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라이프저니|글·사진 고요비 기자] 그랜드 오페라의 조명과 교향악의 웅장함을 뒤로한 자리에, 때로는 가장 순수한 음악이 존재한다.
소프라노 바바라 보니가 2000년 말 데카(Decca) 레이블을 통해 발표한 '페어리스트 아일(Fairest Isle, 가장 아름다운 섬)'은 바로 그런 음반이다. 16~17세기 영국 르네상스와 바로크 초기를 수놓은 가곡들, 헨리 퍼셀(Henry Purcell), 존 다울랜드(John Dowland), 윌리엄 버드(William Byrd), 토머스 캄피온(Thomas Campion), 토머스 모리(Thomas Morley), 존 젠킨스(John Jenkins)의 작품들이 총 62분에 걸쳐 펼쳐진다. 독일 리트와 모차르트 오페라의 해석자로 명성을 굳혀온 보니가 뜻밖에도 영국 고음악이라는 전혀 다른 지형으로 발걸음을 옮긴 이 음반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선언이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어디에서 가장 빛나는지를 스스로 증명해 보인 기록이기도 하다.
영국 음악사의 황금기를 만든 작곡가들
이 음반에 이름을 올린 작곡가들은 저마다 영국 음악사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 인물들이다. 존 다울랜드(1563~1626)는 르네상스 후기 유럽 전역에서 가장 유명한 류트 연주자이자 작곡가였다. 그의 음악은 영국 궁정 문화의 정수를 담고 있었으며, 특유의 우수와 멜랑콜리로 영국을 넘어 대륙 전역에 영향을 미쳤다. 다울랜드의 가곡집은 '항상 슬픔에 잠긴' 그의 세계관을 가장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이다.
윌리엄 버드(1543~1623)는 엘리자베스 시대 영국 다성음악의 거장으로, 건반 음악과 성악 모두에서 독보적인 성취를 남긴 작곡가다. 토머스 캄피온(1567~1620)은 시인이자 의사이자 작곡가라는 보기 드문 이력의 인물로, 간결하고 우아한 멜로디로 영국 에어 장르를 빛냈다. 그리고 헨리 퍼셀(1659~1695)은 영국 오페라를 사실상 발명한 작곡가다. 1688년 이전에 완성되어 런던 첼시의 한 여학교 무대에서 처음 공연된 그의 오페라 '디도와 에네아스(Dido and Aeneas)'는 영국 최초의 진정한 오페라이자, 오늘날에도 세계 무대에서 끊임없이 공연되는 불멸의 작품이다.
눈물과 체념, 그리고 간헐적인 빛 — 수록곡이 담아낸 세계
이 음반을 일관하는 정서는 '눈물의 아름다움'이다. 수록곡의 중심을 이루는 다울랜드의 가곡들은 체념한 영혼이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읊조리는 독백처럼 들린다. 르네상스 유럽 전역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눈물이여, 흘러라(Flow, my tears)'는 기악 파반을 성악으로 변용한 작품으로, 인간 존재의 근원적 슬픔을 그토록 간결한 언어로 빚어낸 곡을 달리 찾기가 어렵다. '내 불평들이(If my complaints)', '저 자기애 강한 자들이여, 물러가라(Away with these self-loving lads)'가 뒤를 잇는다.
캄피온의 '날씨에 지친 돛이여(Never weather-beaten Saile)'는 지상의 고통을 넘어 영원한 안식을 갈망하는 영혼의 노래이며, '사이프러스 커튼이 밤을 가리고(The Cypress Curten of the Night)'는 어둠 속 정적의 아름다움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퍼셀의 '그대의 손, 벨린다… 대지에 뉘일 때(Thy hand, Belinda… When I am laid in earth)', 이른바 '디도의 탄식'은 인간이 언어로 빚어낼 수 있는 가장 품위 있는 슬픔을 얹어놓은 아리아로, 영국 바로크 음악의 절정을 이루는 걸작이다. 버림받은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가 죽음을 앞두고 부르는 이 노래는, 비극적 숭고함이라는 개념이 음악에서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완벽한 사례 중 하나다.
이 무거운 흐름 속에 생기를 불어넣는 곡들도 있다. 버드의 '아마릴리스가 초록 속에 춤추지만(Through Amaryllis dance in green)'의 경쾌함, 모리의 '사랑하는 자와 그의 여인(It was a lover and his lass)'의 유쾌함, 그리고 음반의 제목이 된 퍼셀의 '페어리스트 아일(Fairest Isle)'의 밝고 무도회풍의 분위기가 청자의 귀를 쉬게 한다. '페어리스트 아일'은 퍼셀이 존 드라이든의 '아서 왕(King Arthur)'을 위해 1691년 작곡한 곡으로, 섬나라 영국을 찬미하는 노래다. 음반의 제목을 이 곡에서 취한 것은 단순한 수사적 선택이 아니다. 화사하게 빛나면서도 어딘가 고요한 그 음악적 성격이, 이 음반 전체의 정취를 가장 응축적으로 대표하기 때문이다.
