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리] 아이블러 '레퀴엠', 모차르트의 그림자에 가려진 걸작
고요비 기자
klifejourney2025@gmail.com | 2026-02-09 09:28:21
[K라이프저니|글·사진 고요비 기자] 독일 CPO 레이블이 발매한 요셉 레오폴트 아이블러의 '레퀴엠 C단조'(1803) 음반이 음악학계와 고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 주목받고 있는 음반이다. 1992년 7월 베첼라 대성당에서 녹음된 이 음반은 슈타인토르 바로크 브레멘과 알스펠더 보칼앙상블의 연주로, 지휘자 볼프강 헬비히의 해석 아래 잊혀진 빈 고전주의 작곡가의 진가를 드러낸다.
모차르트 레퀴엠의 완성자, 아이블러의 독자적 걸작
요셉 레오폴트 아이블러(1765-1846)는 음악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는 인물이다. 모차르트의 제자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그는 모차르트 사후 미완성으로 남겨진 '레퀴엠 K.626'의 완성을 의뢰받았으나, 스승에 대한 경외심과 창작의 부담감으로 결국 이 과제를 포기했다. 이후 모차르트의 미망인 콘스탄체는 프란츠 크사버 쥐스마이어에게 완성을 맡겼지만, 아이블러는 자신만의 레퀴엠 작곡을 통해 독자적인 음악세계를 펼쳐냈다.
아이블러의 '레퀴엠 C단조'는 1803년 작곡되었으며, 모차르트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19세기 초 빈 고전주의의 장엄함과 극적 표현력을 겸비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총 16개 파트로 구성된 이 작품은 전통적인 라틴어 전례문을 따르면서도, 각 악장마다 뚜렷한 성격과 대비를 보여준다. 특히 'Dies irae'(진노의 날)의 극적인 표현과 'Recordare'(기억하소서)의 서정적 아름다움은 작곡가의 탁월한 극적 감각을 드러낸다.
헬비히의 정교한 해석, 역사적 연주의 모범
지휘자 볼프강 헬비히는 슈타인토르 바로크 브레멘을 이끌며 바로크와 고전주의 시대 작품에 대한 역사적 고증 연주의 선구자로 활동해왔다. 이 녹음에서 헬비히는 18세기 말~19세기 초 빈 양식의 장엄함과 투명한 텍스처를 동시에 구현하며, 아이블러 음악의 구조적 치밀함과 감정적 깊이를 균형 있게 표현한다.
소프라노 바바라 슐릭, 알토 이졸데 아센하이머, 테너 하리 판 베르네, 베이스 하리 판 데르 캄프 등 네 명의 솔리스트는 각기 다른 음악적 배경을 지닌 당대 최고의 바로크 성악가들이다. 특히 슐릭의 맑고 투명한 음색은 'Agnus Dei'에서 경건한 기도의 분위기를 완벽하게 전달하며, 판 데르 캄프의 깊이 있는 베이스는 'Confutatis'의 심판 장면을 극적으로 묘사한다.
알스펠더 보칼앙상블은 독일 중부 헤센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전문 합창단으로, 역사적 연주 기법에 정통한 단체다. 이들은 헬비히의 지휘 아래 각 악장의 성격 변화를 섬세하게 표현하며, 'Sanctus'와 'Benedictus'에서는 천상의 환희를, 'Lacrimosa'에서는 인간적 슬픔을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18세기 빈의 궁정 작곡가, 보수와 혁신 사이
아이블러는 1765년 슈베하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빈에서 알브레히츠베르거에게 대위법을, 살리에리에게 작곡을 배웠으며, 모차르트와도 친분을 맺었다. 1792년부터 오스트리아 황실 부궁정악장으로 재직하며 황실 의례를 위한 종교음악을 다수 작곡했고, 1824년에는 궁정악장으로 승진해 사망할 때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
아이블러의 작곡 성향은 보수성과 혁신성의 절묘한 균형으로 요약된다. 그는 바로크 시대의 대위법 전통을 철저히 습득했으며, 특히 J.S. 바흐와 헨델의 합창 기법을 깊이 연구했다. 동시에 모차르트와 하이든으로 대표되는 빈 고전주의의 명료한 형식미와 극적 표현력을 자신의 음악에 통합했다. 그러나 베토벤이 보여준 급진적 혁신에는 동참하지 않았고, 전통적인 교회음악의 엄숙함과 품위를 평생 고수했다.
