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청산되지 않은 역사, 오늘도 반복된다"... 정운현 『친일파의 한국 현대사』, 대한민국 권력구조의 민낯 파헤쳐
이주상 기자
klifejourney2025@gmail.com | 2025-11-30 17:18:49
[K라이프저니 | 이여름 기자] 나라를 팔아먹고 독립운동가를 탄압했던 친일파들이 해방 후 어떻게 대한민국 권력의 중심에 섰는가. 언론인 출신 역사 저술가 정운현의 '친일파의 한국 현대사'는 44인의 친일 인물을 통해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민낯을 추적한 문제작이다.
2004년 초판 출간 이후 20년 가까이 한국 사회에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킨 이 책은 단순한 역사서를 넘어, 왜 대한민국이 여전히 과거사 청산에 실패했는지, 그리고 그 실패가 오늘날 어떤 왜곡된 유산으로 남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정운현은 이 책에서 나라를 배신한 자들이 해방 후 오히려 떳떳하게 권력을 잡고, 독립운동가를 '빨갱이'로 몰아 숙청했던 전도된 역사를 44명의 인물 연구를 통해 재구성한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주구 노릇을 했던 관료, 경찰, 군인, 언론인, 문화인들은 해방 직후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비호 아래 화려하게 부활했다. 독립운동가 체포에 앞장섰던 경찰 간부는 대한민국 경찰청장이 되었고, 일본군 장교 출신은 국군의 핵심 지휘관이 되었다. 친일 언론인은 주요 매체를 장악했으며, 친일 자본가는 재벌로 성장했다.
정운현은 이들이 단순히 생존을 위해 협력했던 '소극적 친일파'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민족을 배신하고 동포를 탄압하며 부와 권력을 축적한 '적극적 가해자'였음을 방대한 자료로 입증한다. 더 참담한 것은 이들이 해방 후에도 전혀 반성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들의 친일 행적을 정당화하고 독립운동가를 '친공 좌익'으로 몰아 제거했다는 사실이다.
'친일파의 한국 현대사'의 핵심 통찰은 친일파 청산 실패가 단순히 과거의 문제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친일파의 부활은 대한민국의 권력구조, 사법체계, 언론,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첫째, 정치 권력의 정통성 문제다. 독립운동 세력이 아닌 친일 협력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대한민국 정부는 태생적으로 정통성의 약점을 안게 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이를 반공 이데올로기로 덮으려 했고, 그 과정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좌익으로 매도되고 역사에서 지워졌다.
둘째, 사법 정의의 왜곡이다. 친일파 출신 법조인들이 사법부를 장악하면서 친일 청산은 요원해졌다.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는 이승만 정권과 친일 경찰의 방해로 유명무실해졌고, 친일파 처벌은 사실상 좌절되었다. 이는 대한민국 사법체계가 정의보다는 권력에 복무하는 구조적 문제의 출발점이 되었다.
셋째, 언론의 친권력 구조다. 친일 언론인들이 해방 후에도 주요 매체를 장악하면서 비판 정신 대신 권력 옹호 기능이 강화되었다. 정운현은 언론인 출신답게 이 부분을 특히 신랄하게 비판한다. 일제에 협력했던 언론이 해방 후에도 권력에 순응하는 행태를 보인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넷째, 경제 불평등의 역사적 기원이다. 친일 자본가들은 일제로부터 받은 특혜와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해방 후에도 재벌로 성장했다. 반면 독립운동으로 재산을 탕진한 집안은 가난을 대물림했다. 이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불평등 구조가 단순히 시장 경쟁의 결과가 아니라 역사적 부정의의 연장선에 있음을 시사한다.
정운현은 기자 출신으로 평생 권력 비판과 역사 바로 세우기에 천착해온 언론인이자 역사 저술가다. 그는 단순한 학자가 아니라 현장 저널리스트의 감각으로 역사를 파헤치는 독특한 위치에 있다.
이 책의 가치는 딱딱한 학술서가 아니라 대중이 읽을 수 있는 생생한 인물 평전 형식으로 씌어졌다는 점이다. 44명의 친일파 각각에 대해 구체적인 친일 행각, 해방 후 행적, 후손들의 현재까지 추적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역사가 과거가 아닌 현재진행형임을 각인시킨다.
정운현의 서술은 감정에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단호하다. 그는 자료와 증거를 바탕으로 냉정하게 친일 행적을 기록하되, 역사적 평가에서는 명확한 입장을 취한다. 친일은 용서할 수 없는 반민족 행위이며, 그것이 청산되지 않은 것은 대한민국의 원죄라는 것이다.
'친일파의 한국 현대사'는 학계에서도 중요한 참고 자료로 인정받는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편찬 과정에서도 정운현의 연구가 기초 자료로 활용되었다. 그는 방대한 1차 자료, 증언, 문서를 발굴하고 교차 검증하여 학술적 엄밀성을 확보했다.
