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리] 잊혀진 낭만주의자의 부활—독일 후기 낭만파의 숨겨진 걸작, 리하르트 베츠의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고요비 기자

klifejourney2025@gmail.com | 2026-03-21 19:48:36

리하르트 베츠의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사진 | CPO

[K라이프저니|고요비 기자] CPO 레이블이 세상에 내놓은 독일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 리하르트 베츠(Richard Wetz, 1875~1935)의 ‘Ein Weihnachtsoratorium auf alt-deutsche Gedichte, op. 53', 이른바 '고독일 시편에 의한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는 2010년 11월 27일 에어푸르트의 토마스키르헤에서 녹음됐다. 이 라이브 음반은, 20세기 초반 독일 음악계에서 한때 상당한 명성을 누렸으나 이후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난 한 작곡가의 진지한 예술 세계를 오늘에 소환한다.

독일 문학 전통 위에 구축한 작품

이 음반이 갖는 첫 번째 의미는 희귀성 그 자체에 있다. 베츠의 음악은 생전에 독일 중부 튀링겐 지방을 중심으로 상당한 주목을 받았으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연 레퍼토리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특히 이 오라토리오는 중세 및 초기 근대 독일어 시편을 가사로 삼아, 크리스마스의 종교적 서사를 순수하게 독일 문학 전통 위에 구축한 작품으로서 학술적·음악적 가치가 높다. 

CPO가 오랫동안 지속해 온 '잊혀진 독일 낭만주의 레퍼토리 발굴' 프로젝트의 정수를 보여주는 음반이기도 하다. MDR(중부독일방송)과의 공동 제작으로 탄생한 이 녹음은 단순한 상업적 기획을 넘어, 독일 지역 음악 유산 보존이라는 문화적 소명 위에 서 있다.

후기 낭만적 화성어법이 짙게 배인 합창

이 음반의 지휘는 게오르크 알렉산더 알브레히트(George Alexander Albrecht)가 맡았다. 독일 낭만파 레퍼토리에 깊은 조예를 가진 그는 과장 없이 절제된 템포 운용으로 베츠 특유의 서정성을 자연스럽게 흐르게 한다. 연주 단체로는 바이마르 튀링겐 체임버 오케스트라(Thüringisches Kammerorchester Weimar), 에어푸르트 돔베르크 합창단(Dombergchor Erfurt, 합창 지도: 실비우스 폰 케셀), 에어푸르트 필하모닉 합창단(Philharmonischer Chor Erfurt, 합창 지도: 안드레아스 케텔후트)이 함께했다. 

두 합창단의 조화는 이 음반의 핵심적 미덕으로, 후기 낭만적 화성어법이 짙게 배인 합창 음악을 풍부하고 균형 있게 소화해낸다. 독창진으로는 소프라노 마리에타 춤뷜트(Marietta Zumbült)와 바리톤 마테 숄리옴-나지(Máté Sólyom-Nagy)가 참여했다. 춤뷜트의 맑고 투명한 음색은 이 작품이 요구하는 내밀한 경건함을 잘 전달하며, 숄리옴-나지의 중후한 바리톤은 서사적 무게 중심을 안정적으로 지탱한다.

음악사 속 리하르트 베츠의 위치

베츠는 1875년 글라우하우에서 태어나 1935년 에어푸르트에서 생을 마친 전형적인 독일 후기 낭만주의자다. 브루크너와 레거의 강한 영향 아래 음악적 언어를 형성했으며, 교향곡·성악곡·실내악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방대한 작품을 남겼다. 생전에는 에어푸르트 음악원 원장을 역임하며 독일 중부 음악계의 중심적 인물로 활동했고, 특히 1920~30년대에는 그의 교향곡들이 독일 주요 도시에서 정기적으로 연주될 만큼 명성이 높았다. 

그러나 대전 이후 음악사의 주된 관심이 신빈악파와 전위 음악 쪽으로 급격히 이동하면서, 베츠처럼 보수적 낭만주의의 맥락에서 작업한 작곡가들은 대거 잊혀졌다. 그는 한스 피츠너, 막스 레거와 함께 '낭만주의의 마지막'으로 분류되는 경향이 있으나, 그의 음악이 지닌 개성과 진정성은 재평가를 요구한다.

소박하고 내밀한 신앙 고백

작품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는 베츠가 에어푸르트 정착 이후 이 도시의 종교·문화적 분위기에 깊이 동화된 결과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바흐가 활동했던 튀링겐 지방의 루터교 음악 전통과 중세 독일 성가 문화에 강하게 이끌렸고, 이를 후기 낭만적 어법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가사로 채택한 '고독일 시편(alt-deutsche Gedichte)'은 중세부터 종교개혁 시대에 걸쳐 독일어로 쓰인 신앙시들로, 헨델이나 하이든류의 화려한 성경 서사 대신 소박하고 내밀한 신앙 고백의 언어를 택한 것이 이 작품의 가장 독창적인 면모다. 이는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 독일 지식인들 사이에 유행하던 중세 및 민족 문화의 재발견이라는 시대정신과도 맞닿아 있었다.

경외와 감사의 감정

이 오라토리오는 장대한 스펙터클을 지향하지 않는다. 베츠가 이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자 한 것은 크리스마스의 신학적 의미를 초월적이고 화려하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서 조용히 피어오르는 경외와 감사의 감정이었다. 선율은 민요적 소박함을 갖추면서도 후기 낭만적 화성의 농밀함을 유지하고, 합창과 독창이 대화하듯 교차하며 마치 공동체적 신앙의 고백을 재현하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앨범 커버에 담긴 레오폴트 쿠펠비저(Leopold Kupelwieser)의 1825년 작 ‘베들레헴을 향해 말을 달리는 동방박사들’은 이 음악의 정서를 시각적으로 완벽하게 대변한다. 별빛 아래 조용히 말을 달리는 세 현인의 모습처럼, 베츠의 음악은 소란하지 않게, 그러나 흔들림 없이 성스러운 목적지를 향해 나아간다.

총 재생 시간 70분 2초. 이 한 장의 음반은 클래식 음악의 거대한 레퍼토리 지도에서 아직 발굴되지 않은 영역이 얼마나 넓은지를 새삼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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