왕실의 애도, 레퀴엠 작곡의 배경
아이블러의 '레퀴엠 C단조'는 1803년 작곡되었으나, 정확한 위촉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존재한다. 가장 유력한 설은 오스트리아 황실 또는 귀족 가문의 장례 의식을 위한 위촉이라는 것이다. 18세기 말~19세기 초 빈에서는 유력 인사의 장례 시 특별히 작곡된 레퀴엠을 초연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이 작품이 아이블러 자신의 내적 필요에 의해 창작되었다는 해석도 제시한다. 모차르트의 레퀴엠 완성을 거부했던 그가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스승에 대한 경의와 자신의 음악적 역량을 증명하기 위해 독자적인 레퀴엠을 작곡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작품에는 모차르트 레퀴엠의 영향이 곳곳에 스며있지만, 아이블러만의 개성적인 화성 진행과 관현악법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죽음 너머의 구원, 신앙과 음악의 통합
아이블러의 레퀴엠은 가톨릭 전례문이 담고 있는 신학적 메시지를 음악적으로 구현하는 데 집중한다. 작품은 크게 세 가지 감정적 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첫째, 죽음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다. 'Dies irae'(진노의 날)와 'Confutatis'(저주받은 자들)에서는 심판의 날의 공포를 극적인 관현악과 합창으로 표현한다. 트럼펫과 팀파니의 강렬한 음향은 최후의 나팔 소리를 암시하며, 합창의 격렬한 대비는 구원받은 자와 저주받은 자의 대립을 상징한다.
둘째, 자비를 간청하는 기도의 간절함이다. 'Recordare'와 'Lacrymosa'에서 아이블러는 솔리스트들의 서정적 선율을 통해 인간의 연약함과 신의 자비에 대한 갈망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특히 'Recordare'는 4명의 솔리스트가 번갈아가며 각자의 탄원을 펼치는 구조로, 마치 오페라의 4중창을 연상시킨다.
셋째, 영원한 안식에 대한 희망이다. 'Sanctus', 'Benedictus', 'Agnus Dei'는 천상의 평화와 빛을 음악으로 형상화한다. 특히 마지막 'Cum sanctis' 푸가는 바로크 대위법의 정점을 보여주며, 영혼이 성인들과 함께 영원한 영광 속으로 들어가는 환희를 표현한다.
재발견의 의미, 음악사의 공백 메우기
이 음반은 단순한 음반 발매를 넘어 음악사의 중요한 공백을 메우는 작업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며 베토벤과 슈베르트, 브람스 등 소수 거장의 작품만이 연주되고 녹음되면서, 아이블러를 비롯한 수많은 '2류' 작곡가들의 작품은 도서관 서고에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역사적 연주 운동이 확산되면서, 음악학자들과 연주자들은 잊혀진 작곡가들의 작품을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아이블러의 경우, 그의 종교음악은 18세기 말 빈 교회음악의 전형을 보여주는 동시에, 모차르트와 베토벤 사이의 과도기적 양식을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한다.
이 녹음에 참여한 연주자들과 CPO 레이블은 단순히 희귀한 레퍼토리를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최고 수준의 연주로 입증했다. 약 52분에 달하는 이 레퀴엠은 모차르트나 베르디의 유명한 레퀴엠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음악적 깊이와 구조적 완성도를 지녔음을 보여준다.
음악사는 천재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수많은 재능 있는 음악가들의 집단적 노력으로 만들어진다. 아이블러의 '레퀴엠'은 이러한 진실을 다시 한번 일깨우며, 역사적 연주의 중요성과 문화유산 보존의 가치를 확인시켜준다. 헬비히와 연주자들의 헌신적인 작업을 통해 21세기 청중은 200년 전 빈의 장엄한 전례음악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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