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 혁명의 하늘을 나는 백조들…아르카디 릴로프의 걸작 '푸른 공간에서'

고요비 기자

klifejourney2025@gmail.com | 2026-06-24 14:54:32

아르카디 알렉산드로비치 릴로프의 '푸른 공간에서'

[K라이프저니|고요비 기자] 하늘의 절반을 차지한 코발트블루, 그 속을 가로지르는 순백의 백조 떼, 그리고 저 아래 이름 모를 바다 위를 홀로 항해하는 범선 한 척.

아르카디 알렉산드로비치 릴로프(Arkady Alexandrovich Rylov, 1870~1939)가 1918년에 완성한 '푸른 공간에서(В голубом просторе, In the Blue Expanse)'는 한 장의 캔버스 앞에 선 사람을 즉각 광막한 하늘 속으로 빨아들이는 힘을 가진 그림이다. 러시아 혁명이 막 세상을 뒤집어 놓던 바로 그 해, 이 화가는 붓으로 자유와 해방의 시를 썼다.

러시아 풍경화의 전설…릴로프는 누구인가

아르카디 릴로프는 1870년 러시아 제국 뱟카 현(현재의 키로프주)의 작은 마을 이스토벤스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자연 속에서 자라며 숲과 강을 벗 삼았던 그는 당시 인기 잡지 '니바(Niva)'에 실린 아르히프 쿠인지(Arkhip Kuindzhi)의 풍경화 복제화를 보며 화가의 꿈을 키웠다. 1888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상경해 슈티글리츠 남작 기술드로잉 학교에서 수학한 뒤, 1894년 제국미술아카데미에 입학해 자신이 그토록 동경했던 쿠인지의 직계 제자가 됐다.

졸업 작품은 역사화였지만, 릴로프는 이내 풍경화로 방향을 전환해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나갔다. 그는 미르 이스쿠스트바(Mir iskusstva, 예술 세계) 운동의 일원으로 활동했고, 쿠인지 협회의 회장을 역임하며 러시아 미술계의 중심에 섰다. 1915년 아카데미 회원, 1918년 교수로 임용된 그는 생애 말까지 후학 양성에 힘쓰며 1920~30년대 레닌그라드 풍경화의 다채로운 면모를 결정짓는 핵심 인물이 됐다. 소비에트 미술 이론은 릴로프를 소련 풍경화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공식 평가하고 있다.

화가로서의 그는 작업실 자체가 하나의 자연보호구역이었다. 다람쥐, 토끼, 원숭이, 두 개의 개미집, 그리고 우리 없이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야생 조류들이 그의 화실을 채웠다. 동료 화가 미하일 네스테로프는 "야생 동물과 새들이 릴로프를 사랑해 스스로 그의 작업실로 찾아왔다"고 증언했다. 자연에 대한 이 깊고 순수한 사랑이 그의 화폭 전체를 관통하는 정신적 토대였다.

코발트의 하늘과 비상하는 백조 

'푸른 공간에서'는 상징주의적 사실주의(Symbolist Realism)라는 릴로프 특유의 화풍이 가장 빛나는 순간을 포착한 작품이다. 화면의 압도적인 부분을 하늘이 차지한다. 선명한 코발트블루와 청록의 색조가 화면 전체를 지배하며, 여기에 솜뭉치처럼 두터운 층운들이 리듬감 있게 배치돼 새들의 비행 방향을 자연스럽게 안내하는 구도를 형성한다.

화면 상단부에는 백조 떼가 강력한 날갯짓으로 전진하고 있다. 이들은 관람자의 시점에서 매우 가까운 위치에 그려져 있어 마치 우리 자신이 새와 같은 눈높이로 하늘을 함께 날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릴로프는 하늘 쪽에 가까운 새들은 갈색 날개의 질감까지 세밀하게 묘사한 반면, 아래쪽의 새들은 보다 자유로운 터치로 처리해 공간의 깊이와 생동감을 동시에 구현했다.

캔버스의 하단은 차갑고 어두운 북방의 바다가 차지한다. 파도는 거칠게 너울대며 멀리 눈 덮인 절벽이 솟아 있고, 그 좌측에는 하얀 돛을 펼친 범선 한 척이 조용히 항진하고 있다. 하늘의 역동성과 바다의 장대함이 수평선에서 하나로 합류하며 무한한 공간감을 만들어낸다. 주조색 코발트블루는 냉기와 신선함을 동시에 전달하며, 봄의 이주를 시작한 새들의 귀향이라는 계절적 정서를 강렬하게 환기시킨다.

