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 '망각의 물을 찾아서' — 존 마틴의 숭고한 지옥도
고요비 기자
klifejourney2025@gmail.com | 2026-02-28 10:31:17
시대를 압도한 '파국의 화가' 존 마틴
[K라이프저니|고요비 기자] 존 마틴(John Martin, 1789~1854)은 19세기 영국 낭만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로, '묵시록의 화가(The Apocalyptic Painter)' 혹은 '파국의 화가(The Painter of Catastrophe)'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노섬벌랜드 출신의 그는 독학으로 그림을 익혀 런던 화단에 진출했으며, 거대한 캔버스 위에 펼쳐지는 압도적인 재난과 신화적 장면으로 당대 대중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미술사적으로 마틴은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가 정의한 '숭고(Sublime)' 미학의 가장 충실한 시각적 구현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자연의 거대함과 공포, 그리고 그 앞에 선 인간의 미소함을 극적으로 대비시키는 그의 화풍은 동시대 윌리엄 터너(J.M.W. Turner)나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낭만주의를 해석했다. 터너가 빛과 대기의 시학을 탐구했다면, 마틴은 어둠과 불꽃, 그리고 파멸의 스펙터클을 선택했다.
생전에는 대중적 인기와 달리 아카데미 화단으로부터 충분한 평가를 받지 못했으나, 20세기 후반 이후 재평가 작업이 활발히 이루어지며 현재는 영국 낭만주의 미술의 핵심 인물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불꽃과 절벽, 한 인간의 처절한 고독
'망각의 물을 찾는 사닥(Sadak in Search of the Waters of Oblivion, 1812)'은 마틴이 런던 왕립 아카데미(Royal Academy)에 출품해 화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초기 대표작이다. 화면 전체는 붉은 용암빛과 짙은 암흑이 격렬하게 충돌하며 지옥과도 같은 세계를 조성한다.
화면 왼쪽 상단에서 쏟아지는 강렬한 빛줄기는 신성하거나 초자연적인 힘을 암시하며, 거대한 절벽과 화산 지형이 그림 전체를 압도한다. 화면 중앙 하단, 폭포 끝 아슬아슬한 바위 위에 홀로 선 인물이 보인다. 그 인물이 바로 사닥이다. 그는 붉은 옷을 걸친 채 심연을 향해 몸을 기울이고 있으며, 이 광대한 재난의 풍경 속에서 한 점 먼지처럼 묘사된다.
마틴은 인물의 크기를 의도적으로 극도로 작게 처리해, 자연과 운명 앞에 선 인간 존재의 무력함을 극적으로 표현했다. 부분도는 이 장면을 확대해 보여주는데, 폭포의 유동하는 질감, 용암의 이글거리는 빛, 그리고 사닥의 고독한 실루엣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 붓질은 격렬하고 자유로우며, 특히 불꽃과 물의 대비는 마틴의 탁월한 빛 연출 능력을 증명한다.
그림의 가치와 미술사적 의미
이 작품은 단순한 종교화나 신화화의 범주를 넘어선다. 마틴은 이 그림을 통해 '개인의 절망적 여정'과 '우주적 공포' 사이의 긴장을 캔버스에 구현했으며, 이후 그의 대작 시리즈인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의 멸망(1822)', '대홍수(1834)', '심판의 날(1853)' 3부작으로 이어지는 창작 세계의 씨앗이 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이 그림은 19세기 영국 문학의 고딕(Gothic) 전통 및 바이런(Byron), 셸리(Shelley) 등 낭만주의 시인들의 세계관과 긴밀하게 공명한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운명적 비극, 구원을 향한 불가능에 가까운 탐색이라는 주제는 시대의 정신을 반영하며, 마틴을 단순한 '스펙터클 화가'가 아닌 사상적 깊이를 가진 예술가로 위치시킨다.
불꽃 위의 고독
이 그림 앞에 서면 먼저 숨이 막힌다. 붉고 뜨거운 세계가 온 사방에서 닫혀오는데, 그 한가운데 한 인간이 홀로 서 있다. 폭포는 소리 없이 쏟아지고, 저 멀리 용암은 조용히 타오른다. 공포는 소란스럽지 않다 — 오히려 이 그림의 공포는 그 적막함에 있다.
사닥은 뛰거나 도망치지 않는다. 그는 심연을 향해 몸을 기울인 채 무언가를 찾고 있다. 그 모습은 처절하기보다 숭고하다. 이 그림이 주는 감정은 공포와 경이, 연민과 경외가 뒤섞인 복합적인 것이다. 마치 베토벤의 후기 소나타처럼, 이 그림은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무언가를 건드린다.
사닥은 누구인가
사닥(Sadak)은 영국의 작가 제임스 리들리(James Ridley)가 1764년 출판한 동방 설화집 ‘정령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이 작품은 아라비안나이트의 영향을 받은 동방적 상상력으로 가득한 18세기 영국의 인기 문학이었다.
설화 속 사닥은 포악한 술탄의 명령을 받아 '망각의 샘물(Waters of Oblivion)'을 찾아 지옥과도 같은 여정을 떠난다. 이 샘물을 마시면 과거의 모든 기억과 고통을 잊게 된다는 것인데, 사닥이 이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이 처형된다. 그는 가족을 구하기 위해 불가능한 여정을 감행하며, 마틴의 그림은 바로 그 절정의 순간 — 지옥의 절벽 끝에서 망각의 물을 찾으려는 순간 — 을 포착한다.
이 이야기가 전하는 교훈은 복합적이다. 표면적으로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모든 것을 감내하는 헌신과 용기를 이야기하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망각'이라는 것이 과연 축복인가 저주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고통의 기억을 지운다는 것은 구원인가, 아니면 인간성의 상실인가 — 마틴은 이 이야기를 선택함으로써 단순한 영웅담이 아닌 실존적 딜레마를 시각화했다.
재평가받는 거장
20세기 중반까지 마틴은 ‘대중적이지만 고급 미술로는 저평가된’ 화가로 분류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영국 낭만주의 재평가 흐름과 함께 그의 작품들은 경매 시장에서 꾸준히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마틴의 주요 대작들은 현재 테이트 브리튼(Tate Britain), 래잉 아트 갤러리(Laing Art Gallery) 등 영국 주요 국립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어 시장 유통 자체가 제한적이다. 경매에 등장하는 소품이나 스케치, 판화 작품들은 수만 파운드에서 수십만 파운드 사이에 거래되며, 대형 유화의 경우 상당히 높은 가격대가 형성된다.
'사닥'이 그려진 이 작품의 경우, 마틴의 초기 대표작이자 그의 작가적 정체성을 정립한 작품으로서 역사적·미술사적 가치가 특히 높이 평가된다. 만약 이 작품이 경매에 출품된다면 수백만 파운드 이상의 가격이 예상된다는 것이 미술 시장 전문가들의 일반적 견해다. 마틴의 대작 '심판의 날(The Last Judgement)' 3부작은 테이트가 수십만 파운드를 들여 구입·복원한 바 있으며, 이는 그의 작품이 영국 문화유산으로서 갖는 위상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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