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라이프저니|이주상 기자] 가을이 깊어가는 부산의 밤, 4천 개의 좌석이 놓인 영화의전당 루프씨어터가 다시 한번 거대한 야외 극장으로 변신한다.
부산국제영화제의 대표 프로그램 '오픈 시네마'가 올해도 어김없이 관객을 찾아온다. 10월 7일부터 14일까지 8일간, 매일 저녁 8시면 코미디와 성장 드라마, 공포, 애니메이션까지 서로 다른 장르의 영화가 밤하늘 아래에서 펼쳐진다. 실내 상영관에서는 느낄 수 없는 야외 상영 특유의 개방감과 낭만이야말로 이 프로그램이 해마다 관객을 불러 모으는 이유다.
만화에서 스크린으로, 두 소녀 두 청춘의 이야기
올해 라인업의 문을 여는 것은 인기 만화를 원작으로 한 두 편의 실사·애니메이션 작품이다. 거장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신작 '룩백'은 후지모토 타츠키의 동명 만화를 스크린으로 옮긴 작품으로, 만화라는 매개를 통해 마음을 나누게 된 두 소녀의 우정과 창작의 즐거움, 그리고 이별이 남긴 아픔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뒤이어 부산에서 최초로 공개되는 타케무라 켄타로 감독의 '아름다운 초저녁달'은 야마모리 미카의 동명 만화가 원작이다. 자신감 부족, 타인을 향한 선망, 유치할 만큼 솔직한 질투심까지 청춘의 복잡한 감정을 미치에다 슌스케와 안자이 세이라가 상큼한 케미스트리로 완성한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짙어지는 공포, 두 편의 문제작
밤이라는 시간과 가장 잘 어울리는 장르는 역시 공포다. '홀리 보이'(2025)로 독보적인 장르 감각을 입증했던 파올로 스트리폴리 감독은 '이탈리아판 '기생충''이라는 평가와 함께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을 뒤흔든 신작 '스파이럴'을 들고 부산을 다시 찾는다.
한 가족이 감춰온 비밀에서 비롯된 거래가 세대를 넘어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는 이야기는, 아드리아노 잔니니를 비롯한 이탈리아 대표 배우들의 강렬한 연기와 맞물려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밀도 높은 스릴러로 완성됐다.
'셔터'(2004), '랑종'(2021) 등을 통해 아시아 호러의 흐름을 이끌어온 반종 피산다나쿤 감독 역시 신작 '인헤릿'으로 관객을 맞는다. 태국에서 큰 인기를 얻은 소설 '악마의 후계자'(1991)를 원작으로,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한 가문의 비밀과 그 속에 도사린 공포를 한 겹씩 벗겨낸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았던 태국의 배우 겸 모델 다위까 호네가 관능적인 워라낫 할머니 역을 맡아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다.
손그림 선율과 프랑스식 유머가 채우는 밤
오픈 시네마에서 유일하게 만날 수 있는 애니메이션 '바이올리니스트'는 2026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에서 장편 대상과 음악상을 동시에 품은 화제작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령 싱가포르를 배경으로, 음악을 매개로 가까워진 한 소녀와 소년의 사랑과 성장을 섬세한 손그림과 클래식 선율로 애틋하게 담아낸다.
웃음을 책임질 작품도 있다. '내일은 이름이 있다'는 살아있는 전설 이자벨 위페르가 카메라에 잡혀서는 안 되는 만년 엑스트라로 변신한다는 설정만으로도 이미 유쾌함을 예고한다. 상드린 키베를랑부터 다이앤 크루거까지 프랑스 톱스타들이 '본인'으로 깜짝 출연하는 이 코미디는, 이자벨 위페르와 마르크 피투시 감독이 직접 야외상영장 무대에 올라 관객에게 소개할 예정이어서 더욱 특별하다.
한국영화의 자존심과 낭만적인 클로징, 대소동극에서 첫사랑까지
오픈 시네마에서 유일하게 상영되는 한국영화 '세대유감'은 가문을 지키기 위해 굿판을 벌이려는 아버지와, 자신의 인생을 꼬이게 만드는 조상들을 퇴마하려는 아들이 벌이는 난리법석 가족 대소동극이다. 정재영, 이이경, 김주령, 김아영 등 배우들의 코믹한 호흡이 이 영화가 가진 가장 큰 재미다.
'언터처블: 1%의 우정'(2011)의 에리크 톨레다노 & 올리비에 나카슈 감독은 신작 '그저 환상일 뿐'으로 관객을 1985년 파리로 데려가며 야외상영장의 대미를 장식한다. 짝사랑하는 마리옹 앞에서 근사해 보이고 싶은 마음에 형의 헤어스프레이만 낭비하고 마는 열세 살 뱅상의 좌충우돌 첫사랑 이야기다.
'라붐'이 안겨준 풋풋한 설렘과 '응답하라 1988'식 유머를 동시에 품은 이 작품은, 웃음과 눈물이 절묘하게 포개지는 올가을 가장 사랑스러운 타임슬립이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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