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 데이비드 호크니, 마지막 봄을 그리고 떠나다 — '노르망디의 봄', 추모 속에 재조명되는 거장의 발자취
고요비 기자
klifejourney2025@gmail.com | 2026-06-21 20:34:23
[K라이프저니|고요비 기자] "이 세상에는 추상화가 너무 많아."
지난 6월 11일 런던 자택에서 향년 88세를 일기로 별세한 영국 출신의 현대 미술의 거장 데이비드 호크니가 생전에 자주 했던 말이다.
1937년 7월 9일 요크셔주 브래드퍼드에서 태어난 그는 브래드퍼드 미술학교와 런던 왕립예술학교(RCA)에서 수학한 뒤, 1960년대 팝아트 운동의 중심 인물로 떠올랐다. 그러나 앤디 워홀 등 동시대 팝아티스트들이 소비사회와 상업성에 천착했던 것과 달리, 호크니는 자신을 둘러싼 일상의 빛과 풍경, 인물에 깊은 관심을 쏟으며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해 나갔다.
호크니는 추상미술이 화단을 지배하던 시기에 구상회화를 끝까지 견지하며 생생하고 양식화된 사실주의를 완성한 화가로 평가받는다. 캘리포니아의 수영장 연작, 더블 포트레이트 시리즈, 요크셔의 풍경화에 이르기까지 그는 회화·판화·사진·무대디자인을 넘나들며 평생 새로운 매체를 탐구했다.
작고 당시 영국 왕실은 찰스 3세의 이름으로 "세계 미술계의 거인이자 요크셔 출신다운 영국인, 많은 이들에게 친구이자 영감이었던 인물"이라는 애도 성명을 발표했으며, 미술계는 그를 "20세기와 21세기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기리고 있다.
붓 대신 아이패드로
이번에 추모와 함께 다시 화제가 되고 있는 작품은 '노르망디의 봄(The Arrival of Spring, Normandy, 2020)' 연작이다. 2020년 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봉쇄에 들어가던 시기, 호크니는 프랑스 노르망디의 자택 '일곱 난쟁이의 집'에 머물며 아이패드로 봄의 변화를 매일 기록했다. 그는 2011년 요크셔, 2013년에 이어 세 번째로 '봄의 도래'를 주제로 삼은 연작을 완성했으며, 이번에는 무려 116점에 달하는 작품을 쏟아냈다.
작품 속에는 비가 쏟아지는 연못과 그 위로 번지는 동심원의 파문, 짙푸른 초록 잔디와 줄지어 선 나무들이 단순하면서도 경쾌한 선묘로 펼쳐진다. 빗줄기는 가느다란 흰 선으로, 물방울이 만드는 파문은 검고 흰 동그라미들이 겹겹이 번지는 형태로 표현되어 화면 전체에 리드미컬한 운동감을 만들어낸다.
호크니는 2010년 아이폰, 이어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이번 연작을 위해 전용 브러시와 형태를 새롭게 개발한 애플리케이션을 직접 고안해 사용했다. 그는 생전 "나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하며 디지털 매체에서도 손의 제스처와 필치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회화성을 강조했다.
팬데믹 시대의 위안
'노르망디의 봄'은 단순한 풍경화가 아니라, 인류 전체가 고립과 불안에 잠겨 있던 시기에 자연의 끊임없는 갱생과 경이로움을 증언한 기록물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의를 지닌다. 호크니는 모네가 인근 지베르니에서 40번의 봄을 관찰하며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노르망디라는 장소가 프랑스 인상주의의 발상지와 맞닿아 있음을 의식적으로 작업에 끌어들였다. 야외에서 직접 자연을 관찰하며 매일의 미세한 변화를 포착한 그의 작업방식은 모네의 '엉 플레인 에르(en plein air)' 전통을 21세기 디지털 매체로 계승한 시도로 평가된다.
봉쇄와 고립, 단절로 점철됐던 그 시기에 호크니의 그림들은 오히려 자연의 풍요와 생명의 약동을 전면에 내세우며 정반대의 정서를 전달했다. 그는 생전 즐겨 쓰던 말처럼 "삶을 사랑하라(love life)"는 메시지를 이 연작 전체에 아로새겼다.