다만 일부 학자들은 정운현의 접근이 지나치게 도덕주의적이며, 역사적 맥락과 개인의 복잡한 선택을 단순화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다. 친일과 반일, 애국과 매국이라는 이분법으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회색 지대와 인간적 고뇌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구조적 분석보다는 인물 중심 서술에 치중함으로써 왜 친일파 청산이 실패했는지에 대한 체계적 설명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있다.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냉전 체제, 남북 분단이라는 거대한 국제정치적 맥락 속에서 친일파 부활을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친일파의 한국 현대사'가 갖는 가치는 명확하다. 정운현은 학계가 외면하거나 조심스러워했던 구체적 인물들의 친일 행적을 대중 앞에 낱낱이 공개함으로써 역사 인식의 대전환을 이끌어냈다.
이 책은 2020년대 한국 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친일파 청산 실패는 오늘날 어떤 유산으로 남아 있는가?
정운현이 추적한 친일파의 후손들 중 상당수는 여전히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의 엘리트층을 형성하고 있다.
반면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가난과 사회적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있다. 광복회와 독립유공자 단체들은 매년 정부 지원 부족을 호소하지만, 친일파 후손들이 세운 재벌 기업은 막대한 부를 세습하고 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역사 인식의 분열이다. 친일과 독립운동에 대한 평가가 여전히 정치적 이념에 따라 갈린다. 보수 진영 일각에서는 친일을 '시대적 불가피성'으로 옹호하거나, 독립운동을 '좌익 활동'으로 폄하하는 발언이 나온다. 진보 진영은 친일 청산을 적폐 청산의 출발점으로 보지만, 현실 정치에서는 번번이 좌절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강제징용 배상 문제 등 한일 간 역사 갈등도 친일파 청산 실패와 무관하지 않다. 친일 세력이 권력을 장악한 대한민국 정부는 일본에 대한 과거사 청산을 제대로 요구하지 못했고, 이는 오늘날까지 미해결 과제로 남았다.
'친일파의 한국 현대사'가 제시하는 통찰을 바탕으로 한국의 미래를 전망하면, 크게 두 가지 시나리오가 가능하다.
시나리오 1: 역사 청산의 완성과 사회 통합
첫 번째 경로는 뒤늦게나마 역사적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이는 친일파 후손에 대한 재산 환수나 처벌이 아니라, 역사적 진실을 명확히 하고 독립운동가에게 합당한 예우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는 친일 인명사전의 지속적 보완, 친일파가 세운 동상과 기념비의 철거, 교과서에서 친일파 미화 내용 삭제, 독립운동가 후손에 대한 실질적 지원 확대 등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 친일 자본으로 형성된 재벌의 사회 환원 의무 강화, 친일 경력자가 세운 기관의 이름 변경 같은 상징적 조치도 고려할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이 축적되면 대한민국은 비로소 역사적 정통성을 확보하고, 좌우 이념 갈등을 넘어선 새로운 국민 통합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 '독립운동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하면 3대가 흥한다'는 자조적 말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시나리오 2: 역사 왜곡의 심화와 사회 분열
두 번째 경로는 친일파 청산 실패가 더욱 고착화되는 것이다. 보수 우파 정권이 장기 집권하면서 친일파 재평가 작업이 본격화될 수 있다. 이미 일부에서는 박정희의 만주군 경력을 '근대화의 밑거름'으로 미화하거나, 이승만의 친일파 기용을 '실용주의'로 옹호하는 시도가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이 강화되면 역사교과서는 더욱 우편향될 것이고, 독립운동사는 축소되거나 좌익 활동으로 매도될 것이다. 친일파 후손들은 떳떳하게 선조의 행적을 정당화하고,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더욱 주변부로 밀려날 것이다.
이는 단순히 과거사 논쟁에 그치지 않는다. 역사적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현재의 불의도 정당화된다. 권력과 자본의 부당한 결탁, 특권 세습, 사회 불평등이 '능력'이나 '자유'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는 것이다. 친일파가 청산되지 않은 사회는 재벌 총수의 범죄도, 권력자의 부패도 제대로 처벌하지 못하는 구조적 무력함을 갖는다.
역사는 단선적이지 않다. 한국 사회는 친일 청산 실패라는 원죄를 안고 있지만, 동시에 민주화 운동, 촛불 혁명, 과거사 진상 규명 같은 저항과 성찰의 역사도 갖고 있다.
'친일파의 한국 현대사'가 제시하는 진정한 교훈은 역사가 과거에 갇혀 있지 않다는 것이다. 친일파가 권력을 잡았다는 사실은 바꿀 수 없지만, 그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기억할 것인가는 현재 세대의 선택이다.
미래 한국 사회는 친일파 청산이라는 과거의 과제와, 재벌 개혁, 사법 정의, 언론 독립이라는 현재의 과제가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친일파를 단죄하는 것은 복수가 아니라, 정의가 승리하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선언이다.
정운현의 책이 출간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친일 청산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끝나지 않는 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도, 정의도, 진정한 통합도 완성될 수 없다.
'친일파의 한국 현대사'는 불편한 책이다. 하지만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아니다. 정운현은 44인의 친일파 이야기를 통해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이면을 조명했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어떤 유산으로 남았는지 추적했다.
미래 한국 사회가 진정으로 성숙하려면 이 불편한 역사와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친일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문제이며, 그것을 청산하는 것은 과거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바꾸는 일이다.
정운현의 '친일파의 한국 현대사'는 그 작업의 시작점이다. 이제 그 작업을 완성할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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