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 구타이(具体)가 낳은 시적 추상화가, 모토나가 사다마사···실험 정신의 응축

고요비 기자

klifejourney2025@gmail.com | 2026-06-18 16:28:25

모토나가 사다마사(元永定正)의 작품(Work)

[K라이프저니|고요비 기자] 붉은 화면 위로 솟아오른 거대한 둥근 형상, 그 아래 가로지르는 칠흑 같은 능선, 그리고 경계를 비집고 나온 작은 붉은 점 하나. 모토나가 사다마사(元永定正)의 1971년작 ‘작품(Work)’은 단순한 색면 구성처럼 보이지만, 들여다볼수록 일본 전후 미술 50년의 실험 정신이 응축된 화면임을 알게 된다.

구타이 1세대, 일본 전후 미술사의 한 축

모토나가 사다마사는 1922년 일본 미에현 이가우에노에서 태어나 2011년 효고현 다카라즈카에서 생을 마감한 작가로, 전후 일본 실험미술의 한 축이었던 구타이 미술협회(具体美術協会)의 창립 세대에 속한다. 본래 만화가를 꿈꾸었던 청년 시절을 지나 회화로 방향을 돌린 그는 고베로 이주한 뒤 본격적으로 추상의 세계에 발을 들였고, 1955년 구타이에 합류해 그룹이 해체로 향하던 1971년까지 핵심 멤버로 활동을 이어갔다.

그가 미술사에서 특별히 거론되는 이유는 단체의 틀을 넘어 독자적인 국제적 위상을 확보한 거의 유일한 구타이 작가였기 때문이다. 전후 유럽에서 앵포르멜 운동을 세계적 흐름으로 확립하려던 비평가들의 시야에 일찍이 포착되면서, 그는 동료들보다 앞서 해외 화단과 직접 접촉할 기회를 얻었다. 뉴욕과 토리노의 화랑·연구기관과 이어진 인연을 발판으로 베니스 비엔날레와 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 등 국제 무대에 꾸준히 이름을 올렸으며, 이는 구타이라는 집단적 정체성과 개인 작가로서의 명성을 동시에 쌓은 드문 사례로 평가된다.

번짐과 분사가 만든 화면

모토나가의 화업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물성(物性)’이다. 색을 입힌 물을 채운 비닐 튜브를 나무 사이에 매달아 늘어뜨린 초기 설치 작업, 연기를 재료로 끌어들인 무대 작업, 캔버스를 기울여 물감을 자유롭게 흘려보내던 앵포르멜풍 회화에 이르기까지, 그는 평생 ‘재료가 스스로 말하게 하는’ 방식을 탐구했다. 화업 후반으로 갈수록 그는 일본 전통 회화의 번짐 기법을 자신만의 어휘로 변주하고, 붓을 대신해 에어브러시로 아크릴 안료를 미세하게 분사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번 작품 역시 그 분사 기법의 산물이다. 붉은 바탕 위에 자리한 거대한 반원형 면은 윗부분의 짙은 적갈색에서 황금빛으로, 다시 우윳빛 흰색으로 부드럽게 번져가는 그라데이션으로 처리되어 있다. 그 아래로는 산의 능선인지, 거대한 생물의 옆모습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칠흑의 형상이 화면을 가로지르고, 그 경계 위로 작은 붉은 원이 마치 태양처럼 살짝 고개를 내민다. 구체적 형상을 묘사하지 않으면서도 일몰 풍경, 동물의 두상, 알 수 없는 생명체의 실루엣 등 여러 갈래로 동시에 읽히는 모호함, 그것이 이 화면이 지닌 고유한 화법이다.

안료의 입자감과 색 자체의 물성

이 작품이 그려진 1971년은 모토나가가 구타이 활동을 마무리하던 해다. 단체의 실험적 유산을 한 몸에 응축하면서도 이후 독자적 화업으로 넘어가는 분기점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미술사적 무게를 지닌다. 유기적 형태와 기하학적 단순함, 따뜻한 색과 차가운 흑색, 존재와 부재가 한 화면 안에서 팽팽하게 맞서는 구성은 ‘이전에 없던 것을 만든다’는 구타이 정신을 가장 회화적인 언어로 옮긴 결과라 할 만하다. 손의 붓질이 아니라 에어브러시라는 도구로 안료의 입자감과 색 자체의 물성을 화면의 주제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 그림은 무엇을 ‘재현’하는가보다 색과 면이 스스로 무엇을 ‘드러내는가’를 묻는 작업으로 평가받는다.

