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 캔버스에 잠든 바그너의 신화, 헤르만 헨드리히의 '지크프리트의 죽음'

고요비 기자

klifejourney2025@gmail.com | 2026-08-04 16:01:48

헤르만 헨드리히의 '지크프리트의 죽음'(부분)

[K라이프저니|고요비 기자] 독일 화가 헤르만 헨드리히(Hermann Hendrich, 1854~1931)가 1924년에 그린 '지크프리트의 죽음(The Death of Siegfried)'은 어두운 보랏빛 하늘, 황금빛 개기일식, 그리고 등에 창을 꽂힌 채 쓰러진 영웅의 육체를 묘사하고 있다.

언뜻 종교화처럼 보이는 이 그림은 사실 게르만·북유럽 신화의 가장 비극적인 장면, 즉 니벨룽의 노래(Nibelungenlied) 속 영웅 지크프리트의 최후를 담고 있다.

빵집 아들에서 '신화의 화가'로

헨드리히는 1854년 독일 튀링겐주 헤링겐에서 제빵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를 접하고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음악이 불러일으키는 신화적 이미지를 화면에 옮기고 싶다는 열망을 품게 된다. 1870년대 초 석판화 견습생으로 미술계에 발을 들인 그는 하노버의 램프 공장에서 카탈로그 그림을 그리며 생계를 유지하다, 1875년 베를린으로 이주해 유화로 전환했다. 이후 뮌헨의 요제프 벵글라인과 베를린 아카데미의 오이겐 브라흐트 밑에서 사사하며 화법을 다졌고, 1876년 노르웨이 여행에서 얻은 북유럽의 풍광과 신화적 정서는 그의 예술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소재가 되었다.

헨드리히는 단순히 캔버스에 신화를 그린 화가가 아니었다. 그는 독일 각지에 신화를 주제로 한 대규모 전시 공간, 이른바 '전설의 전당(Sagenhalle)'을 직접 건립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1901년 탈레(Thale)의 '발푸르기스할레', 1903년 슈라이버하우의 '자겐할레', 그리고 1913년 바그너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드라헨펠스(Drachenfels)에 세운 '니벨룽엔할레(Nibelungenhalle)'가 대표적이다. 특히 니벨룽엔할레에는 니벨룽의 노래 연작 12점이 걸려 있어, 오늘 소개하는 '지크프리트의 죽음'과 같은 계열의 작업이 그의 화업에서 얼마나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1889년에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그의 작품을 직접 매입하며 황실의 후원을 받기도 했다.

낭만주의와 유겐트슈틸 사이, '반(反)모던'의 화가

헨드리히는 미술사적으로 신낭만주의(Neo-Romanticism) 화가로 분류된다. 19세기 독일 낭만주의가 자연과 감정, 신화적 상상력을 중시했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세기말 유겐트슈틸(아르누보)의 장식적 선묘와 신비주의적 색채감을 흡수한 화풍을 구사했다. 그는 1905년 '베르단디분트(Werdandibund)'라는 예술가 단체를 공동 창립했는데, 이는 당시 부상하던 아방가르드·모더니즘 미술 경향에 반대하며 전통적 독일 민족 서사와 신화적 소재를 옹호하는 흐름이었다. 이 때문에 헨드리히는 미술사에서 종종 '주류 모더니즘의 그늘에 있던 화가'로 평가받지만, 동시에 독일 낭만주의 신화 회화의 마지막 계승자이자, 바그너 오페라의 시각적 번역자라는 독자적 위상을 부여받는다.

지크프리트 신화, 무엇을 그렸나

이 작품이 묘사하는 것은 니벨룽의 노래(및 바그너의 4부작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에 등장하는 지크프리트의 죽음 장면이다. 신화 속에서 지크프리트는 용을 죽이고 그 피에 몸을 담가 불사의 몸이 된 영웅이지만, 등 사이 한 곳에 나뭇잎이 붙어 있던 탓에 그 부위만은 치명적인 약점으로 남았다. 그는 사냥 도중 하겐(Hagen)의 창에 등을 찔려 숨을 거둔다. 그림 속 쓰러진 인물의 등에 꽂힌 창, 그리고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핏자국이 바로 이 장면을 가리킨다.

화면 오른쪽에 뿔 달린 투구를 쓰고 검은 로브를 입은 거대한 인물은 최고신 보탄(오딘)으로 해석된다. 그가 하늘을 향해 치켜든 주먹과, 그 뒤로 떠오른 금빛 원환은 태양이자 동시에 신들의 황혼(라그나로크)을 예고하는 상징적 장치로 읽힌다. 이 원형의 빛은 실제 일식을 연상시키는 형태로 그려져, 지크프리트의 죽음이 곧 신들의 시대가 종말을 향해 가는 우주적 사건임을 암시한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까마귀 두 마리 역시 오딘의 상징 동물로, 죽음과 예언을 관장하는 신의 임재를 재차 확인해 준다.