아르카디 알렉산드로비치 릴로프의 '푸른 공간에서'(부분)

혁명의 원년에 탄생한 첫 번째 소련 풍경화

이 그림이 완성된 1918년은 볼셰비키 혁명 직후의 격동기였다. 릴로프는 당시 예술아카데미의 교수로, 혁명이 가져올 새로운 세계를 기대하며 변화를 지지한 지식인 중 한 명이었다. 나라 전체가 굶주림과 혼란 속에 있었지만, 그의 붓은 광활한 하늘과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백조를 향했다.

볼셰비키 당국은 이 그림을 혁명의 자유와 해방의 정서를 표현한 첫 번째 진정한 소비에트 풍경화로 선언했다. 동시에 이 그림은 혁명 정권으로부터 "자연을 그리는 것도 쓸모 있는 일"이라는 공식 승인을 받아냄으로써, 이후 수년간 소련에서 풍경화 장르 자체의 존재 근거를 마련해준 역사적인 작품이 됐다. 옥스퍼드 미술사전(A Dictionary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은 이 작품을 두고 "혁명이 가져온 새로운 자유와 기쁨의 감각을 최초로 표현한 작품으로 환영받았다"고 평가했다.

현재 이 원작은 모스크바 국립 트레티야코프 갤러리(State Tretyakov Gallery)에 소장돼 있다.

광활한 하늘 앞에서 느껴지는 시적 해방감

이 그림 앞에 서는 순간, 가슴이 먼저 반응한다. 발이 땅에서 떨어지는 느낌이랄까. 거대한 파란 하늘이 시야를 가득 채우는 순간 일상의 무게는 그 자리에 내려놓아진다. 백조들의 비행은 힘차지만, 결코 긴박하지 않다. 오히려 당당하고 유유하다. 그 날갯짓에는 어디론가 돌아가고 있다는 귀소의 확신이 담겨 있다. 고국으로, 봄으로, 빛 속으로.

저 아래 홀로 항해하는 범선은 그림 전체에 인간의 자리를 마련해준다. 새들의 자유와 달리 배는 바다에 묶여 있지만, 그것도 나름의 방향을 향해 앞으로 나아간다. 자유와 의지, 비상과 항진이 하나의 화면 안에 공존하는 이 구도는 보는 이에게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조용히 묻는다. 릴로프가 새들에게 투영한 것은 단순한 귀소 본능이 아니라, 억압 이후에 찾아오는 해방의 황홀감이었다.

아르카디 알렉산드로비치 릴로프의 '푸른 공간에서'(부분)

소련 풍경화 전통의 토대를 세우다

릴로프가 현대 회화에 미친 영향은 그의 사후에도 오래도록 이어졌다. 그의 작품들, 특히 '푸른 공간에서'는 1920~30년대 레닌그라드 풍경화파 전체의 미적 기준점이 됐다. 그가 아카데미에서 길러낸 새로운 세대의 화가들은 그의 플랑텡 에어(plein-air, 야외 사생) 방식과 자연에 대한 서정적·상징적 접근법을 이어받아 소련 풍경화의 풍요로운 전통을 형성했다.

에모션과 상징을 사실주의적 묘사에 녹여내는 그의 방법론은, 이후 소련 풍경화가 단순한 자연 재현을 넘어 민족적 정서와 시대정신을 담는 장르로 발전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자연 속에서 역사와 자유, 민족의 혼을 읽어내는 러시아 풍경화의 정신적 계보는 릴로프를 빼놓고서는 논할 수 없다.

러시아 근대 풍경화를 대표하는 이름

릴로프의 작품은 국제 경매 시장에서 러시아 근대 풍경화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꾸준히 거래되고 있다. 소품이나 습작 성격의 풍경화는 수천 달러에서 수만 달러 선에서 낙찰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샤피로 옥션(Shapiro Auctions), 트리니티 인터내셔널 옥션(Trinity International Auctions), 앤티크 아레나(Antique Arena) 등 러시아 미술 전문 경매사들을 통해 정기적으로 매물이 나오고 있다. 규모와 완성도가 높은 유화 작품의 경우 가격대가 크게 상승하며, 러시아 미술 시장에서 19~20세기 전환기의 풍경화 수요가 높은 만큼 릴로프의 이름값은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추세다.

소더비(Sotheby's)가 러시아 회화 부문에서 꾸준히 강세를 보이고 있으며, 2025년 상반기 기준 아이바조프스키(Aivazovsky) 등 같은 시대 러시아 풍경화 거장들의 작품이 예상가를 두 배 이상 초과하는 낙찰 사례가 잇따르고 있어 릴로프 작품에 대한 관심도 함께 높아지고 있다. 원작 '푸른 공간에서'는 트레티야코프 갤러리 소장품으로 시장에 나올 수 없는 작품이지만, 그 상징적 가치는 러시아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사실상 가격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수준에 있다는 것이 미술계의 중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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