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리] 클래식 음악의 한 시대가 지다 — 마이클 틸슨 토마스 영면, 향년 81세
고요비 기자
klifejourney2025@gmail.com | 2026-04-26 13:01:57
[K라이프저니|글·사진 고요비 기자] 미국 클래식 음악계가 깊은 슬픔에 잠겼다.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 초입까지 미국 지휘계를 대표해온 마이클 틸슨 토마스(Michael Tilson Thomas)가 지난 22일(현지시간) 영면했다. 그의 나이 81세였다. 수년간 그를 괴롭혀온 병마는 교모세포종(Glioblastoma Multiforme)이었다.
뇌종양 중에서도 가장 진행이 빠르고 예후가 나쁜 것으로 알려진 이 악성 종양 앞에서, 그는 끝내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임종은 샌프란시스코 자택에서, 오랜 세월 그의 곁을 지켜온 가족과 지인들이 함께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1944년 12월 21일,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난 그는 지휘자로서의 삶을 중심에 두면서도 작곡가와 피아니스트로서의 역량을 두루 갖춘 음악인이었다.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명예 수석 지휘자이자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명예 음악감독으로서 세계 정상의 오케스트라들과 깊은 인연을 맺었고, 생전에 남긴 음반만 해도 120장을 훌쩍 넘는다. BBC와 PBS를 통한 텔레비전 시리즈 제작, 뉴욕 필하모닉 청소년 음악회 진행 등 클래식 대중화를 위한 행보도 그가 일관되게 걸어온 길이었다.
스물넷, 예고 없이 역사 앞에 서다
한 예술가의 이름이 역사에 새겨지는 순간은 대개 준비된 무대 위에서 온다. 그러나 틸슨 토마스의 경우는 달랐다. 1969년, 미국 동부 매사추세츠주 탱글우드에서 열린 음악제에서 그는 명망 높은 쿠세비츠키상을 수상하며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부지휘자 자리를 꿰찼다. 그러나 정작 세상이 그의 이름을 기억하게 된 계기는 상이나 직함이 아니었다.
그해 가을, 보스턴 심포니의 정기 공연 도중 수석 지휘자 윌리엄 스타인버그가 건강 이상으로 무대를 떠나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리허설도, 사전 조율도 없었다. 스물넷의 청년이 즉각 지휘대에 올랐다. 떨리는 기색 하나 없이 오케스트라를 장악한 그의 모습에 객석은 술렁였고, 공연이 끝날 무렵에는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그날 저녁 이후, 마이클 틸슨 토마스라는 이름은 미국 음악계의 미래로 각인됐다.
그는 이후 1974년까지 보스턴 심포니의 주요 객원 지휘자로 활약했다. 1971년부터는 뉴욕주 버팔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직을 수임해 1979년까지 이끌었으며, 같은 기간 뉴욕 필하모닉의 청소년 음악회 시리즈를 함께 맡아 다음 세대의 청중을 길러내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 한 도시를 바꾼 25년
지휘자로서 틸슨 토마스의 이름 앞에 가장 자주 붙는 도시는 샌프란시스코다. 그와 샌프란시스코 심포니의 인연은 19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 관계는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52년간 이어졌다. 함께 오른 무대만 약 1,800회에 달한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1995년이었다. 그해 음악감독으로 정식 취임한 틸슨 토마스는 이후 2020년까지 25년을 이 오케스트라와 함께했다. 부임 당시 샌프란시스코 심포니는 뉴욕이나 시카고의 그늘에 가려 국제 무대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처지였다. 그러나 그의 재임 기간은 오케스트라의 체질을 근본부터 바꿔놓았다. 연주 수준의 비약적 향상은 물론, 자체 음반 레이블 'SFS 미디어'의 창설로 이어졌고, 이 레이블을 통해 발표한 다수의 음반이 그래미상을 거머쥐며 세계 음반 시장에 샌프란시스코라는 이름을 확고히 새겼다.
그의 시도는 음반에 그치지 않았다. '키핑 스코어(Keeping Score)'라는 이름의 텔레비전·교육 통합 프로그램을 직접 기획해 진행하며, 악보와 연주회 너머에 있는 수백만 명의 시청자에게 클래식 음악의 문을 열어주었다. 그에게 지휘봉은 연주의 도구이기 이전에 소통의 언어였다.
말러와 미국 — 두 개의 거대한 축
틸슨 토마스의 음악 세계를 이해하려면 두 개의 이름을 먼저 떠올려야 한다. 구스타프 말러, 그리고 미국이다.
샌프란시스코 심포니와 함께 완성한 말러 교향곡 전집은 그의 음반 유산 중 가장 굵직한 기둥이다. 1번부터 9번까지 전 교향곡을 고해상도 슈퍼 오디오 CD(SACD) 포맷으로 발매한 이 전집은, 세부 성부의 균형과 구조적 일관성, 그리고 음악 안에 깃든 서사적 호흡에서 동시대 어떤 녹음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3번, 6번, 9번 교향곡은 전문가와 애호가 모두로부터 최고의 버전 중 하나로 꼽힌다.