빗방울과 파문이 전하는 시적 정취
작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연못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만들어내는 무수한 동심원이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과 동시에 끊임없이 갱신되는 생동감을 함께 전한다. 짙은 녹색 수면과 옅은 청록빛 물빛이 교차하는 가운데, 단순한 선묘로 그려진 빗줄기는 무겁지 않고 경쾌하게 화면을 가로지른다. 보는 이로 하여금 비 내리는 정원에 실제로 서 있는 듯한 감각을 불러일으키면서도, 동시에 동화책의 삽화처럼 천진하고 따뜻한 정서를 자아낸다.
일부 평론가들이 이 작업을 두고 "아이처럼 그렸다"고 평했던 것은 비판이라기보다, 피카소가 "라파엘로처럼 그리는 데는 4년이 걸렸지만, 아이처럼 그리는 데는 평생이 걸렸다"고 했던 말과 같은 맥락의 찬사에 가깝다. 단순함 속에 응축된 관찰력과 색채 감각이야말로 이 연작이 지닌 시적 울림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추상에 반한 구상회화와 사실주의적 재현의 옹호
호크니는 60여 년의 작업 인생 동안 팩스, 레이저 복사기, 포토콜라주, 아이폰, 아이패드 등 당대의 최신 기술을 끊임없이 회화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화가로 기억된다. 그는 디지털 매체를 단순한 보조 도구가 아니라 독자적인 회화 언어로 격상시켰으며, 이는 이후 세대 작가들에게 디지털 드로잉과 회화의 경계를 새롭게 사고하게 만든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한편으로 그는 평생 구상회화와 사실주의적 재현을 옹호하며 추상이 지배하던 시대에 풍경과 인물, 빛에 대한 천착을 잃지 않았다는 점에서, 현대미술사에서 '재현의 가능성'을 끝까지 증명해낸 작가로 평가받는다. 미술평론가들 사이에서는 디지털 작업에 대한 엇갈린 평가도 존재했다. 가디언의 평론가 에이드리언 설(Adrian Searle)은 "아무리 회화적으로 보여도 전자적 기원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다"며 비판적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으나, 이는 오히려 호크니가 새로운 매체에 대한 논쟁을 미술계 한복판으로 끌어들인 인물이었음을 방증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살아있는 작가 중 가장 비싼 작가'
호크니는 생전 이미 '살아있는 작가 중 가장 비싼 작가'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인물이었다. 2018년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1972년작 '예술가의 초상(수영장의 두 인물)(Portrait of an Artist (Pool with Two Figures))'이 9030만 달러(약 1200억원)에 낙찰되며 당시 생존 작가 최고가 기록을 새로 썼다. 이 작품은 1972년 처음 1만8000달러에 판매됐던 것을 감안하면 46년 만에 5000배 넘게 가치가 치솟은 셈이다.
이후로도 그의 기록 행진은 이어졌다. 2019년 더블 포트레이트 작품 '헨리 겔드잘러와 크리스토퍼 스콧'이 4950만 달러에, 2020년 '니콜스 캐니언'이 3070만 파운드에, 2022년 폴 G. 앨런 컬렉션에 포함됐던 '윈터 팀버'가 2040만 파운드에 낙찰됐다. 2024년에는 초기 수영장 연작인 '캘리포니아'(1965)가 1870만 파운드에 새 주인을 찾았고, 2025년 11월에는 '크리스토 : 이셔우드와 돈 바차디'(1968)가 4430만 달러에 거래되며 그의 시장 가치가 노년에도 꾸준히 상승하고 있음을 입증했다.
그의 작품은 게르하르트 리히터, 리처드 디벤콘 등 동시대 거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8자리수 낙찰가를 기록해왔으며, 판화 시장 역시 2023년 한 해에만 거래액이 72% 급증하는 등 견조한 성장세를 보였다. 판화의 경우 통상 1000파운드에서 50만 파운드 이상까지 폭넓은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어, 대작 회화부터 판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컬렉터층을 아우르는 시장 구조를 갖춘 것으로 평가된다.
'노르망디의 봄' 연작은 2021년 영국 왕립예술원(RA) 전시를 시작으로 브뤼셀 보자르,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 시카고 아트인스티튜트 등 세계 유수 미술관을 순회하며 그의 만년을 대표하는 작업으로 자리매김했다. 호크니는 세상을 떠났지만, 빗방울이 번지는 노르망디의 연못은 여전히 화면 속에서 봄을 기다리며 잔잔히 일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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