그림 속 묘한 긴장과 유머

화면을 마주하면 가장 먼저 다가오는 것은 고요함이다. 거대한 둥근 빛 덩어리는 어둠을 뚫고 떠오르는 새벽빛처럼, 혹은 산 너머로 저물어가는 황혼처럼 읽히며 보는 이를 명상적인 정조 속으로 이끈다. 그러나 그 정적 너머에는 어딘가 익살스러운 기운도 함께 흐른다. 매끈한 반원과 둔중한 흑색 덩어리가 만들어내는 형태는 거대한 생명체의 옆모습처럼 보이기도 해서, 엄숙한 자연 풍경과 동화 속 캐릭터 사이를 오가는 듯한 묘한 긴장과 유머가 동시에 전해진다. 이는 작가 전반에 깃든 천진한 해학과 무관하지 않은 정서다. 작은 붉은 원 하나가 거대한 어둠의 경계를 비집고 나온 모습에서는 작은 빛이 거대한 침묵을 건드리는 듯한 서정적 울림이 전해진다.

현대 회화에 미친 영향

모토나가의 영향력은 동시대를 넘어 후대 회화로까지 이어진다. 화업 후반 큰 붓질과 분사 기법으로 그려낸 작업들은 유럽과 미국에서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출현한 거친 필치의 회화 흐름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그의 작업은 정치적 메시지를 담지 않았으며, 예술의 향유 범위를 비전문가 대중에게로 넓히려는 해방적 예술의 한 갈래로서 어린이 예술책, 인터랙티브 공공 조각, 공공 퍼포먼스, 예술 교육 등을 통해 구현되었다는 점에서 독자적 위치를 갖는다.

그가 1950년대에 시도한 비닐 튜브와 물을 활용한 설치 작업은 환경미술과 뉴미디어 아트가 본격적으로 통용되기 전에 이미 장소특정성과 회화·조각의 경계 넘기라는 문제의식을 선취한 시도로 평가되며, 이는 이후 설치미술과 환경미술 흐름을 예고한 선구적 작업으로 거듭 재조명되고 있다.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의 대규모 구타이 회고전에서 그의 대표 설치작이 거대한 로툰다 공간에 재현되며 새로운 세대의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도 이러한 재평가의 연장선이며, 최근 일본 내 여러 미술관에서 잇따라 열린 회고전들 또한 그의 작업을 다시 활발히 조명하고 있다.

경매시장에서의 위치 

구타이 작가들의 시장 가치는 2010년대 중반 해외 주요 미술관의 대규모 회고전을 거치며 본격적으로 상승했다. 그룹 내에서는 가즈오 시라가가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요시하라 지로, 시마모토 쇼조, 다나카 아쓰코 등이 그 뒤를 이으며 각자의 작가 최고가를 잇달아 경신해왔다. 모토나가 역시 이 시기 작가 최고가가 백만 달러 단위로 형성되며 구타이 시장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다만 시장에 보다 빈번하게 등장하는 그의 중소형 작품들은 이보다 훨씬 낮은 가격대에서 거래되는 경우가 많다. 홍콩과 아시아권 경매에서는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 선, 대형 회고전급 작품의 경우 수억 원대까지 폭넓게 분포한다. 크리스티, 소더비, 필립스, 본햄스 등 주요 경매사들은 컨템포러리 데이 세일과 아시안 아트 세일에서 그의 작품을 지속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1971년 전후 분사 기법 시기처럼 구타이 활동기의 전환점에 해당하는 작품은 통상 더 높은 평가를 받는 경향을 보인다. 일본 전후 미술이 국제 미술시장에서 재조명받는 흐름이 이어지는 한, 모토나가의 시장 가치 역시 점진적 상승세를 탈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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