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리] 잊혀진 발라드의 거장, 플뤼데만의 재발견...19세기 독일 가곡의 숨은 보석
고요비 기자
klifejourney2025@gmail.com | 2026-02-10 06:45:58
[K라이프저니|글·사진 고요비 기자] 낙소스 레이블이 발매한 마르틴 플뤼데만(1854-1897)의 'Balladen und Gesänge(발라드와 노래)' 음반이 독일 가곡 애호가들 사이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 2020년 10월과 2021년 3월 오스트리아 클라비어아텔리에 파펜도르프에서 녹음된 이 2장의 CD는 바리톤 울프 베스틀라인과 피아니스트 헤다예트 요나스 제디카르의 연주로, 19세기 말 독일 발라드 전통의 마지막 대가를 조명한다.
발라드 예술의 부흥, 플뤼데만의 혁신
마르틴 플뤼데만은 독일 가곡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곡가다. 슈베르트, 슈만, 브람스로 이어지는 낭만주의 리트 전통과 바그너의 악극적 극성을 결합해, 발라드 장르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그는 칼 뢰베와 리하르트 바그너의 영향을 받아 서사적 발라드와 오페라적 음악극의 경계를 허물었으며, 시와 음악의 긴밀한 관계를 탐구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플뤼데만은 발라드 작곡의 현대화와 부흥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중세주의, 민족주의, 초자연적 소재는 물론 유머러스한 에세이까지 포괄하는 폭넓은 레퍼토리를 다루었다. 괴테, 뮐러, 하이네, 번스 등 최고의 시인들의 텍스트를 음악으로 옮기며, 장르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를 보여주었다. 특히 그는 라이트모티프(유도동기) 기법을 사용하거나, 준오케스트라적 피아노 반주를 통해 성악 선율을 예상하거나 회상하는 방식으로 발라드에 극적 깊이를 더했다.
베스틀라인과 제디카르, 극적 해석의 완벽한 파트너십
바리톤 울프 베스틀라인은 독일 가곡과 오페라 레퍼토리에서 탁월한 활약을 펼쳐온 성악가다. 그의 목소리는 따뜻한 음색과 명료한 딕션, 그리고 극적 표현력이 조화를 이루며, 플뤼데만의 서사적 발라드가 요구하는 다양한 캐릭터 묘사에 완벽하게 부응한다. 베스틀라인은 단순히 노래를 부르는 것을 넘어, 각 발라드 속 인물들의 심리와 감정을 생생하게 연기해낸다.
특히 'Der Glockenguss zu Breslau'(브레슬라우의 종 주조, 14분 50초)와 'Des Sängers Fluch'(가수의 저주, 17분 8초) 같은 대규모 발라드에서 베스틀라인은 여러 등장인물을 구분해 표현하며, 극적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한다. 'Sankt Peter mit der Geiss'(염소와 함께한 성 베드로)에서는 유머러스한 어조를, 'Die Legende vom Hufeisen'(말굽의 전설)에서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각각 다른 음색과 표현으로 구현한다.
피아니스트 헤다예트 요나스 제디카르는 단순한 반주자를 넘어 공동 스토리텔러의 역할을 수행한다. 플뤼데만의 피아노 파트는 오케스트라적 질감과 라이트모티프 기법을 활용해 극적 구조를 뒷받침하는데, 제디카르는 이를 섬세하게 표현하며 각 발라드의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조성한다. 'Die Kirchenthür ist schwarz verhängt'(교회 문은 검게 드리워졌네)에서는 음울한 화성 진행으로 죽음의 그림자를, 'Niels Finn'에서는 바다의 파도를 연상시키는 음형으로 자연의 위력을 표현한다.
바그너와 뢰베 사이, 플뤼데만의 음악적 정체성
마르틴 플뤼데만은 1854년 독일 콜베르크에서 태어나 베를린에서 음악을 공부했다. 그는 칼 뢰베의 발라드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바그너의 음악극에서 영감을 받아 독자적인 스타일을 개발했다. 플뤼데만의 작곡 성향은 극적 서사성과 시적 민감성의 결합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피아노 반주를 단순한 화성 지지대가 아니라, 극적 해설자이자 분위기 조성자로 활용했다. 라이트모티프 기법을 통해 등장인물이나 감정, 상황을 음악적으로 상징하며, 청중이 복잡한 서사를 따라가도록 돕는다. 또한 그는 성악 선율과 피아노가 서로 대화하고 예측하며 회상하는 방식으로, 시간적 깊이를 음악에 부여했다.
플뤼데만의 음악사적 위치는 19세기 말 독일 가곡의 과도기적 성격을 반영한다. 그는 슈베르트와 슈만의 낭만주의 리트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바그너의 무한선율과 반음계주의를 발라드에 접목했다. 동시에 브람스의 고전적 형식미에는 거리를 두고, 보다 자유로운 서사적 구조를 선호했다. 그러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나 말러 같은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들의 극단적 표현주의에는 동참하지 않았다.
민담과 전설, 발라드 창작의 원천
플뤼데만의 발라드는 다양한 문학적 전통에서 소재를 가져온다. 이 음반에 수록된 33곡은 독일 중세 전설, 북유럽 민담, 기독교 성인전, 역사적 일화, 그리고 유머러스한 일상의 이야기를 아우른다.
