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라이프저니 | 이여름 기자] EMI 클래식스를 통해 발매된 세르쥬 첼리비다케가 뮌헨 필하모닉을 이끌고 연주한 바그너 관현악 작품집은 첼리비다케의 독보적인 음악 철학이 바그너 해석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보여주는 귀중한 기록이다. 1993년 2월 3일과 4일 뮌헨 필하모니에서 녹음된 이 라이브 앨범은 첼리비다케가 생전에 상업 녹음을 극도로 제한했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그는 "음악은 순간의 예술"이라며 스튜디오 녹음을 거부했고, 오직 라이브 공연만이 진정한 음악적 경험이라 믿었다. 이 앨범은 그가 말년에 뮌헨 필하모닉과 이룬 예술적 정점을 담은 희소한 기록물로, 첼리비다케 사후 그의 유산을 이해하는 핵심 자료다.
첼리비다케의 바그너 해석은 '느림의 미학'으로 집약된다. 'Die Meistersinger von Nurnberg(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1막 전주곡은 12분 28초로 연주돼 일반적인 해석보다 2~3분 길다.
'Tannhauser' 서곡 역시 16분 57초로 여유로운 템포를 유지한다. 그는 빠른 템포로 음악의 표면을 스치듯 지나가는 대신, 각 음표와 화성의 울림이 완전히 소멸할 때까지 기다렸다. 이러한 접근은 바그너 음악의 장대한 건축미와 화성적 깊이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수록곡들은 바그너의 대표작에서 발췌한 관현악 명곡들이다. 'Die Meistersinger von Nurnberg' 전주곡은 바그너의 유일한 희극 오페라의 서막으로, 중세 뉘른베르크 마이스터징어(명가수) 길드의 전통과 예술의 승리를 웅장하게 그린다. 'Siegfried-Idyll'(지그프리트 목가)은 바그너가 아들 지그프리트의 탄생과 아내 코지마를 위해 작곡한 실내악 규모의 작품으로, 그의 가장 서정적이고 개인적인 음악으로 평가받는다.
'Gotterdammerung(신들의 황혼)' 중 장송 행진곡은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의 마지막 오페라에서 영웅 지그프리트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면으로, 바그너 관현악법의 극치를 보여준다. 'Tannhauser(탄호이저)' 서곡은 성(聖)과 속(俗)의 갈등이라는 오페라의 핵심 주제를 관현악으로 압축한 작품으로, 순례자의 합창 주제와 비너스베르크의 관능적 음악이 대비를 이룬다.
첼리비다케는 이들 작품을 통해 바그너 음악의 본질을 '소리의 현상학'으로 접근했다. 그의 철학은 음악이 단순한 음표의 나열이 아니라 공간 속에서 울리고 변화하며 소멸하는 살아있는 유기체라는 믿음에 기반한다. 23분 45초에 달하는 'Siegfried-Idyll' 연주는 이러한 철학의 극치를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18~20분대에 연주되는 이 곡을 그는 각 악구의 호흡과 울림을 최대한 살려 전개했다.
이 음반은 첼리비다케와 뮌헨 필하모닉이 20년 이상 함께 일구어낸 음악적 교감의 결실이다. 그는 1979년부터 1996년 타계할 때까지 뮌헨 필의 상임지휘자로 재직하며 오케스트라를 자신의 음악 철학을 구현하는 도구로 완성했다. 바그너의 거대한 음향 세계를 느린 템포 속에서 정밀하게 조각해낸 이 녹음은, 빠르고 극적인 해석이 주류를 이루던 당시 바그너 연주 전통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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