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라이프저니|고요비 기자] 20세기 영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의 1965년작 '블루 카우치 위의 엔리에타 모라에스의 초상(Portrait of Henrietta Moraes on a Blue Couch)'은 짙은 청색 카우치 위에 뒤틀린 채 누운 누드의 인물, 그리고 그 옆 살짝 열린 문이라는 단순한 구도 속에 베이컨 특유의 격렬한 화법과 실존적 메시지가 응축돼 있는 작품이다. 현재 영국 맨체스터 아트 갤러리(Manchester Art Gallery)에 소장돼 있으며, 마틴 해리슨이 집필한 베이컨 카탈로그 레조네(2016)에도 주요 작품으로 수록돼 있다.
누구인가, 프랜시스 베이컨
프랜시스 베이컨은 1909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주로 활동한 화가다. 정규 미술교육을 거의 받지 않은 자수성가형 화가로, 젊은 시절에는 가구·실내장식 디자이너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1944년 작 '십자가 처형 기단의 인물을 위한 세 개의 습작(Three Studies for Figures at the Base of a Crucifixion)'을 런던 르페브르 갤러리에서 발표하며 단숨에 영국 현대미술의 중심 인물로 떠올랐다.
이후 베이컨은 루치안 프로이트, 프랭크 아우어바흐 등과 함께 이른바 '런던 스쿨(School of London)'로 불리는 인물화 중심의 화가군을 형성했다. 추상표현주의와 미니멀리즘이 세계 미술계를 주도하던 시기, 베이컨은 끝까지 인간의 몸과 얼굴을 화면 중심에 두면서도 그것을 전통적인 재현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로 해체해 그렸다. 벨라스케스, 렘브란트, 고야 등 옛 거장들의 회화 전통을 자기 시대의 불안과 폭력의 언어로 재해석했다는 점에서, 그는 '구상 회화의 마지막 거장'이자 '전후(戰後) 실존주의 회화의 정점'으로 평가받는다.
화면 속 풍경
이 작품의 모델은 엔리에타 모라에스. 그녀는 베이컨과 함께 소호의 '컬러니 룸 클럽', '프렌치 하우스' 등을 드나들던 보헤미안 그룹의 일원이자, 베이컨이 즐겨 그렸던 친구이자 뮤즈였다. 베이컨은 1960년대에 보그 사진가 존 디킨에게 모라에스의 누드 사진을 찍게 한 뒤 이를 바탕으로 여러 점의 초상을 제작했는데, 이 작품은 그 연작 중에서도 사진 자료에서 한층 더 벗어나 독자적인 구성을 보여주는 예로 꼽힌다.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짙은 청색 카우치 위에 인물이 비스듬히 누워 있다. 인물의 신체는 살빛과 흰색, 붉은색이 거칠게 뒤섞이며 근육과 뼈의 구조가 그대로 드러난 듯한 형태로 '해체'돼 있다. 베이컨은 캔버스 바탕을 거의 그대로 노출시킨 채 묽게 희석한 물감을 빠르게 쓸어 발라, 거칠고 즉흥적인 붓질의 흔적이 그대로 살아 있는 질감을 만들어냈다.
화면 오른쪽에는 황동 손잡이와 열쇠가 달린 회색 문이 열려 있다. 이 문은 옅은 회색 물감을 흰색 바탕 위에 물기 있게 덧칠해 표현됐으며, 인물의 사적인 순간을 누군가 곧 들여다볼 듯한 긴장감을 부여한다. 그 옆으로 가늘게 비치는 붉은 띠는 문 너머에 또 다른 방, 또는 붉은 공간이 존재함을 암시한다. 한편 베개 위쪽에 그려진 둥근 형상은 반사된 이미지가 보이지 않는데도 거울처럼 보이도록 처리돼, 일부 연구자들은 이를 벨라스케스의 '로크비의 비너스'에 등장하는 거울 도상을 의도적으로 비틀고 전복시킨 장치로 해석한다.