'Graf Eberhards Weissdorn'(에버하르트 백작의 산사나무)과 'Vineta'(비네타) 같은 작품들은 중세 독일의 전설과 잃어버린 도시의 신화를 다룬다. 이러한 중세주의 소재는 19세기 독일 낭만주의의 핵심 관심사였으며, 플뤼데만은 이를 음악적으로 재해석했다. 특히 'Die Legende vom Hufeisen'은 말굽이 가져오는 행운과 불행의 이야기를 통해, 운명과 우연의 관계를 탐구한다.
북유럽 민담을 다룬 'Niels Finn'은 바다와 싸우는 어부의 이야기로, 자연의 위력과 인간의 용기를 대비시킨다. 'Drei Wanderer'(세 방랑자)는 여행과 모험의 모티프를, 'Die Meerfrau'(인어)는 초자연적 존재와 인간의 만남을 다룬다. 이러한 소재들은 독일 낭만주의 문학의 전형적 주제이며, 플뤼데만은 이를 음악적 드라마로 승화시켰다.
종교적 소재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Dr Martin Luther'(마르틴 루터 박사)는 종교개혁가의 신념을, 'Sankt Peter mit der Geiss'는 성 베드로의 일화를 유머러스하게 다룬다. 'Der Sarg auf der Maasinsel'(마스 섬의 관)과 'Jung Dieterich'(젊은 디트리히)는 죽음과 초자연적 현상을 다루며, 중세 기독교 세계관을 반영한다.
서사시에서 유머까지, 감정의 스펙트럼
플뤼데만의 발라드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크게 네 가지 차원으로 분석할 수 있다.
첫째, 영웅적 서사와 역사의식이다. 'Der Glockenguss zu Breslau'는 브레슬라우의 종을 주조하는 과정을 통해 장인정신과 도시 공동체의 자부심을 노래한다. 'Ritter Kurts Brautfahrt'(쿠르트 기사의 신부 맞이 여행)와 'Siegfrieds Schwert'(지크프리트의 검)는 중세 기사도와 영웅 서사시의 전통을 계승한다. 이러한 작품들은 독일 민족주의 정서와 결부되어, 과거의 영광을 음악으로 재현한다.
둘째, 사랑과 운명의 비극성이다. 'Loewes Herz'(뢰베의 심장)는 사랑의 고뇌를, 'Liebeslied von Hafis'(하피스의 사랑 노래)는 페르시아 시인의 낭만적 열정을 표현한다. 'Ihr verblühet, süße Rosen'(시들어가는 달콤한 장미여)은 사랑의 덧없음을, 'Die Taufe'(세례)는 생명의 순환을 다룬다. 플뤼데만은 이러한 주제들을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적 한계와 아름다움을 동시에 포착한다.
셋째, 초자연과 신비의 세계다. 'Venetianisches Gondellied'(베네치아 곤돌라 노래)는 이국적 분위기를, 'Don Massias'는 스페인의 열정을 음악으로 옮긴다. 'Die Meerfrau'와 'Russisches Lied'(러시아 노래)는 다른 문화권의 전설과 민담을 소개하며, 청중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이는 19세기 낭만주의가 추구한 이국주의(exoticism)와 연결된다.
넷째, 일상과 유머의 발견이다. 'Einkehr'(여관 방문), 'Nicht mit trüser Miene'(우울한 표정 짓지 말고), 'Gute Nacht'(좋은 밤) 같은 짧은 노래들은 일상의 소소한 순간들을 포착한다. 특히 플뤼데만의 유머러스한 에세이들은 발라드가 반드시 무겁고 비극적일 필요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Herr Peter und Bender saßen beim Wein'(페터 님과 벤더가 와인을 마시며 앉았네)은 음주의 즐거움을, 'Und als die Mitternacht'(그리고 자정이 되자)는 밤의 신비를 경쾌하게 다룬다.
재평가의 시작, 낭만주의 가곡의 확장
낙소스의 이 음반은 마르틴 플뤼데만이라는 이름을 21세기 청중에게 재소개하는 의미 있는 시도다. 20세기 내내 슈베르트, 슈만, 브람스의 리트가 독일 가곡 레퍼토리를 지배하면서, 플뤼데만 같은 '2세대' 작곡가들은 거의 잊혀졌다. 그러나 최근 음악학계는 19세기 말 독일 가곡의 다양성을 재조명하며, 이들의 작품이 지닌 고유한 가치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플뤼데만의 발라드는 독일 낭만주의 가곡의 범위를 확장한다. 그는 3분 남짓한 서정적 리트가 아니라, 15분이 넘는 대규모 음악극을 창조했다. 그의 작품은 오페라와 가곡의 경계에서, 실내악적 친밀함과 극적 웅장함을 결합한다. 라이트모티프와 준오케스트라적 피아노 반주는 후대 작곡가들, 특히 휴고 볼프와 한스 피츠너에게 영향을 미쳤다.
베스틀라인과 제디카르의 연주는 단순히 희귀한 레퍼토리를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플뤼데만 발라드의 극적 잠재력을 최대한 실현한다. 2시간 34분에 달하는 이 음반은 19세기 말 독일 문화의 풍부한 상상력과 음악적 다양성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다.
음악사는 소수 거장의 전유물이 아니라, 수많은 재능 있는 예술가들의 집단적 유산이다. 플뤼데만의 발라드는 이러한 진실을 확인시키며, 19세기 독일 가곡의 풍경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다채롭고 복잡했음을 일깨운다. 낙소스와 연주자들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21세기 청중은 120년 전 베를린 살롱에서 울려 퍼졌을 극적 발라드의 매력을 재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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