향을 예고하는 실험적 화성과 간결한 텍스처가 나타난다. 불협화음의 사용, 조성의 모호함, 침묵의 활용 등은 20세기 음악을 예견한다.
독일 피아니스트 미하엘 코르스틱은 리스트 전문가로서 이 방대한 작품군을 일관된 비전으로 완성해냈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3년에 걸쳐 프포르츠하임 콩그레스 센터에서 녹음된 이 음반은 스타인웨이 D 피아노로 연주됐다.
코르스틱의 해석은 화려한 기교와 깊이 있는 음악성이 균형을 이룬다. 제1년 '스위스'에서 그는 알프스의 장엄함을 웅장한 음향으로 표현하면서도, 호수의 고요함을 묘사하는 대목에서는 극도로 섬세한 터치를 선보인다. '오베르만의 계곡'에서 내면의 고뇌를 표현하는 그의 연주는 철학적 깊이를 지닌다.
제2년 '이탈리아'에서는 더욱 드라마틱한 해석이 돋보인다. '단테를 읽고'는 지옥에서 천국까지의 여정을 극적인 다이내믹과 색채감으로 그려낸다. 포르테시모의 폭발적 음향과 피아니시모의 투명한 아름다움이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페트라르카의 소네트'에서는 서정적 칸타빌레가 일품이다. 노래하는 듯한 선율 처리와 풍부한 페달링으로 이탈리아 벨칸토의 정수를 표현한다.
제3년에서 코르스틱은 만년 리스트의 금욕적 정신성을 포착한다. '티볼리의 분수'에서 물의 흐름을 묘사하는 아르페지오는 기교적이면서도 명상적이다. '장례 행렬'이나 '우울한 곤돌라' 같은 후기작에서는 죽음의 그림자를 담담하면서도 깊이 있게 표현한다.
이 세트는 '순례의 해' 3부작 외에도 중요한 작품들을 포함한다. CD 1에 수록된 피아노 소나타 b단조(1997년 녹음)는 리스트 피아노 음악의 정점이다. 약 30분에 달하는 이 단일 악장 소나타는 교향시적 구조와 순환 주제 기법으로 19세기 피아노 소나타의 새 지평을 열었다. 코르스틱은 이 거대한 구조를 명확한 아키텍처로 제시하면서도 열정적 추진력을 잃지 않는다.
CD 2에는 '이탈리아' 외에도 리스트 만년의 작품들이 수록됐다. '자장가', '모소니의 무덤에서', '바그너의 무덤에서', '우울한 곤돌라 2번', '장례 전주곡과 장례 행진곡' 등은 모두 죽음과 애도를 주제로 한다. 베네치아에서 바그너가 사망한 후 쓴 '우울한 곤돌라'는 특히 예언적 작품으로, 검은 곤돌라를 타고 가는 장례 행렬을 묘사한다. 코르스틱의 연주는 이 어두운 비전을 강렬하게 전달한다.
CD 3의 '베네치아와 나폴리'는 원래 제2년의 보충곡으로 작곡됐으나 독립적으로 출판됐다. 이탈리아 민속 음악의 선율을 활용한 이 작품들은 화려한 기교와 이탈리아적 열정이 넘친다. 특히 '타란텔라'는 리스트의 기교적 화려함이 극대화된 곡으로, 코르스틱의 완벽한 테크닉이 빛을 발한다.
프포르츠하임 콩그레스 센터의 어쿠스틱은 스타인웨이 D의 풍부한 음색을 최상으로 담아냈다. 베른하르트 한케(Bernhard Hanke)의 녹음 감독과 마스터링은 피아노의 넓은 다이내믹 레인지와 섬세한 음색 변화를 생생히 재현한다. 특히 저음부의 웅장함과 고음부의 투명함이 모두 살아있어, 리스트 음악의 오케스트라적 스펙트럼이 온전히 전달된다.
표지는 베네치아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과 산 마르코 운하의 석양 풍경을 담았다. 핑크와 퍼플 그라데이션의 하늘과 물에 비친 실루엣이 '순례의 해' 특히 베네치아 관련 작품들의 낭만적 정서를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이 음반은 리스트 피아노 음악의 핵심을 망라한 결정판이다. '순례의 해' 3부작은 리스트의 예술적 진화를 보여주는 동시에, 19세기 낭만주의 피아노 음악의 정수를 대표한다. 젊은 시절의 열정적 낭만주의에서 만년의 정신적 초월까지, 한 예술가의 생애 전체가 음악으로 기록돼 있다.
미하엘 코르스틱의 이번 전곡 녹음은 기술적 완벽함과 음악적 깊이를 겸비한 해석으로, 리스트 애호가는 물론 낭만주의 피아노 음악에 관심 있는 모든 이들에게 필수적인 음반이다. 특히 '순례의 해'를 처음 접하는 청자에게 이 작품의 다채로운 매력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입문서이자, 이 작품을 이미 아는 이들에게는 새로운 통찰을 제공하는 텍스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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