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라이프저니|고요비 기자] 스코틀랜드가 낳은 위대한 풍경화가 조셉 파쿼슨(Joseph Farquharson, 1846~1935)이 캔버스에 담은 여름 오후의 고요함이 보는 이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스코틀랜드의 눈보라 몰아치는 황야와 양떼 그림으로 유명한 그가 남긴 이례적인 여름 풍경화 'Summertime'은 그의 예술 세계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걸작이다.
겨울의 화가, 그가 붓을 든 이유
조셉 파쿼슨은 1846년 5월 4일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프랜시스 파쿼슨은 아들이 토요일에만 자신의 물감통을 쓸 수 있도록 허락했지만, 그 제한된 환경이 오히려 소년의 재능에 불을 댕겼다. 열두 살에 처음으로 자신만의 물감을 갖게 된 조셉은 불과 1년 만에 왕립 스코틀랜드 아카데미에 첫 작품을 출품하며 천재성을 세상에 알렸다.
그는 1860년대 에든버러 트러스티스 아카데미에서 기초를 다지고 왕립 스코틀랜드 아카데미 라이프 스쿨에서 인체를 탐구했다. 1873년에는 런던 왕립 아카데미에 처음으로 작품을 내걸었고, 1880년부터 3~4차례에 걸쳐 파리에서 겨울을 보내며 벨라스케스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카롤루스-뒤랑(Carolus-Duran) 아래서 빛과 색채의 언어를 새롭게 익혔다. 1880~90년대에는 북아프리카로도 여러 차례 발걸음을 옮기며 이국적 빛에 대한 감각을 넓혔다.
그의 화업은 훈장으로 빛났다. 1900년 왕립 아카데미 준회원, 1915년 정회원, 1922년 시니어 정회원으로 선출됐으며, 왕립 아카데미에 200점 이상, 왕립 예술학회에 73점, 파인 아트 소사이어티에 181점을 출품했다. 테이트 갤러리와 왕립 예술대학에도 작품을 남긴 그는 1935년 88세를 일기로 자신이 사랑한 땅 스코틀랜드 핀젠(Finzean)에서 눈을 감았다.
미술사에서 그의 위치는 독특하다.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 자연주의 풍경화의 정점에 서 있으면서도, 인상주의의 빛 처리 기법과 사실주의의 치밀한 관찰력을 동시에 흡수한 화가로 평가받는다. 특히 눈 쌓인 황야에서 양떼를 이끄는 목동을 담은 겨울 풍경 시리즈로 대중적 인기를 얻어 조(Joe)라는 애칭 대신 '눈보라 속의 파쿼슨]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붓끝에서 피어난 여름의 시학
유화, 캔버스에 유채, 66x52.5cm 크기의 'Summertime'은 파쿼슨의 작품 세계에서 이례적인 존재다. 겨울 황야의 화가가 포착한 여름 숲 속 한낮의 정경은 그 자체로 반전이자 계시다.
화면 속 한 젊은 여성이 커다란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댄 채 무릎 위의 책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흰 드레스는 여름 햇살을 머금어 은은하게 빛나고, 그 옆 땅바닥에는 양산과 장갑이 무심하게 놓여 있다. 화면 전체를 뒤덮은 짙고 풍성한 초록빛 수목은 그녀를 세상으로부터 포근하게 감싸 안는다.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황금빛 햇살이 배경 공간 깊숙이 스며들며 신비로운 빛의 깊이감을 만들어낸다.
파쿼슨은 이 작품에서 인상주의적 붓터치와 빅토리아 시대 사실주의를 절묘하게 융합했다. 나뭇잎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묘사하는 대신 짧고 생동감 있는 붓질로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시각적 진동을 화면에 새겼다. 파리에서 카롤루스-뒤랑에게 익힌 빛의 처리 방식이 스코틀랜드 여름의 부드러운 정취와 만나 독창적인 화면을 완성한 것이다. 이 작품은 에버딘셔(Aberdeenshire) 핀젠 사유지 인근 숲에서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며, 작가가 평생 사랑한 고향 땅의 여름이 고스란히 담겼다.
