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하학적 언어로 빚은 농부의 초상—말레비치의 '들판의 농부'
고요비 기자
klifejourney2025@gmail.com | 2026-02-18 12:25:49
혁명과 예술 사이에 선 거장
[K라이프저니|고요비 기자]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 1879~1935)는 20세기 미술사에서 가장 급진적인 전환점을 만들어낸 화가 중 한 명이다.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태어나 폴란드계 가정에서 자란 그는 러시아 아방가르드 운동의 중심에서 '절대주의(Suprematism)'라는 독자적 미술 언어를 창안했다. 1915년 검은 사각형(Black Square)을 발표하며 회화의 역사를 근본적으로 뒤흔든 그는, 칸딘스키·몬드리안과 함께 추상미술의 3대 선구자로 미술사에 확고히 자리매김한다.
절대주의란 순수한 기하학적 형태와 색채만으로 감각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다. 사물의 외양을 재현하는 전통적 회화를 완전히 거부하고, 직사각형·원·십자형 등의 기본 도형과 원색으로 우주적이고 정신적인 진실에 다가가려 했다. 바우하우스, 데 스테일, 미니멀리즘에 이르는 현대미술의 거대한 흐름이 그의 사상에 빚을 지고 있다.
기하학으로 다시 불러낸 인간—'들판의 농부'의 화법
1928년에서 1932년 사이에 합판 위에 유채로 완성된 '들판의 농부(Farmer in the Field)'는 말레비치 만년의 독특한 전환기를 상징하는 작품이다. 순수 추상의 절정기를 지난 작가는 이 시기 인물의 형상을 다시 화폭에 불러들이되, 사실적 묘사 대신 기하학적 단순화를 극단까지 밀어붙였다.
캔버스를 가득 채운 인물은 반원형의 머리, 사다리꼴의 몸통, 그리고 대각선으로 교차하는 색면들로 이루어진다. 검정·흰색·파랑의 그라데이션이 흐르는 몸통은 육중한 존재감을 발산하고, 그 주변을 청록·주황·남색·붉은색의 기하학적 색면들이 역동적으로 에워싼다. 얼굴은 반으로 나뉜 반원—검정과 황금색—으로만 암시될 뿐, 어떤 표정도, 어떤 개인적 특징도 허용되지 않는다.
배경의 대각선 색면들은 러시아 구축주의의 에너지를 연상시키면서도, 화면 전체가 뿜어내는 정적인 무게감은 오히려 종교 이콘화의 장엄함에 가깝다. 합판이라는 소재 위에 쌓인 유채의 질감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아 화면에 물성과 시간성을 더한다.
정치적 억압 속에서 탄생한 침묵의 언어
이 작품이 제작된 1928~1932년은 말레비치 개인에게도, 소비에트 예술계 전체에게도 극도로 혹독한 시기였다. 스탈린 체제가 공고해지면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유일한 공식 예술 노선으로 강요되었고, 추상미술은 부르주아적·반혁명적 예술로 탄압받았다. 말레비치는 1930년 체포되어 수개월간 구금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농부라는 소비에트 체제가 요구하는 소재를 취하면서도, 그것을 순수한 기하학적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예술적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들판의 농부'는 그 자체로 검열과 이념 사이의 긴장 속에서 탄생한 침묵의 저항이자, 인간 존재의 보편성을 개인의 얼굴 없이 형태만으로 포착해낸 역설적 초상이다.
형태 너머의 시—감상자에게 남겨진 감정
이 그림 앞에 서면 묘한 적막감이 밀려온다. 얼굴도 없고, 손도 없고, 어떤 감정의 표시도 없는 이 거대한 형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존재감으로 화면을 압도한다. 검정에서 흰색으로 번지는 몸통의 그라데이션은 밤과 낮, 땅과 하늘,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를 오가는 농부의 일생을 은유하는 듯하다.
주변을 둘러싼 원색의 기하학적 색면들은 들판의 계절처럼 교차하고, 그 한가운데 홀로 우뚝 선 인물은 이름도 표정도 없는 '모든 농부'이자 '모든 인간'이다. 말레비치는 개인의 초상을 지움으로써 오히려 보편적 인간의 초상을 완성했다. 그것은 한 시대의 이념에 짓눌린 개인의 침묵이기도 하고, 대지 위에 영원히 반복되는 노동의 숭고함이기도 하다.
경매 시장에서의 말레비치—20세기 미술의 최고가 반열
말레비치는 경매 시장에서 20세기 러시아 아방가르드 회화의 절대적 정점에 위치한다. 2008년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그의 작품 '절대주의 구성(Suprematist Composition)'이 약 6,000만 달러(한화 약 870억 원)에 낙찰되며 당시 러시아 미술품 사상 최고가를 기록했다. 이후 같은 작품이 2018년 소더비 경매에서 8,580만 달러(약 1,240억 원)에 재차 낙찰되어 기록을 경신했다.
'들판의 농부'는 만년작으로서 합판이라는 특이한 지지체와 인물화로의 전환이라는 미술사적 맥락, 그리고 스탈린 시대라는 역사적 배경이 더해져 학술적·시장적 가치가 모두 높은 작품으로 평가된다. 말레비치 작품들은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국립미술관,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Stedelijk Museum), 뉴욕 현대미술관(MoMA) 등 세계 주요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시장에 출품되는 경우 수백억 원대의 낙찰가가 형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기하학으로 빚은 농부 한 명이 백 년의 세월을 견디며 여전히 우리에게 묻고 있다. 형태 너머에 무엇이 있는가, 그리고 이름 없는 존재가 품은 존엄은 얼마나 무거운가.
klifejourney2025@gmail.com
[ⓒ K라이프저니.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