인간 존재의 '관계'와 '육체성'
이 작품이 지니는 의미는 단순히 '한 인물의 누드 초상'을 넘어선다. 베이컨은 1960년대 들어 자신의 가까운 지인들 — 모라에스, 루치안 프로이트, 조지 다이어, 이자벨 로스손 등 — 을 모델로 한 초상 연작을 집중적으로 제작했는데, 이는 그가 인간 존재를 '관계'와 '육체성'의 차원에서 탐구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변화였다. 모라에스를 그린 이 작품은 그러한 1960년대 초상 연작의 정점에 위치하며, 동시에 벨라스케스라는 회화사의 거대한 전통을 자기 식으로 재해석·전복했다는 점에서 미술사적 가치를 지닌다.
또한 이 작품이 영국의 대표적 공립 미술관인 맨체스터 아트 갤러리에 소장돼 있고, 베이컨 재단이 발간한 공식 카탈로그 레조네에 핵심 작품으로 기록돼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작품의 위상을 뒷받침한다. 인물을 '고기(meat)'에 가까운 물질성으로 환원하면서도 그 안에 인간적 취약함과 고독을 담아낸다는 점에서, 이 그림은 베이컨 회화 세계의 핵심 문법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고립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의 서늘함
작품 앞에 서면 가장 먼저 다가오는 것은 '고립'의 감각이다. 짙은 어둠 속, 푸른 카우치는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일어나 인물을 그대로 삼켜버릴 듯 출렁인다. 그 위에 놓인 몸은 잠과 고통, 쾌락과 폭력의 경계 어디쯔음에서 멈춰버린 듯, 어느 한순간으로도 완전히 고정되지 않는다.
화면 오른쪽의 노란 문손잡이는 어둡고 폐쇄적인 화면 안에서 거의 유일하게 빛을 발하는 지점이다. 이 손잡이는 마치 탈출구를 가리키는 신호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누군가 이 문을 열고 들어와 지금의 장면을 목격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함께 던진다. 안도와 위협이 한 점의 색채 속에 동시에 응축돼 있는 셈이다. 전체적으로 이 그림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기보다, 보는 이의 신체에 직접 와닿는 감각 —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존재의 떨림, 그리고 그 떨림을 지켜보는 또 다른 시선의 서늘함 또는 두려움 — 을 그대로 전달한다.
현대 회화에 남긴 흔적
베이컨의 회화는 이후 구상 회화의 흐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사진, 영화 스틸, 의학 도판 등 다양한 시각 자료를 수집해 이를 변형·왜곡함으로써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 작업 방식을 선보였는데, 이는 1980년대 이후 신표현주의 계열 화가들은 물론, 제니 사빌, 마를렌 뒤마, 세실리 브라운 등 동시대 인물화 작가들에게도 직접적인 참조점이 됐다. 추상미술과 개념미술이 미술계의 주류를 이루던 시기에도 인간의 몸과 얼굴이라는 가장 오래된 주제가 여전히 강력한 표현의 영역일 수 있음을 입증한 화가로 평가된다. 영화, 사진 등 인접 매체의 작업자들 사이에서도 그의 화면 구성과 색채 감각은 자주 언급되는 참조 대상이다.
당대 생존·근현대 작가 최고가
베이컨은 미술시장에서도 20세기 화가 중 최상위권에 속한다. 1969년작 '루치안 프로이트를 위한 세 개의 습작(Three Studies of Lucian Freud)'은 2013년 11월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1억4240만5000달러(약 1900억 원대)에 낙찰돼, 당시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를 기록했다. 2008년에는 '트립티크 1976'이 소더비 뉴욕 경매에서 4420만 파운드(약 8600만 달러)에 팔려 당대 생존·근현대 작가 최고가를 세웠으며, 2023년 11월에는 '움직이는 인물(Figure in Movement, 1976)'이 크리스티 뉴욕에서 5200만 달러에 낙찰됐다.
시장 분석 플랫폼 뮤추얼아트에 따르면 최근 1년간 베이컨의 회화 작품은 평균 800만 달러 선에서 거래되고 있으며, 판화·종이 작품은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대(수천~수만 달러)에서 활발히 유통되고 있다. 그의 작품은 뉴욕 현대미술관(MoMA), 런던 테이트,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더블린 휴 레인 갤러리, 빈 알베르티나 등 세계 주요 미술관에 소장돼 있으며, 2026년에는 독일 만하임 쿤스트할레와 이탈리아 토리노 라 베나리아에서 대규모 전시가 예정돼 있어 그에 대한 학술적·시장적 관심은 앞으로도 이어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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