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라이프저니|박지원 기자] 반세기 넘게 굴뚝 연기를 뿜어내던 산업단지가 조용히 변신하고 있다. 쇳물 대신 데이터가 흐르고, 선박 엔진 대신 서버 팬이 돌아가는 시대. 인공지능(AI)이 불러온 전력 대란이 역설적으로 사양길을 걷던 전통 중공업에 새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
'전력권'이 곧 자산…비어가는 공장 터의 반전
AI 데이터센터 건설의 최대 난관은 땅도, 자본도 아니다. 바로 '전기'다. 분산에너지활성화 특별법 시행 이후 10㎿ 이상 전력을 사용하는 데이터센터는 전력계통 영향평가를 의무적으로 통과해야 한다. 그러나 수도권에서는 이 문턱을 넘기가 사실상 하늘의 별 따기다. 한국전력 집계에 따르면 법 시행 후 데이터센터 관련 전력 신청 53건 중 서울에서 허가를 받은 사례는 단 1건에 그쳤다.
이 규제 장벽이 오히려 지방 산업단지의 가치를 폭등시키고 있다. 수십 년간 대량의 전력을 소비해온 철강·화학 공장들은 이미 수십~수백 ㎿급 송전망이 부지 안까지 들어와 있다. 신규 전력망을 끌어오는 데 수년이 걸리는 데이터센터 개발사 입장에서 이 '전력이 딸린 땅'은 더할 나위 없는 적지다. 업계에서는 "전력권을 가진 땅이 이 시대의 핵심 자산"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다.
경북 포항이 그 상징적 사례다. 전기료를 감당하지 못해 문을 닫은 합금철 공장 부지가 약 2조원 규모의 AI 데이터센터 사업지로 탈바꿈, 오는 6월 착공에 들어간다. 동국홀딩스는 인천·포항 등지의 유휴 공장 부지와 기존 전력 인프라를 활용한 데이터센터 투자를 공식화했고, 현대제철 역시 올해 초 가동을 중단한 인천 공장 부지의 활용 방안을 본격 검토 중이다. 전기료에 짓눌려 멈춰 선 공장이, 이제 전기를 팔고 데이터를 품는 공간으로 재탄생하는 아이러니가 현실이 됐다.
바다를 달리던 엔진, 데이터센터 전력을 책임지다
발상의 전환은 부지에만 그치지 않는다. 조선업계는 수십 년간 갈고닦은 선박 엔진 기술을 육상 발전 시장으로 빠르게 확장하고 있다.
핵심 배경은 가스터빈의 공급 한계다. AI 붐으로 데이터센터용 자체 발전 설비 수요가 폭증하고 있지만, 전통적 발전원인 가스터빈은 납기가 길고 가격도 천문학적이다. 이 틈을 선박 엔진 업체들이 파고들었다. 선박의 추진과 선내 발전에 쓰이던 중속 4행정 엔진은 가스터빈보다 조달이 빠르고 비용도 합리적이다. 무엇보다 한국 조선업체들은 이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이미 보유하고 있다.
HD현대중공업은 자사의 '힘센(HiMSEN)' 엔진을 기반으로 미국 에너지 인프라 개발기업과 발전설비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공급 규모 684MW, 계약 금액 6271억원으로 회사 역사상 가장 큰 발전용 엔진 계약이다. HD건설기계는 전북 군산에 신규 엔진 공장을 올 하반기 가동하며 데이터센터 전용 초대형 엔진 생산 체제를 구축한다. 2030년까지 발전기용 엔진 매출을 현재의 두 배 이상인 8000억원 규모로 키우겠다는 목표도 세웠다. STX엔진, 한화엔진, HD현대마린엔진도 각각 4행정 엔진 및 핵심 부품 공급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30년까지 늘어나는 미국 전력 수요의 절반 이상이 데이터센터에서 비롯될 것으로 전망했다. 전력망이 촘촘한 한국과 달리, 광활한 북미 대륙의 외곽 데이터센터는 자체 발전이 필수다. 수출 전선은 이미 활짝 열렸다.
더 강하고 더 가벼운 철…고부가 강재 시장의 개막
데이터센터는 외관만 놓고 보면 평범한 대형 건물처럼 보이지만, 내부는 전혀 다른 세계다. 고성능 GPU 서버, 대규모 전력 설비, 산업용 냉각 장치가 층층이 집적되는 탓에 일반 건물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하중이 크다. 이를 버티는 구조재부터 이중 바닥재, 케이블 지지대, 냉각 설비 프레임까지 곳곳에 철이 들어간다. 뿐만 아니라 에너지저장장치(ESS) 케이스와 송전 철탑에도 고강도·고내열·저탄소 특수 강재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범용 철강 제품보다 수익성이 높은 고부가가치 시장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현대제철은 구조용 강재부터 ESS 인클로저, 송전 철탑용 앵글까지 데이터센터 관련 강재 전 품목을 공급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고 북미 시장을 집중 공략하고 있다. ESS 인클로저 분야에서는 올해 수주 목표를 지난해의 다섯 배 수준으로 상향했다. 동국제강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폭 3m급 대형 H형강 제작이 가능하다는 강점을 살려 '디-메가빔'이라는 데이터센터 특화 제품을 출시, 기둥 수를 줄이고 공간 효율을 높이는 차별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삼성중공업은 한발 더 나아가 조선 DNA 자체를 데이터센터에 이식했다. 선박 건조 기술을 응용한 부유식 데이터센터(FDC)가 그것이다. 해수를 냉각수로 활용해 발열 문제를 원천 해결하고, 바다 위에 띄우는 방식으로 부지 제약까지 완전히 없앴다. 미국 데이터센터 전문 전시회에서 미국선급협회와 로이드선급 양측으로부터 50MW급 개념설계 인증을 동시에 획득하며 상용화 가능성을 공식 인정받았다.
AI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는 지난해에만 세계 발전량 증가율의 여섯 배 속도로 성장했다. 공급은 수요를 따라잡지 못하고, 그 간극에서 한국 중공업의 오래된 기술들이 새로운 가치로 소환되고 있다. 디지털 문명의 연료를 가장 아날로그적인 산업이 공급하는 시대. 굴뚝의 불씨가 꺼지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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