화법에서는 무디고 어두운 보랏빛과 청록빛 색면이 화면 전체를 지배하며, 인물의 살빛만이 유일하게 밝은 톤으로 처리돼 극적인 명암 대비를 이룬다. 세밀한 선묘로 처리된 배경의 구름과 초원은 판화적인 질감을 남기는데, 이는 헨드리히가 석판화가로 미술을 시작했던 이력과 무관하지 않다. 전체적으로 사실주의적 인체 묘사와 상징주의적 배경이 공존하는 독특한 화면 구성이다.

헤르만 헨드리히의 '지크프리트의 죽음'

독일 민족 서사시의 시각적 기념비

'지크프리트의 죽음'은 단순한 신화 삽화가 아니라, 19세기 말~20세기 초 독일이 니벨룽의 노래를 '민족적 서사시'로 재발견하던 문화적 흐름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바그너가 음악으로, 헨드리히가 회화로 이 신화를 재해석하며, 게르만 신화는 독일 정체성과 문화적 자부심을 상징하는 소재로 자리매김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헨드리히의 니벨룽 연작은 단순한 미술사적 가치 외에도, 독일 근대사의 문화적 자기 이해를 살펴볼 수 있는 사료적 가치를 함께 지닌다.

몰락 속에서 피어나는 비극적 숭고함

이 그림을 마주하면 가장 먼저 다가오는 감정은 '숭고한 상실감'이다. 영웅의 육체는 무력하게 땅에 널브러져 있지만, 그 뒤로 떠오르는 황금빛 원환은 이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은, 더 큰 우주적 질서 속의 한 순간임을 암시한다. 어둠과 빛, 죽음과 신성이 한 화면 안에 공존하면서, 관람자는 애도와 경외가 뒤섞인 복합적인 정서를 경험하게 된다. 마치 바그너의 음악이 클라이맥스에서 장엄한 침묵으로 잦아드는 순간을 그림으로 옮겨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 쓰러진 몸 아래로 흐르는 작은 샘물은 생명이 다한 자리에서도 계속되는 자연의 순환을 암시하며, 비극 속에서도 한 줄기 서정성을 남긴다.

대중적 신화 이미지의 원형이 되다

헨드리히가 미술사 전체에 끼친 영향은 아방가르드 화가들만큼 크지 않지만, 그가 남긴 신화 도상은 이후 대중문화 속 '북유럽 신화 이미지'의 시각적 원형으로 널리 재생산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가 세운 니벨룽엔할레와 자겐할레 등의 '전설의 전당'은 지금도 관광지로 남아 신화 회화를 대중과 연결하는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으며, 20세기 이후 판타지 삽화, 오페라 무대미술, 심지어 현대 게임·영화의 북유럽 신화 이미지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남긴 것으로 평가된다. 다만 그가 공동 창립한 베르단디분트가 훗날 독일 민족주의 미학과 연결되며 정치적으로 이용된 측면이 있다는 점은, 헨드리히의 예술사적 유산을 논할 때 함께 짚어야 할 대목이다.

헤르만 헨드리히의 '지크프리트의 죽음'(부분)

'희소하지만 대중적으로는 저평가된' 화가

미술시장 데이터업체 뮤추얼아트(MutualArt)와 아트프라이스(Artprice) 등의 집계에 따르면, 헨드리히의 작품은 2000년 이후 경매에서 유화 기준 최고 약 8,400달러('리하르트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세 점의 회화')에 낙찰된 바 있으며, 종이 작품은 최고 약 1,189달러 선에서 거래됐다. 전체 출품작의 낙찰률은 70%대 중반으로, 시장에 자주 등장하지는 않지만 꾸준히 거래되는 편이다. 바세인지(Bassenge), 슐로스 알덴 경매 등 독일계 경매사에서 주로 다뤄지며, 이는 그의 명성이 여전히 독일 내수 시장, 특히 바그너·게르만 신화 애호가 컬렉터 층에 집중돼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같은 시기 활동한 유명 상징주의·아카데미 화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대다. 전문가들은 이를 두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헨드리히의 대표작 다수가 실내 벽화나 대형 전시홀에 남아 유통되지 않는 '비매물' 상태라는 점, 둘째, 그의 화풍이 국제 미술시장의 주류 담론(인상주의, 모더니즘)과 다소 거리가 있는 '지역적·주제적 특수성'을 지닌다는 점이다. 다만 최근 판타지·신화 소재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헨드리히와 같은 신낭만주의 신화 화가들의 재평가 움직임도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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