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7 S/S 서울패션위크] 경계에서 태어난 신화 — 한나신(HANNAH SHIN), 서울패션위크에 새긴 '리미널'의 몸짓
이주상 기자
klifejourney2025@gmail.com | 2026-09-04 11:23:56
[K라이프저니|글·사진 이주상 기자] 3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2027 S/S 서울패션위크 무대. 한나신(HANNAH SHIN)의 런웨이가 끝난 뒤 객석에 남은 감정은 '아름답다'는 단순한 감탄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낯섦에 가까웠다. 인간의 몸이 어디까지 옷이고 어디부터 구조물인지, 반투명한 시폰 자락이 흘러내리는 곳과 금속이 신체를 감싸 안는 지점이 대체 어디서 갈리는지 가늠하기 어려운, 정체가 불분명한 감각이었다. 그리고 그 불분명함이야말로 이번 시즌 한나신이 의도한 정확한 목적지였다.
런웨이를 관통한 하나의 감각 — 흐르는 것과 굳어진 것의 이중주
이날 무대에 오른 룩들을 개별적으로 뜯어보기보다 하나의 흐름으로 바라보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태도가 선명해진다. 라벤더빛 시폰이 다리 사이로 갈라지며 바닥까지 흘러내리는 드레스 위에 지퍼 디테일이 촘촘한 화이트 재킷이 얹히고, 와인색 패턴트 레더가 상체를 감싼 코르셋 실루엣은 조명 아래 액체처럼 번들거린다. 골드 메탈릭 텍스처의 롱코트가 블랙 레이스 슬립 위에 걸쳐지는가 하면, 크리스털이 촘촘히 박힌 크롭 톱은 헝클어진 실 가닥으로 뒤덮인 재킷과 스커트 세트 속에서 오히려 더 날카롭게 반짝인다.
이 모든 룩을 관통하는 것은 '유동성'과 '견고함'이 한 몸 안에서 충돌하지 않고 공존하도록 설계된 방식이다. 시폰, 레이스, 페더 같은 부드럽고 휘발성 강한 소재들이 지퍼, 버클, 패턴트 레더, 금속판 같은 단단하고 구조적인 요소와 맞붙어 있지만, 그 결합은 어색하지 않다. 오히려 두 성질이 서로를 완성시키는 관계처럼 보인다. 헐렁하게 늘어지는 드레이핑과 몸에 밀착하는 본디지형 실루엣이 같은 무대 위에서 교차하고, 얼룩무늬 폭스퍼 롱코트의 유기적인 패턴은 목 언저리를 감싼 블랙 레더 칼라의 인공적인 절제와 대비를 이룬다.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기는 순간 — 신체와 구조물 사이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골드 톤의 금속성 브레스트플레이트가 상체를 감싸고, 그 아래로 진주빛 페일릿이 겹겹이 쌓인 머메이드 실루엣 스커트가 이어지는 룩이다. 마치 인체 조형물처럼 매끈하게 가슴을 감싼 골드 패널은 작은 구멍들로 뚫려 피부의 존재를 은근히 드러내고, 그 아래로는 물고기 비늘 같은 스팽글이 빛을 산란시키며 흘러내린다. 이 지점에서 옷은 더 이상 몸을 가리는 천이 아니라, 몸을 재해석하는 하나의 장치가 된다. 인간의 신체가 신화 속 존재로 전이되는 순간을 포착한 듯한 이 룩은, 이번 컬렉션 전체가 겨냥한 감정선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금색 체인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프린지 톱 역시 비슷한 맥락에 서 있다. 수십 가닥의 체인과 크리스털 스트랜드가 몸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며,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순간마다 다시 태어나는 실루엣을 만들어낸다. 블랙 레더 팬츠라는 단단한 하의와 만나면서, 이 룩은 '움직이는 갑옷'이라 부를 만한 이미지를 완성한다.
신화가 된 신체, 그리고 신한나의 테크 쿠튀르
이 같은 런웨이의 언어는 신한나 디자이너가 오랫동안 구축해온 작업 철학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홍익대학교에서 패션디자인을 전공하고 박사 과정까지 이어온 그는, 아틀리에 특유의 수공예적 감각과 첨단 기술을 접붙이는 실험을 브랜드의 정체성으로 삼아왔다. 3D 프린팅, 웨어러블 로보틱스, 특수 소재 개발 같은 키워드는 언뜻 패션과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신한나에게는 이것이 곧 '몸을 다시 상상하는 도구'다.
이번 시즌 런웨이에서 로봇 팔이나 프린팅된 부품이 직접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금속판이 신체를 감싸는 방식이나 반투명 레이어와 하드웨어가 뒤섞이는 구성 안에는 같은 사고방식이 흐른다. 유기적인 신체와 인공적인 구조물, 부드러운 것과 단단한 것 사이의 경계를 지우는 작업. 옷이 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몸과 옷이 서로의 정체성을 교환하는 지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기술을 소재나 실루엣의 언어로 녹여내는 이 접근은, 결국 '입는다'는 행위 자체를 재정의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상업성과 예술성 사이 — 한나신이 그리는 다음 지형
물론 이런 실험적 언어가 무대 위에서만 소비되는 것은 아니다. 한나신은 이미 여러 글로벌 아티스트들과의 협업, 해외 수주 플랫폼 참가를 통해 예술적 실험을 실질적인 비즈니스 언어로 번역해온 이력을 갖고 있다. 이번 컬렉션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 레더 하드웨어, 메탈릭 텍스처, 레이스 레이어링은 하나같이 대중적 상품화가 가능한 요소들이다. 즉 '이질적인 것들의 공존'이라는 철학적 화두를 던지면서도, 그 결과물은 각각 독립적으로 팔릴 수 있는 완성도를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이는 한나신이라는 브랜드가 실험적 테크 쿠튀르 하우스로만 머물지 않고, 그 실험을 다시 시장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번역해내는 능력을 갖췄음을 보여준다. 옷이 몸의 경계를, 신체가 신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번 무대는 결국 '경계 위에 선다는 것'이 얼마나 매혹적인 상업적 자산이 될 수 있는지를 증명한 자리이기도 했다. 인간과 기술, 신체와 의복 사이의 모호한 지대를 예술로 옮겨온 신한나의 다음 걸음이 어느 방향으로 이어질지, 그 흐름을 계속 지켜볼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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