류트에서 오케스트라까지
이 음반의 또 다른 미덕은 편성의 설계다. 류트 독주 반주로 시작하여 비올 콰르텟을 거쳐 고음악 앙상블의 풍성한 음향으로 마무리되는 구조는, 음악적 피로를 교묘하게 비켜가면서 62분의 시간을 끝까지 긴장감 있게 이끈다. 앞부분을 채우는 류트 연주자 야코프 헤링만(Jacob Heringman)은 한없이 섬세하고 투명한 음색으로 보니의 성부와 이상적인 친밀감을 이룬다. 비올 콰르텟 판타즘(Phantasm)은 중반부에서 고풍스럽고 풍부한 내성부로 색채를 달리한다. 그리고 크리스토퍼 호그우드(Christopher Hogwood)가 이끄는 아카데미 오브 에인션트 뮤직(Academy of Ancient Music, AAM)이 후반부를 받쳐 올린다. 바이올린 오블리가토를 맡은 앤드루 맨쯔(Andrew Manze)가 퍼셀의 'The Plaint: O, let me weep'에 더하는 연주는 특별히 감동적이며, 젠킨스의 판타지아와 퍼셀의 두 기악 에어는 AAM에 의해 생기 있고 경쾌하게 연주된다.
호그우드와 AAM
크리스토퍼 호그우드(1941~2014)는 20세기 후반 고음악 부흥운동의 가장 중요한 주역 중 한 사람이었다. 케임브리지대학교 펨브룩 칼리지에서 음악과 고전학을 전공한 그는, 구스타프 레온하르트와 함께 하프시코드를 수학하고 라이먼드 레파드에게 지휘를 배우며 역사적 연주 실천의 이론과 실제를 겸비했다. 1973년 창단한 아카데미 오브 에인션트 뮤직은 시대악기를 사용한 바로크·고전 음악 해석의 기준을 새롭게 정립한 단체로, 모차르트 교향곡 전집을 시대악기로 최초로 녹음하는 등 음반사에 굵직한 이정표를 남겼다. 데카 레이블에만 200여 종의 음반을 남긴 이 앙상블은, '고음악의 카라얀'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던 호그우드의 지휘 아래 영국 바로크 음악의 정통한 해석자로 자리매김해 있다. 이 음반에서 호그우드와 AAM은 군더더기 없이 명쾌하고 생동감 있는 반주로 보니의 가창을 뒷받침하며, 오랜 세월 쌓아온 앙상블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바바라 보니 — 지성과 서정의 소프라노
1956년생인 바바라 보니는 어린 시절 피아노와 첼로를 배웠고,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에서 성악으로 전향한 후 독일 다름슈타트 오페라에서 40여 개의 역할을 소화하며 성악가로서의 기초를 다졌다. 코벤트 가든, 라 스칼라,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등 세계 최정상 무대에 선 그녀는,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파미나,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 조피로 특히 명성을 떨쳤다. 독일 리트와 콘서트 무대에서도 탁월한 역량을 보인 보니는 데카, 도이치 그라모폰, 텔덱 등의 레이블에 90종이 넘는 음반을 남겼다.
이 음반이 발매되기 직전인 2000년, 그녀는 스칸디나비아 음악을 담은 음반 '다이아몬드 인 더 스노우(Diamonds in the Snow)'로 그라모폰 어워드 최우수 독창 녹음상을 수상하며 커리어의 절정을 맞이하고 있었다. '페어리스트 아일'은 그 직후 발표된 자매 음반이다. 자신이 경험한 적 없는 영국 르네상스·바로크 레퍼토리를 이처럼 자연스럽고 설득력 있게 소화해냈다는 사실은, 보니라는 음악가의 지적 깊이와 스타일리스틱한 유연성을 방증하는 것이었다. "오직 가사를 완전히 소화한 뒤에야 음악이 당신을 통해 흐르도록 허용할 수 있다"는 그녀의 말은 이 음반에서 가장 잘 실현되어 있다. 텍스트의 뉘앙스를 음색과 호흡으로 조각하는 솜씨, 예술이 예술 자체를 감추는 경지의 기교, 그리고 무엇보다 이 내밀한 음악에 대한 진심 어린 애정이 62분 내내 음반을 가득 채운다.
"30년 만에 만난 최고의 성악 리사이틀"
이 음반에 대한 평단의 반응은 뜨겁고 일관되었다. 영국의 권위 있는 음악 전문 매체 뮤직웹 인터내셔널(MusicWeb International)은 "버드와 다울랜드에서 퍼셀까지 이어지는 영국 가곡의 즐거운 여정으로, 보니는 공감 어린 반주 음악인들과 함께 이 레퍼토리에 대한 자신의 진정한 기쁨을 전달하는 데 완전히 성공했다"고 평했다. 그라모폰지는 "영국 초기 음악을 담은 매혹적인 프로그램으로, 보니는 이 레퍼토리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호평을 게재하였다.
평론가들 역시 열광적이었다. "30여 년간 들어온 성악 리사이틀 음반 중 최고"라는 극찬이 나왔고, "예술로 예술을 숨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음반"이라는 평도 이어졌다. 한 평론가는 "보니의 빛나는 소프라노가 디도의 비극적 삶 위를 유영하는 모습은 전장 위를 떠도는 참새 한 마리를 연상케 한다"며 특히 음반 후반부의 퍼셀 연주를 최고의 순간으로 꼽았다. 또 다른 평론가는 "류트의 아름다운 음색에서 출발해 비올 콰르텟의 고풍스러운 내성을 거쳐 AAM의 풍성한 음향으로 마무리되는 이 프로그램 구성은 음악적 피로를 교묘하게 비켜가며 청자의 귀를 끝까지 붙잡아둔다"고 분석했다.
이 음반은 보니의 목소리와 영국 초기 음악이 얼마나 완벽하게 어울리는지를 60분 남짓의 시간 안에 설득력 있게 증명해 보인다. 오페라 무대의 화려함도, 교향악의 장대함도 없는 자리에서, 한 소프라노와 고음악 음악인들이 함께 열어 보인 이 내밀하고 고요한 섬은 여전히 가장 아름다운 섬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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