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리] 찬티클리어의 미스테리아 - 그레고리오 성가의 본질을 되살린 불멸의 녹음
고요비 기자
klifejourney2025@gmail.com | 2026-04-02 09:08:48
[K라이프저니|고요비 기자] 찬티클리어(Chanticleer)는 197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단한 미국의 남성 성악 앙상블로, 이후 세계 최정상의 아카펠라 합창단 반열에 오른 단체다.
카운터테너부터 베이스까지 12명의 성악가로 구성된 이 앙상블은 중세 단성 성가에서 현대 작품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레퍼토리를 소화하지만, 그 출발점이자 정수는 언제나 중세의 전례 음악에 있다.
다스 알테 베르크(DAS ALTE WERK)는 텔덱 레이블 산하의 고음악 전문 시리즈로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와 구스타프 레온하르트의 역사적인 바흐 칸타타 전집을 비롯해 20세기 고음악 운동의 핵심 음반들을 다수 배출한 권위 있는 레이블이다. 찬티클리어가 이 시리즈를 통해 그레고리오 성가 음반을 발표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 녹음의 위상을 말해준다.
성주간의 전례 여정
찬티클리어가 녹음한 미스테리아(MYSTERIA) 음반의 가장 큰 특징은 단순한 그레고리오 성가 모음집이 아니라 카톨릭 전례력의 핵심인 성주간 전체를 음악적으로 순례하는 구조를 취한다는 점이다. 재의 수요일과 사순절로 시작해 성지 주일, 성목요일, 성금요일, 성토요일을 거쳐 부활절에 이르는 흐름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이라는 서사를 음악으로 온전히 체험하게 된다.
성금요일의 ‘Tenebrae factae sunt’, 장중한 교창 찬미가 ‘Pange lingua, Crux fidelis’, ‘Reproaches and Trisagion’ 같은 곡들은 성주간 전례 음악의 핵심 레퍼토리로, 찬티클리어는 이를 극적인 긴장감과 깊은 명상성을 동시에 담아 노래한다. 음반 후반부에는 성모 마리아를 기리는 교창 4곡 - ‘Alma redemptoris’, ‘Ave Regina caelorum’, ‘Regina caeli’, ‘Salve Regina’ - 을 배치해 성모 공경의 전통을 아름답게 마무리한다.
그레고리오 성가는 6~9세기에 체계화된 서방 교회의 단성 전례 성가로, 화성도 박자도 없이 오직 선율과 가사의 운율만으로 이루어진 음악이다. 20세기 들어 수도원의 수사들이 중세 필사본에 근거한 복원 작업을 주도했지만, 많은 합창단들이 낭만적이거나 과도하게 부드러운 음향으로 이를 재현해 왔다. 찬티클리어의 미스테리아는 이와 다른 길을 택한다.
각 성악가의 개성이 살아 있는 명료한 선율선, 절제된 다이나믹, 중세 대성당의 음향을 연상시키는 잔향 처리가 맞물려 그레고리오 성가 본래의 긴장감과 영성을 탁월하게 살려낸다. 과장 없이 투명하게 흐르는 목소리들이 겹쳐지는 순간, 듣는 이는 시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감각을 경험하게 된다.
역사적·음반학적 의미
1994년 녹음 당시는 1990년대 초반 그레고리오 성가 붐의 한복판이었다. 베네딕토 수도원 수사들의 음반이 팝 차트를 역주행하는 기현상이 일어나던 시대에 찬티클리어는 상업적 유행과 거리를 두고 학문적 진정성과 예술적 완성도를 추구했다. 그 결과물인 이 음반은 대중적 그레고리오 성가 음반들과는 분명히 다른 층 위에 자리한다.
WDR 쾰른의 우수한 녹음 품질과 DDD 디지털 방식으로 포착된 음향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빛을 잃지 않으며, 다스 알테 베르크 시리즈의 명반 중 하나로 고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 꾸준히 회자되는 음반이다.
오늘 이 음반을 듣는다는 것
소음으로 가득 찬 일상에서 61분간 이 음반에 귀를 기울이는 행위는 일종의 정신적 순례에 가깝다. 종교적 신앙과 무관하게 인류가 1000년 이상 같은 선율로 같은 가사를 노래해 왔다는 사실 - 그 연속성의 무게가 찬티클리어의 목소리를 통해 고스란히 전해진다. 재의 수요일의 겸허함에서 부활절의 환희까지, 이 음반은 침묵과 소리 사이에서 인간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물음을 조용히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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