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 소피아 바시(Sofia Bassi) ‘Dust to Dust’, 죽음과 존재의 경계를 캔버스에 새긴 작품
고요비 기자
klifejourney2025@gmail.com | 2026-04-08 00:01:59
[K라이프저니|고요비 기자] 소피아 바시(Sofia Bassi, 1913~1998)는 20세기 멕시코 미술사에서 오랫동안 과소평가되어 온 초현실주의 화가다. 이탈리아계 이민 가정에서 태어나 멕시코시티에서 성장한 그녀는, 레오노라 캐링턴(Leonora Carrington), 레메디오스 바로(Remedios Varo)와 함께 멕시코 초현실주의 여성 화가 3인방으로 거론되면서도 유독 국제적 조명을 덜 받아 왔다.
바시는 멕시코 국립예술원(INBA)에서 수학하며 유럽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흡수했지만, 단순히 달리나 에른스트의 아류에 머물지 않았다. 그녀는 아즈텍 신화, 멕시코 민간신앙의 죽음 의례, 그리고 가톨릭적 종말론을 자신만의 화면 언어로 녹여 내며 '멕시코적 초현실주의'의 독자적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술사가들은 그녀를 '라틴아메리카 여성 미술의 숨겨진 대륙'이라 부르기도 한다.
‘Dust to Dust’ - 화법과 화면의 구조
1968년작 ‘Dust to Dust(먼지에서 먼지로)’는 바시의 화풍이 절정에 이른 시기의 작품이다. 화면은 전체적으로 짙은 청록색(teal)과 심연의 흑색이 지배하며, 그 위로 소용돌이치는 구름이 하늘을 뒤덮는다. 화면 중앙에는 인간의 형상을 닮은 두 개의 거대한 형체가 솟구쳐 있다. 머리를 앞으로 늘어뜨린 채 서 있는 이 존재들은 구체적인 윤곽 없이 흘러내리듯 묘사되어, 살아 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중간 상태의 영적 존재를 연상시킨다. 바시는 임파스토(impasto) 기법과 유연한 붓질을 혼용해 형체에 동시에 견고함과 유동성을 부여했다.
화면 우측 하단에는 줄을 잡고 서 있는 작은 인물이 등장한다. 줄무늬 의상의 이 인물은 마치 연극의 연출자처럼, 혹은 죽음의 의식을 집전하는 사제처럼 두 형체를 향해 팔을 뻗고 있다. 배경의 암흑 속에는 희미한 얼굴들이 군집해 있어, 죽음 이후의 세계 혹은 집단적 무의식을 암시한다. 전체 화면에서 유일하게 빛이 배어 나오는 두 형체의 중심부는, 어둠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영혼의 불꽃처럼 읽힌다.
그림의 시대적 맥락
제목 ‘Dust to Dust’는 구약성경 창세기의 구절 -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 에서 직접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바시는 단순한 종교적 도해에 그치지 않는다. 이 작품은 1968년이라는 시대적 맥락, 즉 맥시코 학생 운동과 틀라텔롤코 학살(Tlatelolco massacre)이 벌어진 그해의 공포와 애도를 배경으로 탄생했다는 점에서 더욱 무게를 지닌다.
두 형체는 죽음을 맞이한 개인이자 민족의 집단적 영혼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줄을 쥔 작은 인물은 생사의 경계에 서 있는 산 자의 은유로 읽힌다. 바시는 초현실주의적 상상력을 통해 죽음을 공포가 아닌 존재의 순환, 먼지와 빛 사이의 영원한 여정으로 승화시킨다
캔버스 앞에 선 자의 내면
이 그림 앞에 서면, 처음엔 서늘함이 온다. 청록의 냉기와 질은 어둠이 뒤섞인 공간은 마치 의식이 꺼져 가는 순간의 시야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오래 바라볼수록 두 형체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온다. 그것은 굴복이 아니라 경청이다. 땅으로부터 올라오는 무언가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
'먼지에서 먼지로' - 그 짧은 문장이 담은 무한한 시간이 화면 전체에 스며 있다. 우리는 모두 한때 흙이었고, 다시 흙이 될 것이라는 사실. 그 앞에서 바시의 붓은 슬퍼하지 않는다. 다만 조용히, 그러나 압도적으로, 존재의 진실을 응시한다.
현대 회화에 미친 영향
소피아 바시의 작품 세계는 라틴아메리카 여성 화가들에게 중요한 선례가 되었다. 그녀가 개척한 '영적 초현실주의(Spiritual Surrealism)'의 계보 - 신화, 죽음, 여성성, 자연을 결합한 화면 언어 - 는 훗날 멕시코 네오-마야 미술 운동과 여성주의 미술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특히 그녀의 화면 구성, 즉 광활한 어둠 속 단일한 빛의 근원과 인물의 고립된 배치는, 현대 다크 판타지 일러스트레이션과 멕시코 그래픽 아트 전반에 걸쳐 반복적으로 재해석되고 있다. 바시를 "멕시코 초현실주의의 마지막 증인"이라 칭하는 미술 비평가들은, 그녀의 재발견이 라틴아메리카 근현대 미술 연구의 중요한 과제라고 입을 모은다.
경매 시장에서의 위치
소피아 바시는 생전 멕시코 내에서는 상당한 명성을 누렸으나, 국제 경매 시장에서의 인지도는 레오노라 캐링턴이나 프리다 칼로에 비해 현저히 낮은 편이었다. 그러나 최근 라틴아메리카 여성 예술가 재조명 열풍과 함께 그녀의 작품에 대한 수집가들의 관심이 부쩍 높아지고 있다.
크리스티(Christie's), 소더비(Sotheby's) 등 주요 경매 하우스보다는 멕시코 현지 경매사인 모르통(Morton Subastas)을 통해 주로 거래되어 왔으며, 중소 규모 작품의 경우 수천 달러에서 수만 달러 선에서 낙찰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Dust to Dust’처럼 시대적-예술적 의미가 명확한 대표작의 경우, 작품 크기와 보존 상태에 따라 수십만 달러에 이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 미술 시장 전문가들의 견해다.
라틴아메리카 미술 컬렉팅 시장이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가운데, 소피아 바시는 '가장 저평가된 초현실주의 마스터 중 한 명'으로 손꼽히며, 향후 작품 가치의 상승 여력이 크다는 점에서 컬렉터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소피아 바시의 ‘Dust to Dust’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땅으로 돌아가기 직전, 마지막으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드는 순간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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