한편 미국 음악의 전도사로서 그의 역할도 간과할 수 없다. 아론 코플런드, 찰스 아이브스, 스티브 라이히 등 미국 작곡가들의 작품을 세계 주요 무대와 음반으로 끊임없이 소개했다. 코플런드의 '애팔래치아의 봄'과 '로데오',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와 피아노 협주곡 등에 남긴 그의 녹음은 지금도 해당 레퍼토리의 기준점으로 통한다. 유럽의 거대한 전통 앞에서 미국 음악이 당당히 설 수 있도록 평생을 헌신한 지휘자였다.
젊은 음악가들을 위한 투자 — 뉴 월드 심포니
1987년, 틸슨 토마스는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비치에 전혀 새로운 성격의 오케스트라를 세웠다. '뉴 월드 심포니(New World Symphony)'는 공연을 목적으로 한 악단이 아니라, 음악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연주자들이 직업 세계로 나아가기 전 실전 감각을 연마하는 오케스트라 아카데미였다. 클래식 인프라가 취약한 사우스 플로리다 한복판에 이런 기관을 세운다는 발상은 당시 적잖은 이들의 고개를 갸웃하게 했다. 그러나 결과는 의심을 잠재웠다. 이 아카데미를 거쳐 간 연주자들은 현재 전 세계 수십 개 오케스트라의 단원과 수석으로 활약하고 있다. 틸슨 토마스의 유산은 음반 카탈로그 속에만 있지 않다. 지금 이 순간 무대 위에서 연주하는 수백 명의 음악가들 안에도 살아있다.
디지털 시대에 대한 감각도 남달랐다. 유튜브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두 차례 발족해 오디션부터 공연까지 전 과정을 온라인으로 진행하며, 전 세계 젊은 음악가들을 국경 없이 한 무대로 불러 모았다. 클래식 음악이 낡은 전통의 박물관이 아니라 시대와 호흡하는 살아있는 예술임을 직접 증명한 것이다.
지휘봉 너머의 창작자
지휘자라는 타이틀이 워낙 압도적인 탓에 종종 가려졌지만, 틸슨 토마스는 창작의 언어로도 꾸준히 발언해온 작곡가였다. 그의 작품들은 역사의 비극과 인간의 내면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경향을 공유한다. 배우 오드리 헵번이 나레이션을 맡아 깊은 인상을 남긴 '안네 프랑크의 일기에서'(1990)는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음악으로 되살렸고, 히로시마 원폭 투하 50주기에 헌정된 '쇼와/쇼아'(1995)는 동서양의 비극을 하나의 제목 아래 나란히 세웠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어에서 길어 올린 '에밀리 디킨슨의 시'(2002)는 보다 내밀하고 서정적인 결을 보여준다.
만년의 창작열도 식지 않았다. 2023년, 피아니스트 유자 왕과 지휘자 테디 에이브럼스가 녹음한 그의 피아노 작품 '유 컴 히어 오프튼?(You Come Here Often?)'이 그래미 최우수 클래식 기악 독주 부문을 수상하며, 그의 작곡가로서의 위상을 다시금 확인시켰다. 80세를 맞아 발매된 4장짜리 박스 세트 'GRACE: 마이클 틸슨 토마스의 음악'(Pentatone, 2024)은 반세기에 걸친 그의 창작 여정을 한자리에서 조망하는 결산이자 선물이었다.
마지막 악장 — 그가 남긴 코다
2021년 여름, 뇌종양 수술 사실을 공개했을 때 음악계는 숨을 죽였다. 그러나 틸슨 토마스는 달랐다. 이후에도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 그리고 런던의 무대에 거듭 올랐다. 2024년 9월에는 뉴욕 필하모닉 시즌 개막 공연에서 말러 교향곡 5번을 이끌어 기립박수를 받았고, 암이 재발한 사실을 알린 2025년 2월 이후에도 그해 4월 샌프란시스코 심포니와의 무대를 끝까지 소화했다. 그 자리는 그의 80세 생일을 기리는 헌정 공연이기도 했다.
병의 재발을 알리는 성명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코다는 한 곡의 맨 끝에서 전체를 마무리 짓는 음악적 장치입니다. 그 길이는 작품마다 제각각입니다. 나의 삶에 찾아온 코다는 넉넉하고, 풍성합니다."
그래미 12회 수상,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오피시에, 미국 예술과학아카데미 정회원, 국가예술훈장, 그리고 2019년 케네디 센터 명예상. 화려한 이력이지만 그것만으로 이 사람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그는 상을 받기 위해 음악을 한 것이 아니라, 음악을 하다 보니 상이 따라온 사람이었다.
샌프란시스코 심포니는 오는 6월 18일, 20일, 21일 세 차례의 공연에서 베토벤 교향곡 9번을 그의 영전에 바친다. 합창이 장엄하게 울려 퍼질 그 자리에서, 청중은 비로소 한 시대의 마지막 악장이 끝났음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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