시간이 멈춘 오후, 그림이 전하는 감정의 결
이 그림 앞에 서면 소음이 사라진다. 세상의 분주함과 단절된 채 오직 책과 자연과 햇살만이 존재하는 그 오후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흰 드레스의 여인은 특정 인물이 아니라 이상화된 고요함 그 자체처럼 보인다. 그녀가 읽는 책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독자는 자연스럽게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여름날의 기억을 그 자리에 겹쳐 놓게 된다.
파쿼슨이 평생 즐겨 그린 겨울의 엄혹함과 비교할 때, 이 작품이 전달하는 감정의 결은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하다. 눈보라 속 양떼의 생존이 숭고함과 긴장을 자아낸다면, 'Summertime'은 그 반대편에서 삶의 가장 사치스러운 순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평화로운 오후를 노래한다. 영국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나 앨프리드 테니슨의 시 한 구절이 절로 떠오를 만큼, 이 그림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시다.
간접적이고 뿌리 깊은 유산
파쿼슨이 현대 회화에 미친 영향은 직접적이기보다 간접적이고 뿌리 깊다. 그는 야외 직접 관찰을 통해 자연광을 캔버스에 포착하는 플레인에어(plein air) 회화의 영국적 전통을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굳건히 이어간 화가 중 한 명이다. 빛이 물체와 대기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치밀하게 탐구한 그의 방식은 이후 영국 풍경화 전통과 삽화적 자연주의 화풍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의 겨울 풍경 시리즈는 빛이 극도로 제한된 환경에서도 색채의 풍부함을 잃지 않는 방법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후대 화가들에게 빛과 색채의 관계를 재고하게 만드는 귀중한 참조점이 되었다. 오늘날 영국 자연주의 및 사실주의 풍경화 계보를 논할 때 파쿼슨의 이름은 빠지지 않으며, 그의 작품은 미술 교육 현장에서도 빛의 표현과 대기 묘사의 모범 사례로 자주 인용된다.
꾸준히 오르는 별
조셉 파쿼슨의 작품은 영국 및 국제 경매 시장에서 꾸준하고 안정적인 수요를 유지하고 있다. 크리스티, 소더비, 본햄스 등 주요 경매 하우스에서 정기적으로 거래되며, 그의 시그니처인 겨울 양떼 풍경 대작은 수만 파운드에서 수십만 파운드에 이르는 낙찰가를 기록해왔다.
특히 대형 겨울 풍경화의 경우 10만 파운드를 훌쩍 넘기는 사례도 있었으며, 소품이나 습작은 수천 파운드 선에서 거래된다. 'Summertime'처럼 그의 작품 세계에서 이례적인 여름 풍경화는 희소성이 더해져 컬렉터들 사이에서 특히 높은 관심을 받는다. 현재 이 작품은 개인 소장이다.
파쿼슨의 작품은 단순한 투자 대상을 넘어 빅토리아 시대 영국 미술의 정수를 간직한 역사적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시장 전문가들은 그의 주요 작품 가격이 장기적으로 우상향할 것이라는 전망을 유지하고 있으며, 영국 낭만주의 자연주의 회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수록 파쿼슨의 위상도 함께 재조명될 것으로 보인다.
나무 그늘 아래, 영원히 책을 읽는 여인
'Summertime' 속 여인은 오늘도 핀젠의 숲 어딘가에서 책을 읽고 있다. 세월도, 소음도, 그 고요한 오후를 깨뜨리지 못한다. 겨울의 화가가 포착한 단 한 번의 여름, 그 기적 같은 순간이 캔버스 위에서 영원히 살아 숨쉰다. 조셉 파쿼슨은 그렇게 우리에게 자연과 인간이 가장 아름답게 공존할 수 있는 찰나를 선물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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